brunch

매거진 끄적끄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래리 Jun 03. 2017

조금은 노예가 되고 싶다.

너무 많은 자유는 사치이고 감당할 수도 없다.

얼마만에 쓰는 일기인지 모르겠다. 적어도 한달은 된 것 같다. 안쓰려고 작정한 건 아닌데 어쩌보니 이렇게 됐다. ‘시간이 없어서’라는 핑계를 대기엔 이틀에 한 번 씩은 꾸준히 롤을 해왔다. 그렇지만 일기를 쓰는 일은 내게 롤보다 못한 것인가.라는 물음에는 ‘아니다.’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다.


핑계를 대자면 요즘 딱히 일기 쓸거리가 없었을 뿐더러 굳어져버린 일상이란 걸 깨는 일이 쉽지가 않았다. 막스 베버는 중세 가톨릭과 다른 프로테스탄트들의 특징으로 자신의 삶 전체를 조직한다는 점을 꼽았다. 이는 근대 자본주의를 낳았고 근대인도 출현시켰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나는 스스로 전근대적 인물이라고 생각해왔으나, 취업을 앞두니 청교도 정신으로 무장해 삶을 조직하고 있었다. 일기 쓰는 일은 특별한 일이었던 반면 롤은 견고한 ‘일상’의 일부였다뜻이다.


이번 학기 루틴은 상당히 계획적으로 짜여졌다. 눈을 떠 신문을 읽고 점심을 먹고 학교를 가고 도서관에 갔다가 집. 2주에 한 번 금요일에 같은 길을 공부하는 친구들과 술 한 잔 하고, 토요일은 스터디, 일요일은 현대사회학 교재를 읽고 에세이 쓰기. 평일 저녁에 가끔 친구들과 만나는 약속을 제외한다면 정말 평이하게 흘러간 한 학기였다. 아, 어느새 대학생으로서 마지막 학기가 3주도 채 남지 않았다. 이번 학기는 인생의 7할을 차지했던 학생 신분을 탈피함과 동시에 근대인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 단단한 일상을 깨고서 이 늦은 시각에 일기를 쓰는 이유는 친구와 저녁을 먹고 잠시 얘기하며 떠오른 것들이 꽤나 인상깊었기 때문이다. 나는 비아냥 거리는 투로 인간에게 자유란 너무 사치라고 말해왔다. 실제로 복지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자본주의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물적 토대 없이 개인이 누리는 자유는 큰 의미가 없다.


오늘 친구와는 이런 거시적인 이야기보다 미시적인 이야기를 나눴다. 친구는 회계사 2차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데, 요즘 공부에만 매진하고 있고 자신의 사소한 모든 결정을 여자친구가 결정해 준다고 말했다. 심지어 내일 병원에 몇시에 갈 지, 치킨을 먹을지 말지 등의 아주 개인적이고 사소한 선택까지도! 가뜩이나 공부때문에 머리를 많이 쓰는데 저런 사소한 고민들까지 더해지면 삶이 너무 괴롭다는 이유에서 말이다. 공부 이외의 사소한 일들은 모두 여자친구가 하라는 대로 한단다!


격하게 공감이 갔다. 삼시세끼 꼬박꼬박 과일까지 챙겨먹는 자취생으로서 하루 하루 메뉴를 정하는 일은 상당히 고달프다. 취업 준비를 시작하고부터 손이 많이 가는 요리를 피하고 있기에 구매하게 되는 식재료가 한정되긴 하지만, 그래서인지 메뉴 선택이 더욱 힘들어졌다. 심지어 펜을 다 써서 펜을 사고, 새로 입을 팬티가 없어 빨래를 돌리는 일마저 신경이 쓰인다. 일상의 원심력이 워낙 강해 가끔 저런 일들은 깜빡 잊기도 한다.


인간의 능력에 한계가 있다고 확실히 느낀 하루였다. 선택 뿐 아니라 인식도 필요 이상의 것을 해야한다면 으레 짜증이 난다. 최근에는 다양한 가치들의 투쟁마저 소음으로 들리기 시작했다. 그것들에 부정적 감정을 갖는 건 도덕적으로 죄책감을 느끼기에 무미건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처리해야 할 정보값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최대한 관심을 가지려 노력은 하고 있지만.  


고대 그리스에서는 시민의 자유를 위해 노예제를 옹호했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일상을 위해 삶의 다른 부분은 누군가의 명령에 복종하고 싶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하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오래된 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