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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립소 Sep 12. 2021

파리병을 극복한 것 같다

다시 여행자로 파리를 걸으며

여행은 낯선 곳에서 현실의 삶을 잊는 데서 시작한다. 발길이 익숙하지 못한 옆동네 산책도 여행이 된다. 비록 삭막한 시멘트 건물이 미관을 해쳐도, 뻔한 나무들이 조경으로 가꾸어져 있어도, 낯선 동선만으로도 소박한 탐험가의 기분을 느낀다. 하지만 그 어떤 관광명소도 내 생활터전이 되기 시작하면 그곳은 더 이상 여행지가 아니다.


만학(?)의 희망을 안고 도착한 프랑스. 중부 작은 도시에서 어학 하던 시절, 두 번의 학기 방학 때 방문할 수 있었던 파리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는 화려한 여행지였다.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시아 여성은 벙어리와 다름없을지라도 홀로 모험가를 자청하며 두리번거렸다. 어떠한 정보도 없이 화려한 오스마니안 건물들과 낯선 인종의 사람들을 눈에 담아 학생 기숙사로 돌아왔을지라도 하루라도 빨리 지루한 언어 외톨이 삶을 마치고 눈부신 메트로폴리스로 입성해야겠다 라는 생각만 했다. 지금 생각하면 기가 막히지만, 9개월의 어학 코스만 통과한다면 프랑스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줄 알았다. 5개월이 지나도 음식점 가서 문장으로 음식 주문도 못했으면서 말이다.


여하튼 꿈꾸던 파리지엔느의 삶은 이루어지긴 했다. 15구의 지붕 밑 옛 하녀 방, 18구 상투앙 벼룩시장 인근 스튜디오, 20구 감베타 하우스메이트들과 아파트, 12구 나시옹 광장에서 중정 안 1층 집. 이사 다닌 횟수만큼 막상 파리에서 삶은 생각만큼 만만치 않았다. 물론 행복한 기억도 있지만 일상은 투쟁이었다. 숱한 인종차별과 그만큼 차곡차곡 쌓여가는 피해의식. 눈물겨운 사건들은 하루를 마다하고 밀려왔다. 프랑스어 회화는 절대 어학원에서 배운 것으로 늘지 않는다. 내 불어 구사능력의 절반 이상은 파리 생활 중 말다툼과 항의로부터 다져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름다운 파리가 이방인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현장이 돼버리니 나쁜 면만 눈에 보였다. 지하철의 석회 덩어리와 뭉쳐진 오물들, 지독한 지린내.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쓰레기들과 소음. 파리 마지막 거주지 나시옹에 살 때쯤엔 진심으로 이 시끄러운 도시를 떠나고 싶었다. 막 생업 생활을 시작한 때라 그것은 더욱 꿈같은 바람이 되었다. 이런 고충을 한국의 오랜 친구 S에게 토로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 다른 사람들이 정의 내린 의미와는 다르지만, 너 파리병 걸렸네."


맞다. 난 지독한 파리(떠나고 싶은) 병에 걸렸었다. 7년 만에 꿈의 도시 파리는 영혼을 거칠게 만든 더러운 도시가 되어버렸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은 파리에서 동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작은 외곽 동네이다. 행정구역이 엄연히 다르니 ‘탈’ 파리의 바람은 성사되었지만, 집에서 외곽선 RER 한정거장이면 파리 리옹역 인터 결국 이 동네도 파리 생활권이긴 하다. 그럼에도 생존의 출퇴근이 아닌 이상 그 한정거장의 경계를 쉽게 넘지 않는다. 외출은 귀찮은 일이고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 가면 어질어질해진다. 그리고 느닷없이 맞이한 코로나로 나는 더욱 집순이가 되었다.


산책의 재미를 잃고 집콕 생활과 코로나 시대 2년을 보내니, 우습게도 추억의 공간과 잠시 잠깐 반짝였던 거리가 퍼뜩 그리워지는 순간들이 있다. ‘그래 파리에서 생활이 나쁜 건만은 아니었어’ 라며 씁쓸한 기억들이 자꾸 윤색되고 있다. 여전히 우리 집이 제일 좋지만, 따뜻한 햇살 아래 거닐며 스스로를 조금 더 부드럽게 만들려 노력했던 경험이 불쑥 튀어나오곤 한다.


프랑스 내 높은 백신 접종률과 보건 패스 시행으로 외출이 자유로워지기 시작한 최근. 파리 12구에서 치과진료를 마치고, 모처럼 외출한 만큼 한때 자주 가던 카페에서 커피 한잔 하려는 계획을 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하니 문이 닫혀있었다. 다시 살펴보니 내부에도 정돈되지 못한 폐자재들만 쌓여 있는 듯하다. 먼지가 뽀얀 쇼윈도 중간에 '임대중' 문구가 풀칠되어 있었다. 할 수 없이 멋스러움이 덜한 근처의 흔한 지하철 출구 앞 카페에 앉아 몇 없던 나의 단골집들을 구글로 검색해봤는데, 절반 정도가 더 이상 찾을 수 없거나 영업 종료로 확인된다. 예기치 못한 역병의 시간은 소중한 장소를 예상보다 빨리 소멸시켰다. 자그마한 위안이 되었던 공간들을 다시 만날 수 없다니 아쉬웠다.

헛헛한 기분을 안고 진한 더블 에스프레소를 홀짝거리며 마음을 가다듬어본다.


‘지금의 파리는 익숙함의 범위에 벗어났으니 조금 더 파스텔톤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처음 도착한 때처럼 새로운 아지트를 찾아야겠다.’


언제 맘이 바뀔지 모를 애증의 파리를 다시 여행할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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