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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리 Nov 02. 2018

청년들의 대화

취업난과 주거난.

정규직 전환에 실패한 나를 위로하기 위해 A가 저녁을 사기로 했다. 예전부터 학교 근처에서 술을 마셔도 막차가 끊길 때면 자신의 집에서 술 한잔 더하자고 권했던 A였다. 그가 밥을 살테니 집근처로 와달라는 부탁을 한 것도 딱히 어색한 일은 아니었다. 우리는 A가 세 들어 살고 있는 집 근처 유명한 보쌈집으로 갔다. 고기도, 굴을 곁들인 김치도, 붉은 양념에 절여져 당근처럼 보였던 무도 퍽 괜찮았다. 사이드메뉴로 시킨 잔치국수까지도. 대화는 당연히 나의 정규직 전환 실패와 언론 전반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래, 그 회사는 나를 담을 그릇이 못 됐던 거다.”


이렇게 말하고는 목구멍에서 찌질한 말들이 새어나오기 전에 막걸리와 보쌈으로 틀어막았다. 여느 때와 다름 없는 식사였다. 그가 하고 있는 일이 주는 스트레스와 언론 지형, 어떻게 살아갈지가 무상으로 제공되는 안주였다. 그러다 A가 분위기를 바꿨다.


“오늘 9시에 집주인이 잠깐 보자네. 전화로 할 이야기가 아니고 꼭 만나서 얘기해야 한다고. 집에서 한 잔 더 마시는데, 잠깐만 밖에서 기다려주소.”


A가 오늘 집근처로 나를 부른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급작스럽게 잡혔던 나와의 약속보다 먼저 집주인과 만나기로 했던 것이다. 흔쾌히 승낙했다. 집주인과 길면 얼마나 긴 이야기를 할까. 식사를 마치고 A가 집주인을 만나는 동안 나는 그의 집근처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취기가 살짝 오른 채로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파란불에서 빨간불로 몇 번씩 바뀌어도 A에게 연락은 오지 않았다. 결국 A와 같이 사는 동생에게 전화해 일단 그의 집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동생이었다. 그럼에도 서로의 근황을 대충은 알고 있었다. 내가 정규직 전환에 실패한 사실만이 새로운 이야깃거리였다. 다시 신나게 나의 탈락기를 설명했다. 그러던 찰나, 도어락을 누르는 전자음이 들렸고 A가 집에 들어섰다. 다들 궁금했다. 그가 대체 집주인과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길게 했는지. 우리가 무슨 얘기를 했냐고 묻자, 어이없다는 듯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A는 주인과의 대화를 녹음한 파일을 켰다.


“정말 죄송하고 미안한데, 젊은 친구한테 6000만 원이라는 돈이 큰돈이니까, 그래도 알려주는 게 맞는 것 같아서.”


핵심만 말하자면 집주인의 부인이 수십억에 달하는 연대보증을 섰는데 그때문에 집이 압류에 걸릴 판이라고 했다. 10일 뒤에 집에 딱지가 붙을 터이니 그 전에 다른 집을 구하면 당장 보증금을 돌려준다는 이야기였다. 대화 속 집주인은 미안하다는 말을 20번 정도는 했으며 10일까지의 월세는 받지 않고, 이사를 위한 비용도 지불하겠다고 했다.


세입자 입장에서는 당장 집을 나가라니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주인의 태도가 너무 공손해 모두가 혼란에 빠졌다. 월세를 올릴 예정이라면 그에 대한 언급을 했을 터인데 그런 것조차 전혀 없었다. 게다가 이 집이 가까운 시일 내에 다른 세입자를 찾는다고 부동산에 올라오면 100만 원을 주겠다고까지 말했다. 이런 말들로 의심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세입자로서는 당장 큰 액수의 보증금을 안전하게 돌려받는 것이 우선이었다. 전세권자 설정을 했기에 당장 짐을 빼지 않아도 되지만, 이후에 보증금을 온전히 돌려받을지는 모를 일이다.


우리는 한참을 머리를 싸매다 당장 새 집을 찾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이사온 지 2개월이 채 안 된 채로 다시 이사를 가야한다. 한 달 반 전, 이사를 마치고 이사라는 것이 얼마나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인간의 에너지를 소비시키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다. 또다시 그런 소모를 겪을 생각을 하니 모두의 표정이 지쳐보였다. 자신이 소유한 집이 없어 발생하는 문제였다.


취업난으로 시작해 주거난으로 끝난 오늘의 대화가 퍽 현시대 청년의 단면 같았다. 아니 어쩌면 대한민국 사회의 단면일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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