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을 배울 때 교수는 이것을 ‘distorted world view’라 했다. 세계를 바라보는 왜곡된 시각. 잘못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기 보다는, 편향된 시각에서 세계를 바라본다는 뜻이다. 하지만 편향되지 않은 완전하고 총체적인 시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은 각자의 ‘경험’으로 각자의 이데올로기를 구성해낸다. 그리고 이를 통해 불완전하게 세상을 바라본다. 지금도 주말마다 종로에 열리는 태극기 집회에 참여하는 분들은 한국의 현 모습을 망국에 가깝게 보는 반면, 다른 누군가는 이제야 비정상의 정상화가 이뤄지고 있다고 하듯 말이다.
타인이 바라보는 나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나 역시 사회처럼 끊임없이 규정되며 구성되는 존재다.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평가자의 ‘경험’에 따라 상반되는 평가도 받는다. 자제력이 없다와 자제력이 강하다. 너무 이성적이다. 너무 감성적이다 등등. 대한민국은 안전한 나라다. 그렇지 않다. 처럼 근거하는 내용에 따라 같은 대상이라도 전혀 다른 평가가 나올 수 있다. 애초에 ‘완전한 평가’란 존재할 수 없다.
얼마 전 모임에서 나에 대한 몇몇 평가를 들었다. 평가라기보다는 6개월 가량 내가 펼쳐온 발화와 태도에 근거한 타인의 추측이었는데, 이에 대해 나는 “멋대로 나를 규정짓지 말라”고 답했다. 나의 답에는 정말로 무언가를 함부로 규정짓는데서 오는 위험도 있었지만, 그 평가가 맘에 들지 않아서라는 이유도 포함돼 있었다. 아마 평가가 입맛에 맞았다면 나도 그저 웃음으로 넘겼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내가 받은 평가들은 이랬다. 소개팅을 하면 지적 우월감을 뽐낼 것 같다. 쉽게 말해 지식을 바탕으로 잘난척을 할 것 같다는 뜻. 또 사춘기 때 중2병에 심하게 빠졌을 것 같다. 이는 진지한 생각을 많이 해 어릴 적에는 자신만의 세계에 더 깊이 빠졌으리라는 추측이다. 그들이 바라보는 나는 그렇게 보일만 했다. 사회학에 열정을 보이며 사회와 학자들에 대해 떠들어왔고, 이번 모임의 토론 주제였던 푸코 역시 내가 정했다. 모임에서도 가장 많이 말한 사람은 나였으며 여러가지 개념을 설명하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의 주장을 쉽게 꺾지 않으며 타인의 주장에는 반박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그들은 6개월 간 나의 이런 모습만을 봐 왔다.
얼핏봐도 독선과 오만으로 가득 차 있다. 학부생 수준에서 푸코를 알면 얼마나 알 것이고 주장으로 내세우는 논거는 얼마나 탄탄할까. 이런 취약함을 토대로 완강한 모습만을 보여왔으니 위의 추측들이 응당 마땅하다. 그럼에도 그 평가가 싫었다. 잘난척하는 고집불통으로 규정지어지는 이미지가 싫었다. 단점을 받아들이고 고쳐나가자!라고 여기기엔 기분이 너무 나빴다.
당신들에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내게는 다른 많은 모습이 있다. 만나는 사람에 따라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평가도 많이 있었다. 그런데 중요한 건 모임에서 만나는 이들은 나의 다른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다. 지금과 같은 목적으로 모인다면 앞으로도 그럴 일은 거의 없을 것이고. 그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기 위해 전략적 태도를 취하기도 싫다. 그렇기에 앞으로는 나의 평가에 왈가왈부하지 않는 편이 서로 편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걱정이 있다면, 이데올로기는 너무나 강력하게 작동한다는 점이다. 한 번 어떤 시각이 자리잡으면 우리는 그것과 꼭 맞는 것들만 보려는 경향이 있다. 망치를 손에 들면 못만 찾게 되듯 말이다. 앞으로 그 모임 친구들은 나를 어떻게 바라볼지 모르겠지만 타인에 대한 평가는 최대한 유보적인 언어로 순화하자는 게 내가 말하고 싶은 바이다. 타인을 함부로 규정짓는 게 이런 쓰잘데기 없고 찌질한 글을 쓰게 하는 부정적인 결과를 불러일으키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