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성 위장염이 가져다 준
군 시절, 위장염을 친구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중대한 결정이었다. 평소엔 보이지도 않다가 가끔씩 찾아와서는 나를 괴롭게 만드는, 그 녀석을 내 평생의 동반자로 여긴다는 일은 쉽게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철같은 위장을 갖지 못한 탓도 있지만 욕구를 꽤나 중시하는 인간인지라 혓바닥을 위해 종종 위장을 희생시키곤 했다. 그때마다 위장염은 나를, 내 하루를 비틀었다.
이 말고도 예민한 면이 있는 탓에 극도의 불안이나 걱정때문에 말 그대로 이 ‘신경성’ 위장염이란 놈이 찾아오기도 했다. 이는 내가 어찌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아마 평생을 따라다닐 것이란 게 이성적인 판단이다. 그럼에도 감정적으로 이 녀석을 친구로 받아들이는 데엔 강한 거부감이 존재해 왔다.
어쨌든 이 신경성 위장염이 내 삶과 아주 밀접하다는 점만은 부인할 수 없다. 그와 관련한 ‘소화’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인지 나는 많은 것들을 소화에 비유해 표현한다. 브런치에 쓴 글만 해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브런치에 올리진 않은 것 같지만, 소화 과정 자체를 비유한 글도 많이 썻다. 특히나 군 시절에 뱀이 사랑을 나누는 모습에 위장염을 빗댄 게 기억이 난다.
오늘 스터디 과제로 쓴 작문도 그랬다. 또 소화를 비유로 들었다. 이는 불편하거나 아련한 감정을 표현할 때 효과적이다. 이번엔 자살로 죽은 이의 유서 마지막 문장이, 마치 자신을 향하는 것 같단 생각에, 주인공이 그 문장을 소화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모습을 그렸다. 위 속에 자리잡은 그 문장의 부피가 너무 커 밥을 먹을 수 없고, 무겁기까지 해 한걸음 내딛는 것조차 힘겹게 만든다는 표현도 곁들였다.
스터디원으로부터 저 표현이 좋다는 말을 들었다. 뿌듯했다. 저건 분명 내가 가장 잘 묘사할 수 있는 표현 중 하나다. 십년 이상을 함께 하고 직접 느낀 대상이기에 그만큼 치열하게 분석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예전에 이승우 소설을 읽으며 많은 작품에 ‘어둠 속에’ ‘웅크린’ 같은 단어가 많이 눈에 띄었던 기억이 났다. 문장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방식도 그의 독특한 글 스타일이다. 분명 작가가 선호하는 표현과 비유가 있다. 그게 내게 있어서는 ‘소화’와 ‘위장운동’에 관련된 것들이다. 이와 관련된 은유와 환유를 좀 더 다양하게 구사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