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박 3일의 지리산 - 1
한국행을 얘기하던 올봄부터, 산행을 좋아하는 파트너는 반드시 지리산은 여행하겠다고 공표했다. 나 역시 스무 살 이후 한 번도 가본 적 없어 흔쾌히 수락했고 우리의 한국 행 방문 목록에 지리산을 크게 적어뒀다. 비록 내가 원한 등반 시점은 무더운 여름의 한가운데는 아니었지만... 별 수 있나. 8월 아니면 휴가를 낼 수 없는 파트너 덕에 어쩔 수 없이 여름의 산을 올라보는 거지. 소백산맥의 최고봉인만큼 암만 한여름 이래도 시원한 구석은 있지 않을까. 어차피 한 여름에 떠나는 산행. 더위는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오랜 친구들과 주기적으로 수다 떠는 카톡 단톡방에 우리의 한국행 계획을 안부 전달 차 얘기했다. 친구 S는 올해 광복절이 월요일이라 주말 포함 3일의 연휴가 생기니 지리산행 만큼은 친구들과 함께하자며 제안했고 그렇게 그녀의 주도 아래 일사천리로 여행은 정해졌다.
하지만 우리의 연휴를 앞두고 폭우를 동반한 악천후가 계속되었고 뉴스에서는 홍수 피해를 연일 보도했다. 당시 수도권 지역의 폭우 피해가 심각했는데 점점 비구름이 내려와 우리의 여행 지역인 중부지방까지 폭우 주의보로 묶여버렸다. 웬만하면 '취소할까'라는 제안이 나올 법 한 상황이었는데 너무도 오랜만에 한국 방문하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우리 모두에게 간절한 여행이었는지 누구 하나 접자는 언급은 없었다. 그저 출발 전야까지 모두가 단톡방에서 일기예보를 공유하며 날이 개기만을 빌고 또 빌었을 뿐이다. 주선자 S는 희망을 버리지 말고, 날씨 받쳐주면 조금은 걸을 거니 편한 복장 챙겨 오라는 당부를 마지막으로 자정까지 우리의 채팅은 계속되었다.
8월 13일 아침, 예정보다 일찍 수원역에 도착해 남원행 열차를 떨리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남은 시간 동안 커피를 한잔 사 마시고 화장실도 들르며 출발 채비를 했다. 검은색과 붉은색으로 배색되어 날렵해 보이는 열차가 플랫폼에 들어왔다. 내 기억 속의 새마을 차는 온 데 간데 없이 ITX라는 영어 이니셜 이름을 앞에 달고 무척 세련되었다. 지정된 열차 호수와 좌석을 찾고, 서울서 부터 먼저 타고 내려와 내 좌석 앞에 나란히 앉아 있는 S와 Y를 마주하고는 반가워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서로 손 잡고 흔들어댔다. S와 Y는 용산역, 우리(나와 파트너)는 수원역. 서로 다른 역에서 탑승했지만 같은 열차 앞뒤 좌석으로 예약한 건 이미 한 달 전부터 서로 상의해 구매했던 것인데, 막상 친구들을 얼굴을 보자 십 대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S는 길던 머리를 삭둑 잘라 변모한 새마을호처럼 도회적인 느낌을 풍겼고 Y는 까맣던 예전 머리색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밝은 밤색으로 염색해 깜찍해졌다. 남원역에서 직접 운전하여 합류한 A까지 만나고는 그제야 맘껏 떠들 수 있었다. 못 본 시간 동안 또 한 단계 야무져진 서로의 분위기에 왠지 모르게 뭉클했다. 매번 한국에 오면 이 멤버 이대로 최소 1박이라도 나서는 여행이 어찌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말로 때우지 않고 번거로이 맘 써주는 마음씨들도 그렇지만, 친구들의 여렸던 윤곽들이 단단해져 가는 모습을 오랜 기간 두고 보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 싶어 고마웠다. 나도 너희들도 눈가의 주름도 늘고 피부톤도 달라졌지만 지금도 처음 본 그때처럼 까르르 웃는 친구들을 보다 괜히 눈물이 찔끔 날 뻔했다.
한 여름의 고국의 풍경은 첩첩이 둘러싼 산들이 다했다. 높지 않은 언덕이라도 또 병풍같이 이어지는 산맥들. 틈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푸른 나무들이 빽빽한 정경. 막상 나고 자라고 생활하던 시절에 무심했던 장면들인데 떠나고 보니 제일 그리운 풍경이 돼버렸다. 차창 밖으로 흐르는 초록의 산맥 하나라도 놓일세라 아파트가 흩트려놓은 누군가의 동네 뒷산 봉우리들도 소중히 바라봤다. 한눈을 팔았다간 차창은 금세 또 다른 그림으로 바뀌어버리니 말이다.
등구재 민박집의 충격의 표고버섯 전
도착하자마자 예약해 둔 식당으로 향했다. 같은 남원시에 있는 식당이지만 길도 막히지 않는 지역에서 거의 한 시간을 달려야 도달할 수 있는 곳이었다. 능선을 따라 구불구불 오르락내리락 차 한 대 겨우 지날만한 비포장 도로를 따라가는 길은 깊은 고래의 숨구멍이라도 들어가는 듯 문명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것만 같다. 그렇게 달려 지대 단차가 있는 한 건물에 도착. 소박한 사과밭을 사이에 두고 주차를 하고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점심때가 지나 내부 손님이라고는 우리 일행뿐이었다. 서빙 보는 처자가 주방에 대고 "엄마아, 할머니이.. "하고 부르는 걸 보면 가족끼리 어울러 운영하는 듯했다. 한시 반에 예약했다 하니 엄마로 추정되는 주인장 아주머니가 주방서 나와 멀리 사는 조카가 오랜만에 방문한 것 마냥 분주하게 자리를 안내해주었다. 그녀가 가리킨 테라스 좌석에 앉자마자 우리 모두 반사적으로 함성을 터트렸다. 출렁이는 지리산 산맥에 둘러싸인 건넛마을 풍경은 꿈인가 싶을 정도로, 한눈에 담을 수 없는 드넓은 파노라마로 펼쳐져 있었다. 내리지 못한 비가 구름이 되어 봉우리를 자꾸 가렸지만 켜켜이 이어지는 골짜기까지는 뒤덮지 못하였다. 시릴 정도로 푸른 산세에 걸친 수증기들도 덩달아 푸르스름이 신기루처럼 일렁인다.
‘신선놀음이라는 게 이런 것일까, 비현실적이다’, 등등,. 풍경은 우리에게 수다거리를 던져주었다. 테이블에 앉아 한바탕 왁자지껄 까르르하는 사이 음식이 재빠르게 준비되었다. 산나물과 각종 장아찌. 다섯 종류의 김치가 한상으로 차려지고 표고버섯 전은 추가로 주문했다. 산에서 채취해 손맛으로 조물거린 나물류야 맛없으면 이상할 일이고, 맛있다를 넘어 이것은 혁명이다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건 표고버섯 전이였다. 버섯 안에 고기나 야채로 만든 소 없이 그저 버섯 통째로 부침 옷 입혀 지져낸 심플한 요리다. 한 입 베어 물면 바삭함과 버섯의 부드러운 식감으로 먼저 놀라고 입안에서는 버섯에서 뿜어져 나오는 풍미에 놀란다. 온갖 자극적인 맛에도 반응하지 않던 미각 세포가 오소소 일어났다. 음식을 만드는 실력도 중요하지만 좋은 원재료가 바탕이 되어야 진정한 맛이 난다는 당연한 사실을 이 표고버섯전이 새삼 일깨워주었다. 모두가 눈이 동그래지며 감탄을 했고, 홀린 듯 ‘한 접시 더’를 외쳤다.
지리산 흑돼지 삼겹살도 빠질 수 없다. 예약을 받으면 아궁이에 불을 집혀 무쇠솥뚜껑에 구워낸다고 한다. 비겟기름과 함께 노릇하게 익은 두툼한 삼겹살을 한입 크기로 자른 다음 묵은 김치, 짠지들과 곁들여 먹는다. 쫄깃한 고기와 짭조름한 맛이 어우러져 다른 생각은 할 수 없게 만든다.
(맛있다를 넘어선) 경탄의 식사를 마치고 소화도 시킬 겸 도보 30분 거리의 함양군 카페로 향했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도보로 넘는다 생각하면 흥미롭기도 했지만 식당이 워낙 남원시의 경계였다. 행정상 전라북도 남원에 있는 등구재 민박집 사장님들도 진한 경상도 사투리를 썼다.
산길을 따라 카페까지 가는 길도 얼마나 오르락내리락했는지 모르겠다. 그다지 험준한 코스는 아니지만 공기에 떠도는 부연 습기들이 몸에 찰싹찰싹 달라붙어 쉽게 지치게 만들었다. 몸에 주르륵 흐르는 것이 정말 땀이 맞는지 모를 정도로 공기 중 습도는 거의 백 퍼센트에 다다랐다. 쏟아질 비구름은 잔뜩 하늘을 막아 바람도 쉬이 내주지 않는다. ‘나는 지금 습식 사우나를 즐기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편이 나았다. 어디 그뿐인가. 녀석들은 얇은 내 머리카락에도 눌러앉아 아침 내 드라이질로 애써 감춰 둔 곱슬끼를 되돌려 부스스하게 부풀게 만들어줬다. 산책길 내내 벌건 얼굴과 한없이 꼬부라진 머리털에 흉한 꼴에 이르렀지만 못난 모습도 추억이라 사진으로 여러 장 찍어 남겼다.
몸이 버틸 수 있는 만큼 느긋하게, 빽빽한 초록의 풍경도 둘러보며 한 시간쯤 걸었을까. 찰랑찰랑 풍경소리에 이끌려 시선을 돌리니 카페였다. 하얀 오두막의 카페는 여름 나무와 우거진 풀들의 담장과 어우러져 이름처럼 ‘안녕’하며 사람들을 반긴다. 정원 좌석에 자리를 잡고 과일청으로 만든 시원한 음료들을 주문했다. 모과차, 청귤차, 오미자차... 무엇 하나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달고 시원했다. 빨대를 물고 양볼에 힘을 모아 쭉 들이키자, 뜨거운 김에 쪄진 몸 구석구석까지 차가운 단물이 쫘악 퍼졌다. 손끝 발끝까지 쭈뼛거렸다. 뭐가 됐든 고생 후에 먹는 게 가장 맛있다. 그리고 얼마 있다 하늘이 무너질 정도로 시원한 소나기가 쏟아졌다. 카페 지붕 아래서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니 벌게진 얼굴도 슬슬 식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