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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리 Oct 16. 2018

라떼충

“라떼는 말이야. 카페라떼를 줄인 단어야. 카페는 이태리어로 커피를, 라떼는 우유를 뜻하는데, 그러니까 커피에 우유를 타면...” 만약 당신의 친구가 카페에 앉아 위처럼 중얼거렸다면 당신은 단박에 그만, 자제 혹은 닥치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나때는 말이야.”로 대화를 시작한다면 이는 중단시키기가 쉽지 않다. 대부분 저런 말을 하는 이는 사회적 위치든 나이든 인간을 구성하는 다양한 정체성 중 여러 요소를 포함해 상대적으로 상위권력을 지닌 이가 내뱉는 말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대화 상대가 저런 말로 포문을 열었다면, 나는 당신이 누군지는 몰라도 그 사람보다 낮은 권력을 갖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다. 


‘라떼충’이라는 신조어가 있다. 라떼를 너무나 좋아하는 사람을 지칭하기 위해 혐오의 의미인 충(蟲)을 붙인 게 아니다. 소위 꼰대들이 자주 쓰는 ‘나때는’의 ‘나때’와 ‘라떼’가 어감이 비슷해 생긴 말이다. ‘-충’이란 표현이 한국을 더욱 심각한 혐오사회로 만든다는 비판에 일견 동의하지만, 라떼충만큼은 꽤나 적절한 단어인듯 싶다. 


살면서 수많은 라떼충을 만나왔지만, 인생 최고의 라떼충은 아이러니하게도 모 언론사 인턴시절에 마주했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활용하는 날카로운 비판정신은 언론사 내부에서는 무딘 칼날보다도 연약했다. 국장이라는 사람이 인턴 퇴근 시간 10분이 지난 후에 “라떼는”을 시전한다면, 인턴은 물론이거니와 7~8년차 기자도 묵묵히 입을 닫고 귀만을 열어놓았다. 


라떼는 이후의 내용은 이렇다. 기자가 가오가 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그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기자는 가오가 있어야 한다. 데스크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발제에 관해 의견충돌이 있다면 문제는 너에게 있다. 까라면 까라. 그러면서 발제 아이템은 날카로워야 한다고 말한다. 


현대 민주주의사회에서 집단의 몰락은 겉과 속의 모순에서 왔다. 겉으로는 평등을 표방하며 내부로는 끝없는 차별과 성폭력을 이어온 일부 진보집단은 21세기 들어 괴멸의 길을 걸었다. 만인의 자유를 외치며 소수 기득권만을 대변하는 한국 보수세력 역시 추락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렇다면 언론의 위기라는 현실 속에서 언론의 비판정신과 가오를 외치는 이들이 할 행동은 정해져 있다. 자신이 라떼충임을 깨닫고 당장 그 꼰대짓을 멈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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