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1학년 때 선배에게 <생의 이면>을 추천 받아 읽은 뒤 이승우의 문체가 맘에 들어 그의 책 몇 권을 더 읽었다. 몇 권을 더 읽으니 그의 문장에 빠지고 말았다. 이승우 소설에 대한 애정은 나를 너머 친구에게까지 퍼져나갔고 그 친구 또한 이승우의 글에 빠지게 되었다.
친구가 군 복무를 하던 당시, 휴가 복귀 직전 이승우의 책을 사러 책방에 갔었다. 아쉽게도 내가 추천한 책이 없어 그가 집어들었던 게 오래된 일기다. 책을 읽은 뒤 친구는 역시나 만족스럽다고 했다. 화장실에 두고 한 번씩 읽기 딱이라는 말까지 덧붙여서. 그렇게 내 안의 애정을 받아들인 친구가 다시 나에게 애정을 돌려 보낸 책이 <오래된 일기>다.
이 책은 나와 2년을 함께 했음에도, 표지가 잘린 나무의 단면같아 그 동안 원목의 책장에 붙어 책장인 채로 자리를 지켜왔다. 책의 첫장을 오늘에야 열었다. 2년이나 홀대한, 오래된 나의 애정을 이제서야 확인한 이유는 거창하지 않았다. 아니 거창할수도 있는데 책을 읽고 가슴 속에 무언가가 꿈틀대기를 바랐다. 요즘 읽는 책들은 사회과학서적이 대부분이라 머릿속에서 무언가 꿈틀대고 치열하게 끓어오르는 건 있어도 가슴은 항상 차가웠기 때문. 책 읽기 직전 롤도 한 판 졌겠다, 이미 가슴에 워밍업은 돼 있는 상태. 준비 완료다.
<오래된 일기>의 첫 작품은 오래된 일기다. 30페이지 가량의, 나였다면 화장실에서 일 보는 동안 읽기에 너무 많은 양이다. 친구의 배변 활동이 건강하지 않은 듯하다. 무튼 이승우의 글은 역시나 좋았다. 요설체 비스무레한, 거기에 변명하는듯한 문장이 내 눈에 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30 페이지를 관통하는 죄의식이 나의 과거를 돌아보게도 하고 나를 짓누르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은 소설을 쓰던 규가 창기의 일기를 읽고 소설 쓰기를 포기한 부분이다. 규는 창기에게 “그 글을 쓰려고 하는 순간의 의식의 꿈틀거림? 그런 걸 정신의 핍절함이라고 하나? 암튼 그런 거 말이야. 그런 게 중요하다는 게 느껴지더라. 그런데 나에게는 그런 게 없더라고. 손끝의 재주로 쓰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는 말씀이지.” 라 말했다. 창기는 자신의 오래된 일기로 소설가가 됐다. 응모는 규가 했지만.
내 글은 어떨까. 오늘 맥주를 한 잔 같이 했던 친구는 내 글에 솔직함이 묻어난다고 했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일기를 쓸 때면 나는 꽤 진솔한 사람이 되는 느낌이 들었다. 평소에는 그렇지 않지만. 그럼에도 아직까지 풀어내지 않는 많은 것들이 내 안에 있다. 이걸 풀어내야 하나, 고민이 든다. 과연 이걸 다 끄집어내는 게 나를 위해 좋은 것일까하는 의문을 지울 수가 없다. 드러내려는 욕구와 은폐하려는 욕구가 치열하게 싸운 결과, 창기의 문장은 모순에 가득 찬 피투성이로 드러났다.
나는 아직까지 그렇게 치열하게 글쓰기를 해 본 적은 없으나, 솔직하면 솔직할수록 더 좋은 글이 나올 것 같은 예감이 틀리지는 않을 것 같다. 나도 오래된 일기를 남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