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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립소 Nov 02. 2021

변화가 지나간 자리

로리앙Lorient을 걸으며

매년 휴가 때마다 자동차 렌트비용은 숙박비에 이어 가장 큰 예산을 들이고 있다.  우리 커플에게도 오래된 자동차(1991년 산 푸조 106 모델) 하나 갖고 있고 여전히 유용하게 사용하긴 하지만 연식이 연식이다 보니 장거리 여행에는 무리이긴 하다. 차에게도 못할 일이지만 130km까지 달릴 수 있는 프랑스 고속도로를 삼십 년을 버텨온 녀석과 함께 달리다 보면, 어쩔수 없는 세월의 흔적에 느슨해진 이곳저곳 작은 틈 사이로 들어오는 소음이 괭장하기때문이다. 차뿐만아니라 우리도 지쳐버리기 때문에 몇 년 전부터 장거리 이동이 있을 때마다 렌터카를 이용한다. 예약 당시에는 그나마 저렴한 폭스바겐 폴로 모델로 지정했는데 막상 렌터카 사무실에서 내어준 자동차는 2021년 신상 푸조 206 차량이었다. 우리의 106의 오늘날 버전 정도 되는데 로리앙까지 향하는 한 시간 동안의 고속도로 주행 구간 동안 어느 가족의 부모와 자녀를 얘기하듯 두 모델을 비교해가며 테크놀로지의 변화를 몸소 실감했다. 특히 길가의 표지판들을 내장된 카메라로 읽고 자동으로 속도제한을 걸어두는 기능은 꽤 유용했다. 구식 자동차 페달링에 익숙한 S라 자칫 과속할 위험이 있었는데 제한 속도 설정 기능 덕분에 걱정을 덜 어둔 채 액셀을  밟을 수 있었다. 목적지를 불과 몇 분 남겨두고 마지막 고속도로의 스피드를 즐기고 있던 순간, 우리의 눈앞으로 누군가 굵은 새하얀 글씨로 써놓은 한 문장이 잔상으로 남아버렸다.


'대기오염= 매년 48 000명의 죽음'


고속도로를 횡단하는 다리에 어느 환경주의자가 위험을 무릅쓰며 강렬히 알파벳 하나하나 힘을 담아 붓질해낸 경고문. 고속도로를 달리는 운전자들에게 향한 메시지이다. 저렇게 많은 사람이 대기오염 때문에 사망한다는 게 진실일까라는 가벼운 의심으로 시작해 괜한 불편한 마음까지 들었다. 둘만의 여정에 차 한 대를 빌리는 건 과한 건가? 하지만 공공 교통수단은 작은 마을까지 뻗어있지 못한 걸. 모처럼만의 휴가인데 둘러볼 수 있는 곳이 제한적이라면 억울하지 않나. 우리가 굴린 차 한 대로 배출한 대기오염은 안타깝지만 나름대로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잖아. 비록 어제까지 환경 보호구역을 걸으며 자연의 경이로움에 오감을 모두 열어버렸는데, 하룻밤 새 나는 직접 질책받지 않은 질문 속으로 변명들을 자꾸 되뇌인다. 어떤 통계를 바탕으로 쓰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의 경고문은 성공한 셈이다. 몇 초 동안 그 문장 아래를 지나는 내게 작은 죄책감은 갖게 했으니 말이다.

기술의 도움을 받아도 인간과 협업하는 데에는 가끔 불협화음도 발생한다. 로리앙 시내로 향하는 길에 GPS가 안내한 삼거리가 애매한 각도라 길을 잘못 들고 말았다. 알 수 없는 항만 길로 진입하게 돼버렸는데 대낮인데도 드넓은 도로에 돌아다니는 차라고는 우리뿐이었다. 토요일 도시 외곽의 산업지대가 이토록 황량할 줄이야. 덤불 더미가 모래바람에 굴러다니는 쓸쓸한 사막을 담아낸 미국 서부영화의 한 장면처럼 빈 시멘트 도로 위로 비닐뭉치들이 춤을 춘다. 몇 분을 항만 길에서 헤매다 잠시 차를 멈추어 세운 뒤, 시내와 가까운 주차장을 목적지로 설정하고 안내해주는 대로 따랐다. 어느 구간에서 좌회전을 했는데 이내 번화한 시내 길이 눈앞에 펼쳐지는 게  호그와트행 마법 기차를 탄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길목 하나 차이로 분위기가 달라지는 놀라움은 파리나 여기나 마찬가지다.


주차장 입구 표지판을 따라 야트막한 언덕길을 오르자 첨탑을 여러 개 모아 만든 아치형 출입구가 나타났다. 승용차 두대가 무리 없이 지날 수 있는 커다란 첨탑 문을 지나자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정원이 자동차 앞유리를 통해 펼쳐진다. 주차 후 지상으로 올라와 보니 입구에서 미처 만나지 못한 전형적인 옛 근세 프랑스식 건물 두 채가 정원과 함께 보존되어 있었다. 이름은 호텔 가브리엘. 17세기 인도 종신 은행사의 의뢰로 건축가 가브리엘이 만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안내표지판을 간단히 훑어본 탓에 이 건물의 당시 용도를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지금은 시민공원으로 변한 이곳은 당시 대사업가의 개인 사유지를 위해 가꿔진 곳이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도시의 옛 건축물이라 지금까지도 소중하게 관리되고 있다.


가브리엘 정원을 뒤로하고 시내 중심으로 향하는 길목 정면에는 다른 형태의 콘크리트 고층 시테 아파트 두동이 떡 하니 버티고 있다. 삭막하기 그지없는 마천루. 전쟁 이후 회복이 최우선이었던 도시에게 풍광까지 고려해야 할 선택권은 없었으리라 여기고 도시를 이해해야 한다. 대항해시대의 프랑스 동인도 회사 조선소 부서가 위치했던 이래 지금까지 해군 조선소와 어업으로 브르타뉴 경제를 담당하고 있어 로리앙은 모르비앙 주의 주요 도시지만 이 지역 관광에서는 여전히 배제되고 있는 곳이다. 아무래도 군사기지가 주는 이미지는 다른 항구 도시와는 다른 위압감을 안겨주기도 하고 2차 세계대전 때 도심의 대부분이 소실되어 프랑스가 맞나 싶을 정도로 벨 에포크의 정취는 조금도 느낄 수가 없다, 시청, 경찰청, 대성당 등의 주요 건축물들은 종전 후 재건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시대의 실용성에 입각한 건축양식 때문인지, 일괄적인 네모 반듯한 건물들과 이 지역의 건축 주재료였던 회갈색 화강암은 더 침울한 이미지를 안겨 주었다. 비록 아기자기한 맛은 없어도 어려움을 극복하고 재생하는 도시의 이미지로 스토리텔링 하며 매년 켈트 음악 페스티벌 같은 대형 행사 등을 개최하며 인근 여러 명소에 뒤처지지 않으려 끊임없이 노력 중이다.


두 시테섬을 잇는 다리를 건너면 작은 광장이 펼쳐진다. 아직 어린 마로니에는 푸른 녹음을 뽐내며 광장의 여러 음식점 노천 테이블에 그늘막을 지어준다. 스퀘어에 모인 여러 식당 중 브르타뉴 전통 색인 검은 간판과 해석할 수 없는 옛 브르타뉴어로 이름 지어 지역색을 마구 풍기는 ‘타르반 아르 루에 모르반’이라는 음식점을 선택하여 자리 잡았다. 요일마다 오늘의 메뉴를 정해놓고 판매하고 있었지만 토요일 메뉴로 제안하는 참치 스테이크와 돼지고기 절임은 어쩐지 별로 와닿지 않았다. 지역 향토음식을 먹어야지 생각하고 홈메이드 엉두이에트를 주문했다. 곧이어 접시를 꽉 채운 감자 퓌레 위에 엉두이에트가 얇게 편 썰어져 올려져 서빙되었는데, 테이블에 채 내려놓지 않아도 특유의 냄새로 돼지 부속물의 존재감을 풍긴다.


돼지 창자를 촘촘히 여러 겹 둘러 소시지처럼 만들어낸 순대 같은 식재료인데 누군가는 음식에서 썩은 냄새가 나는 건 처음이라며 악평을 하기도 했다. 희한하게 난 이 꼬릿한 누린내에 거부감이 없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음식에 대한 경험치가 늘어날 때마다 이런 것 까지 먹다니 하며 놀랄 때가 있다. 분식점에서 파는 순대조차도 돼지 냄새난다며 뱉어냈던 유년기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한데 말이다. 당연히 어린이의 예민한 혀와 지금의 둔해진 미각이 같을 순 없겠지만 입안으로 허용하는 새로운 경계가 늘어갈 때마다 얼떨떨한 기분이다. 특히 엉두이에트는 현지인들에게도 호불호가 강력해 동양 여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주문하여 시켜먹는 모습을 보면 이들도 놀라긴 한다. 하지만 암만 입맛에 맞는다고 한없이 먹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가공식품 특유의 후추와 소금간이 센 편이라 몇 조각 먹다 보면 혀가 얼얼해 지기 때문이다. 조그마한 조각을 반으로 썰어먹다가 미세한 미각의 마비가 올 때쯤 부드러운 감자 퓌레로 희석시키니 순식간에 한 접시가 사라져 버렸다.


 괜찮은 점심이었다고 만족하며 음식점을 나와 포트 반대편으로  걸었다, 흠잡을  없이 새파란 하늘에 다른 해변 도시들과 다를  없이 가지런히 정박된 개인 요트들과 작은 어선들의 모습. 하지만 자꾸 천편일률적인 콘크리트 건물에 시야가 압도되는 도시 경관은 못내 안타깝다. 갱생도시의 아픔에 자꾸 아쉬움만 덧붙히니 미안할 지경이다. 뭔가 짠한 마음이 미련처럼 남은 로리앙 시내의 꽃집에서 부케  다발을 사고 초대받은 친구 E 집으로 발길을 서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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