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다르 Île d’Arz 를 걸으며
모르비앙만의 모든 명소를 돌아보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지 않았다. 체력이 더 받쳐줬더라면 꼭두새벽부터 해가지는 시간까지 쉬지 않고 돌아볼 수 있었겠지만 마음 같지 않게 하루의 이만 보정도를 넘기면 고단함이 밀려왔다. 육체적 능력과 시간의 제한 조건에서 더 나은 곳을 추려 목적지를 선택하는 일은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우선 지도에 이름조차 없는 초소형 섬은 제외했고, 배편이 조금 더 잦은 곳을 찾다 보니 일 다르 Île d’Arz로 목표가 좁혀졌다. 아침 아홉 시부터 오후 여섯 시까지 두 시간에 한 대씩 (어떤 시간대에는 한 시간에 한대) 작은 섬 치고는 의외로 촘촘하게 짜인 정기운항선과 3km를 웃도는 면적으로 봤을 때 섬 도보 완주도 할 수 있겠다 싶었다.
벨 일행 화려한 페리와는 몸집도 생김새도 다른 하얀 여객선은 뭍에 정차하는 내내 텁텁한 경유 냄새를 풍기며 존재감을 알렸다. 별 긴장감 없이 느긋하게 탑승했더니 순식간에 사람들이 꽉 차 버렸다. 얼핏 세어보니 배는 서른 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듯했다. 실내석에 자리잡지 못해 뱃머리 바닥에 철퍼덕 앉아 섬으로 가는 내내 부슬비가 내렸다. 사실 하늘에 가득한 먹구름이 탓에 비일 것이라 생각했을 뿐 뱃머리 속도와 마찰력에 튀는 바닷물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30분을 선선한 바닷바람과 짠내를 풍기는 미스트를 맞으며 일 다르에 도착했다. 선착장 입구에는 두 자전거 대여소 직원들이 나란히 서서 방문객들을 가장 먼저 맞이해주었다. 섬 입구에서 마주한 그들을 보며 속으로 ‘이 작은 섬에 자전거가 무슨 필요인가’ 라며 지나친 순간을 두고두고 후회한다. 미리 밝히지만 나는 이 작은 섬 조차도 완주하지 못했다. 후일은 모른 채 새로운 여행지에 도달했다는 설렘만 안고 자전거를 빌려 타려는 무리를 지나 중심 부락까지 힘차게 걸어갔다. 걷는 내내 먹구름이 가시지 않길래 아침에 확인한 일기예보와는 달리 오늘 날씨는 왠지 하루 종일 구름과 함께 우중충할 것 같았다. 아침에 급히 챙겨 나온 방수 점퍼의 지퍼를 바짝 올리고 가져오길 잘했다 싶었다.
여정의 시작을 앞서 에너지 보충 차 점심 먼저 해결하기로 했다. 부락의 음식점은 단 세 곳. 동네의 중심 그랑뤼Grand Rue 에 몰려있다. 이름은 '큰길'이지만 승용차 한 대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시멘트 도로이다. 이곳을 동네에서 가장 큰길이라 여기고 작명한 옛 섬주민들을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중 한 곳은 문이 닫혔고 그나마 크레프집이 구글 평점이 셋 중 제일 나았지만, 이미 도착한 날 맛있는 갈레트를 먹어서 또다시 먹고 싶지 않았다. 남아있는 나머지 한 음식점, 펍을 겸한 브라스리에 자리 잡았다. 선착장에서 자전거 렌탈객을 맞이했던 자전거 대여소 남자가 어느새 그곳 일을 마치고 순간 이동하여 서빙을 보고 있었다. 섬 생활인으로서 그의 이동능력은 재빠를지 몰라도, 테이블을 오고 가며 주문받고 서빙하는 속도는 꽤 느긋했다. 바에서 동료와 수다를 떨거나 테이블에 자리 잡은 손님들하고도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런 사람이 우리한테는 오늘의 요리는 참치 찜과 대구찜이라는 간단한 응대만 하길래 혹시 인종 차별하나 살짝 의심을 했다. 크게 고민할 것도 없는 그의 메뉴 설명에 오늘의 요리 하나씩 시켰다. 테이블에 놓인 물컵 군데군데 기름 얼룩이 묻어 있었지만 한가로이 일하는 그에게 시정을 요청했다가는 다 먹고 나서야 교체해줄게 뻔했다. 조심히 옆 테이블의 내 것보다 조금 더 깨끗해 보이는 빈 물컵과 바꿔치기하는 찰나 식사가 그의 손에 들려져 나왔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접시 위에 생선, 감자튀김, 삶은 줄콩, 샐러드로 구성된 딱 ‘난 12유로의 식사야’라고 말하는 듯한 평범한 구성이었다. 특별할 것 없는 식사를 마칠 무렵 오전 내내 그득했던 먹구름이 순식간에 사라지더니 갑자기 뜨거운 햇살이 비추었다.
계산을 하고 음식점을 나서자, 햇볕의 강도가 점점 세진다. 언제 먹구름이 있었냐는 듯 완전히 다른 날씨로 바뀌었다. 조그마한 인도를 따라 부락을 나서자 집들도, 키 큰 나무도 없는 탓에 뜨거운 들판만 계속되었다. 턱 아래까지 여며 입은 방수 점퍼는 훌렁 벗어 재끼고 소매를 허리에 둘러 꽉 동여매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고 이글거리는 태양이 야속했고 잘 챙겼다 싶은 점퍼도 짐이 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삼십 분쯤 걸었을 즈음 만난 해변가의 소나무 숲이 어찌나 고맙던지. 마침 마련되어 있는 벤치에 앉아 벌컥벌컥 물을 마시며 후끈 올라 온 열기를 달랬다.
해안가를 따라 절반 이상을 둘러봤지만 특별한 구경거리는 없었다. 빼어나게 아름다운 경관도, 역사적인 유물도 없다시피 했다. 선돌 지대라고 지도에 표시된 몇 구간이 있었는데 누런 이끼 자국이 화석처럼 남은 무릎만 한 화강암들이 불규칙하게 흩어져 있었을 뿐이었다. 그나마 일 다르에서 인상 깊다고 할 수 있는 곳은 중세시대의 축성된 물레방아터였다. 방앗간 내부는 잠겨있어 실제 메커니즘을 구경할 수 없었지만 둑방 좌우로 바닷물 흐르는 소리와 함께 몇백 년의 노동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웠다. 15세기에 지어져 1910년까지 작동하였다고 하니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주민들을 위해 일 해왔는지 헤아리기 까마득하다. 바다를 마주한 지형이지만 야트막한 늪지가 이뤄진 덕분에 양옆으로 300m 정도 둑방을 지을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밀물과 썰물이 오고 가는 힘에 따라 거대한 태엽이 돌아가며 엄청난 곡식을 찧어냈겠지. 시대가 변해도 물레방아는 꿋꿋이 섬 주민들을 위해 작동되고 사람들도 소중히 유지해왔다. 작동이 멈춘 지금까지도 동네 사람들은 베르노Berno 물레방아 협회를 만들어 프랑스 물레방아 연맹(이런 단체도 있다니 놀랍다!)에 등재시켜 살뜰하게 지키고 있다. 특별한 풍광 하나 없는 작고 평범한 동네에 이 오랜 물레방아 마저 없었다면 나처럼 정기운항선만 믿고 발을 디딘 도보여행객들에게 얼마만큼의 실망을 안겼을까.
섬의 북동쪽에 갯벌로 연결된 또 다른 지역이 있었지만 이미 두 시간 넘게 뙤약볕에 시달린 탓에 나머지 30분을 더 걸어야 한다는 게 고역으로 느껴졌다. 반복해 말하듯 특별할 것 없는 작은 섬에서 쥐어준 관광 지도에도 나름 포인트 뷰라고 표시된 곳들도 뜨뜻미지근했기에 섬 반대편까지 걷고 또 선착장으로 돌아와야 하는 수고는 필요 없을 것만 같았다. 때마침 챙겨 온 물도 바닥이 나자 완주에 대한 의욕도 완벽히 사라졌다. 행여 이대로 돌아가기 뭔가 아쉬워 조금 더 걷는다 해도 탈진을 피하기 위해 물은 필수적이었다. 물을 사러 점심을 먹었던 부락 중심가로 향했는데, 웬걸 섬의 유일한 슈퍼마켓은 셔터가 내려져 있는 게 아닌가. 입구에 붙은 작은 안내문을 살펴보니 오후 16시부터 18시까지 단 두 시간만 오픈한다고 한다. 아무렴 조그마한 촌락이라 하더라도 일주일에 네 번 두 시간씩만 여는 슈퍼는 처음 마주해서 놀라웠다. 주민들은 갑자기 필요한 생필품이 생기면 어떻게 해결하지? 두 시간의 개장시간만 손꼽아 기다리는 걸까? 엄청난 힘이 내 몸을 쥐어짠다 해도 이미 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정도로 바싹 마르고 있는데 당장 물을 마실수 없으니 목마름은 완전한 고역이었다. 장엄히 닫힌 셔터가 어서 올라가기만 기다리며 가게 맞은편 돌담 바닥에 털석 주저앉은 채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슈퍼 입구 한편엔 벽을 꽉 채운 교실 칠판만 한 알림판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자질구레한 무료 나눔 광고들과 동네 행사들이 붙어 있었다. 비즈공예용품, 프린터 카트리지, 아직은 생생한 이불보와 방석, 실외 플라스틱 의자와 테이블 등등. 손으로 쓰거나 워드로 작성해 프린트한 크고 작은 광고들을 보며 이웃끼리 물건 나눔이 유효한 동네구나 싶었다. 이런 곳에서 갑자기 떨어진 밀가루나 설탕, 소금들을 구하는 것이 어려운 일일까.
온몸 구석구석 안 아픈 곳이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워하며 매일을 일해도 생각보다 빨리 찾아오는 월급날 때문에 버티는 내 생활이 문득 딱했다. 주말에 기분전환을 핑계로 찻잔 두 개, 멋진 구두 하나 쇼핑한 뒤 잠시 동안 행복에 젖어들고 또 하룻밤 지나 괴로움을 호소하는 삶. 퇴근길의 크고 작은 예쁜 부티끄들. 친구들 근황이나 볼까 하고 열어본 인스타그램은 친구들 사진 세 개에 하나꼴로 광고가 붙는다. 요망하게도 최근 내가 검색한 주제의 아이템이거나 좋아요를 눌렀던 이미지 위주로 밀려오는 광고들은 혼을 쏙 빼놓는다. 그렇다 보면 사야 할 것은 점점 늘어가고 꼭 필요한 것처럼 강박까지 생긴다. 모든 욕망의 물건을 다 쓸어 담을 수는 없지만 하나둘 들여온 물건들은 내 삶에서 얼마나 유용했는지 따져보면 별것 없는 듯하다. 물론 소중히 다루는 오랜 물건들도 있지만 자주 사용하지도 않을뿐더러 새 포장을 풀어볼 때처럼 희열이 남아있지도 않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소비의 기쁨이 뭐길래 매일 반복되는 고통과 맞바꾼 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가게 입구에 장바구니를 든 동네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어두운 슈퍼 실내에서 번쩍하고 형광등 불이 켜지더니 이내 촤르르 셔터가 열린다. 사람 좋아 보이는 중년의 주인아주머니가 인사하며 맞이한다. 매장에 들어서자마자 생수 진열대로 향해 커다란 물병 탄산수, 일반 물 한병 씩 집어 들고, 계산대 가는 길에 마주한 아이스크림 냉동고에 멈춰 섰다. 4개입 망고맛 소르베로 신중하게 골라 계산하고는 슈퍼를 나서자마자 S와 두 개씩 순식간에 해치웠다. 그날 아이스크림은 근래 먹어본 단 것 중 최고의 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