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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립소 Sep 28. 2022

구름 속을 걷다

2박 3일의 지리산 - 2


'구름 속을 걷다', 성삼재 휴게소


 점심을 먹고 너무나 한가히 드라이브를 즐긴 모양이다. 구불구불한 노고단 도로를 오르는데 자꾸 천은사에서 전화가 울려댄다.

" 방사 담당하는 총무팀이 다섯 시에 퇴근해요. 아무리 늦어도 네시 반까지는 와주셔야 합니다. "

오후 세시가 가까 온 시간. 성삼재 휴게소까지 차로 이동 한 뒤 노고단 정상까지 오르려던 계획이 무색해져 버렸다. 천은사와 성삼재 까지도 크게 멀지 않아 먼저 입소해도 될 듯 하지만, 단순한 숙소의 체크인과는 달리 템플 스테이는 사찰을 돌며 안내받기에 한 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게다가 저녁 공양은 오후 다섯 시 반에 시작되니 그렇게 먼저 천은사에 짐을 풀고 다시 성삼재를 찾기에 시간이 애매해져 버린다. 그리고 우리는 성삼재 휴게소까지 도착 5분을 남겨두고 있었다. 천은사의 전화를 받은 S는 마음이 급해졌다. 한 차 안에 우리 모두 안절부절못하며 주차장에 들어서자마자 분주히 시선을 움직이며 주차자리를 찾았다. 마음과는 달리 황금연휴의 토요일이라 인산인해인 명소에서 빈자리는 쉽사리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도 만차가 되었다면 입차도 되지 않았을 테다. 주차요원의 수신호를 따라 차분히 움직이니 마법같이 자리 하나가 툭 떠올랐다.


" 우선 올라가고 시간 봐서 중간에 끊고 내려오자."

구름같이 인파가 몰려있는 전망대는 산보 후 구경하는 것으로 하고, 탐방길 안내 표지판을 따라 노고단 방향으로 올랐다. 워낙 넓고 깔끔히 포장된 탐방길이라 산을 탄다는 느낌보다는 잘 닦인 공원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경사도 가파르지 않아 심지어 가족 단위로 산책 나온 무리 중에는 조리를 신고 오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저질 체력인 나조차도 ‘엇, 노고단 오를 만 한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오만함도 잠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정돈된 큰길이라 내 눈이 착각한 것일 뿐. 산길은 산길이다. 나도 모르게 발산해 버린 에너지는 20여분 만에 숨이 가파지는 것으로 기어이 테를 내고 말았다. 몸을 휘감는 습기와 땀이 뒤범벅되어 축축 늘어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시야가 뿌연 해 지기 시작했다. 눈앞에 펼쳐진 안개 자욱한 지리산 능선은 자꾸 출렁거리며 몽롱해졌다.

 길을 앞선 친구들이 어서 와보라며 재촉해 가보았더니 수풀들이 우거진 바위틈 사이에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에 안개까지 어우러져 꼭 전래동화 속 산신령이 나옴직한 분위기를 풍겨왔다. 발을 담그고 얼굴에 찬물을 촤악촤악 뿌려댔더니 몽롱한 기운이 조금씩 깨어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한 발치 자리를 옮겨 돌계단 사이 바람골에 들어서고는 깨달았다. ‘아, 나는 지금 구름 속에 있구나.’ 해발 1300m도 되지 않는 높이였지만 비가 되지 못한 수증기들이 먹구름으로 산 중턱에 낮게 깔려있었고, 우린 그 사이를 횡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쉽게 불지 않아 소중한 한줄기 바람이 불어 오르며 젖은 얼굴을 시원하게 들이치자 훅하고 정신이 들었다.  


 물기가 마를 때까지 잠시 휴식을 갖고 천천히 조금 더 산행을 계속한 뒤, 정상까지 절반 정도 남은 대피소 갈림길에서 발길을 돌렸다. S가 애써 노고단 입장 예약까지 해두었는데 막상 돌아가려니 아쉬웠다. 하지만 난 내 체력의 능력치를 잘 알고 있다. 시간 여유가 있었다 해도 노고단까지 올랐다면 더 완고한 괴로움을 맛봤을 거라고... 냉수마찰에 잠깐 살만하니 더 오를 수 있다는 착각이 절로 난다.   



   


'깨져버린 향불의 그윽함', 천은사


 화엄사에서 갈라져 나와 이 지역 산사의 조연 자리를 면치 못할지라도 지리산이라는 명산의 3대 사찰 중 하나라니 얼마나 명찰일까. 도착하기 전부터 기대가 컸다. 나와 살다 보니 쉽사리 만날 수 없는, 단아하고 정결한 산사들이 그리워졌는데 거기다 하룻밤 묵어가기까지 한다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 천은사는 소백산맥에서도 남서쪽 아래, 그 사이로 드넓은 저수지를 품은 듯 자리 잡고 있었다. 위치로서는 제대로 배산임수의 정석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번도 경험이 없는 템플 스테이를 오히려 프랑스인인 파트너가 2014년도에 먼저 경험했다. 골굴사라는 경주 어디껜가 붙어있는 절에 어느 프랑스인이 수행한다고 하여 한국 여행 패키지에 포함되어 있어 게 되었, 그의 개인적 견해지만  흉내만  가건물에 숙박하며 선무도 체험한답시고 원치 않는 억지 체험을 강요했다고 한다. 사이비스러운 (언제까지나 그의 개인적 견해) 템플 스테이 기억만 있던 그에게 천은사는 진정한 우리 산사의 명찰을 보여줄  있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했다. 종종 산사에서 휴식을 즐기는 S 설명에 따르면 템플 스테이라고 예불 등의 사찰 일정대로 움직일 필요가 없다고 한다. 휴식형, 체험형으로 나뉘어 호젓한 장소 안에서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묵어갈  있다는 것이다. 제공하는 공양 역시 의무 사항은 아니라지만, 나는 나물이 어우러질 채식의 절정 격인 절밥은  먹어보고 싶었다.

 주차장에서부터 입소를 담당하는 사무실까지 무더위 속에 여행 봇짐을 끌고 가는 게 고되었었다. 하지만 더 괴로웠던 건 따로 있었으니 우리가 머무르게 될 선방 앞 굴착기 소음이었다. 입소 안내자 말에 따르면 오후 다섯 시면 끝나니 염려치 말라 당부했다. 그의 말처럼 저녁 공양을 마치고 돌아오니 공사는 멈춰 있었지만 다음날 아침 일곱 시부터 지축을 흔드는 우렁찬 소음을 내기 시작했다. 소음을 피해 뜰로 나와 보제루에 앉아도 보고 언덕배기 관음전과 삼성전으로 도망도 가보았는데 흔들리는 골을 막을 길이 없었다. 무상무념의 도량을 즐기고자 했던 바람이 땅에 때려 박는 쇳축과 함께 깨부수어졌다. S가 예약할 때 ‘ 작은 공사가 있을 예정이라 양해를 부탁드린다’며 문자를 받았다는데, 이건 양해 수준을 넘어섰고 예약을 아예 받지 말았어야 한다며 한탄했다. 사찰도 별 수 없이 황금연휴의 예약을 포기할 수 없을 정도로 수익사업에 매진하고 있나 싶었다. 도량답지 않은 속세의 욕망이 드러난 것 같이 씁쓸했다. 전날 둘러보지 못한 당우에 들러 탱화들을 감상하며 여유롭게 떠나고자 했지만 부랴부랴 짐 정리하여 도망치듯 나섰다.

굴착기와 함께하는 산사체험의 씁쓸함

 사찰을 휘감은 계곡 위에 얹힌 수려한 비율의 수홍루, 대웅전과 마주한 보제루에 앉아 사방으로 열린 창문 사이로 분 맞바람으로 식혀낸 더위, 천은 저수지에서 바라본 섬진강 줄기와 어우러진 산천 절경들이 아침 고 몇 시간 동안 흔들린 굴착기 괭음으로 새겨져 버렸다.



'여린 여름 녹차의 향', 하동 정금 차밭


 천은사에서 나서자 우리의 다음 여정을 밝히기라도 하는 듯 햇볕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생각지도 못한 아침 시간이 생긴 우리는 하동에서 녹차체험을 하기로 한다. 이 역시 재빠른 S의 대처였으니 여행 플래닝엔 그녀를 따라 올 자가 없다. 그렇게 S가 찾아 둔 도심다원을 향해 가는 길에 우리 일행은 우연히 정금 차밭을 만났다. (어쩌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예상컨대 조수석에 앉아 있던 S가 내비게이션에서 정금정을 발견하고는 운전하는 A에게 그 방면으로 가보자고 했을 것 같다. 야무진 S의 동선엔 언제나 사소하게라도 계획이 있으니까.)

 산기슭을 따라 조성된 계단식 차밭은 한 여름 산나무의 진한 초록과는 달리, 엷게 코팅된 연둣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차밭을 굽어보듯 언덕배기 정상에 솟아 있는 정자에 오르니, 감히 천상의 끝자락이라 말할 수 있을만한 경관이 어딜 바라봐도 막힌 곳 없이 사방으로 펼쳐진다. 이곳이 정말 인상 깊어 ‘하동 정금리’ 검색어로 나중에 찾아봤는데 ‘정금 차밭은 하동군이 자랑하는 다원 10경 중에서도 풍경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이라며 한국 관광공사 사이트에서 소개하고 있었다. 정자 위에서 아무 생각 없이 능선과 어우러진 다원을 바라보며 골짜기 사이사이를 훑고 불어오는 바람만 쐬어도 황홀했다. 머무르는 한 시간여 동안 인적마저 없어 인이 박힌 줄만 알았던 굴삭기의 골 울리던 소음도 머릿속에서 스르르 사라져 버렸다.

 정금 차밭에서 비경은 즐길 만큼 즐긴 후 도심다원에 이르렀기에 차밭을 감상하는 평상 좌석까지 욕심 내지 않게 되었다. (도심다원에도 언덕배기에 정자 좌석이 있는데, 이 좌석은 별도로 예약해야 한다고 한다.) 다원에서 제안하는 우전, 홍차 구성으로 된 다례 체험 메뉴를 주문하고 실내에 자리 잡았다. 정오가 가까운 시간이라 햇살이 점점 뜨거워져 따뜻한 차를 즐기기에 무리 일성 싶었는데, 차라리 실내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고마웠다. 주인장의 녹차 정보와 차를 즐기는 방법을 간단히 듣고 첫 잔을 우려 마셨다. 겨울 내 추위를 버티고 빼꼼히 이파리를 내놓았을 여린 잎들은 봄을 채 알지도 못한 채 수확되어 제 가냘픈 향을 뜨거운 물에 흩트렸다. 부드럽다 못해 연약한 우전 향이 목을 넘어가자 괜스레 마음이 저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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