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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립소 Sep 27. 2021

낯선이들에게 받은 응원

벨일Belle Île en Mer 를 걸으며

이른 아침 알람을 맞춰 숙소를 나섰다. 벨일로 가기 위한 여덟 시 페리를 타기 위해서였다. 여행지를 브르타뉴로 결정한 가장 큰 목적 역시 벨일을 만나보는 것이었다. 얼마나 풍경이 훌륭하기에 이름마저 아름다운 섬 일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곳을 최소 이틀은 둘러봐야 한다고 말했지만 S는 이곳 말고도 모르비앙만에는 44개나 되는 섬이 있어 엄선하여 방문해도 일정이 촉박하다며 벨일에서는 하루 동안만 자전거 하이킹을 하자고 했다. 여러 블로그 글을 증명처럼 들이밀며 설득해 결국 그의 계획에 따랐다.


섬에 가까워지자 페리 선장은 의욕에 넘쳐 여행 가이드처럼 벨일에 대한 정보를 읊어대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프랑스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이라는 소개말이 귀에 꽂혔다. 하루 만에 둘러볼 우리의 계획이 어쩌면 불가능한 도전일 것 같은 예감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페리 승객들에 밀려 섬에 도착하자 허겁지겁 관광안내소부터 찾았다. 다행히 르 팔레Le Palais 선착장 정면에 방문을 환영한다는 듯 듬직히 서있었다. 차례를 기다려 만난 친절한 관광안내소 직원은 역시 버스투어 프로그램을 예약하지 않은 경우라면 자전거로 하루 동안 섬 전체를 구경하는 건 무리이고, 한 뷰포인트를 목표로 산책하는 것이 최선이라며 우리의 일주 계획을 확인 사살해주었다. 하지만 의기소침해야 하는 순간은 잠시. 그가 추천한 경로 섬의 북단 ‘폴렌 뷰포인트La Pointe des Poulaines’까지 향하기 위해 바로 소종Sauzon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잡아타야만 했다. 10분 뒤 떠나는 버스를 놓치면 다음 버스를 11시까지 기다리거나 13킬로를 걸어가는 수밖에 없단다. 관광안내소에서 버스정류장까지 거리는 멀지 않았지만 언덕배기인 탓에 재빨리 뛰어가기는 벅찼다. 세 시간을 버릴 수 없었기에 태고의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려 뛰어가 버스의 마지막 승객으로 아슬아슬하게 탑승했다.


만차의 버스에 몸을 싣자 운전기사의 핸들 방향 따라 몸도 대책 없이 좌우로 흔들린다. 메슥거리는 구불길을 20여 분 달려 소종 시내에 도착했다. 해안 능선을 따라 파스텔톤으로 옹기종기 모여진 건물들은 쨍한 햇살에 반사되어 눈이 부셨다. 번쩍이는 광경에 멀미끼가 금세 사라졌다. 새파란 바닷가에 정박된 작은 배들까지 어우러진 모습은 마치 모네의 화폭 같아 연신 셔터를 날렸다. 관광안내소에서 받아온 지도를 살펴보니 소종 시내에서도 폴렌 연안의 집까지는 6km의 도보 구간이다. 기왕 섬에 입성했으니 그곳을 둘러보고 시간이 남는다면 다른 곳도 둘러보고 싶은 욕심이 자꾸 밀려온다. 결국 누군가 예쁘게 빚어낸듯한 미니어처 같은 마을 소종은 재빨리 눈과 카메라에만 담고 음식점에서 점심을 사 먹는 여유는 포기하기로 했다. 슈퍼에서 파테와 치즈를 사 온 뒤 바다를 바라보며 주저앉아 후다닥 빵에 발라먹고는 일주에 나섰다. 의도치 않은 트레킹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 따라 새겨진 오솔길을 따라 섬 지형을 그대로 몸으로 흡수하며 걸었다. 마냥 쉽지만은 않은 코스였다. 중력을 거스르는 오르막에서는 자꾸 숨이 차오르고, 내리막은 속도가 덧붙은 몸을 제어하느라 긴장한 발목 때문에 온몸에 힘을 꽉 주었다. 높고 낮은 언덕이 반복되며 상황에 맞게 조절하느라 꽤 애를 먹었다. 게다가 정오를 막 넘긴 시간이라 머리맡에 이글거리는 불은 떨어지지 않았다. 도보 구간은 절벽과 그위에 피어난 들풀뿐, 그늘을 좀처럼 만나기 어려웠다. 걷는 시간이 누적될수록 힘도 빠져가고 출발할 때 의욕과는 달리 걷는 속도도 점점 느려져갔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 S와 나 말고 걷는 사람이 있을까 싶던 허허벌판에 저 멀리 점 같은 무언가가 움직인다. 그들은 중년 커플 트레킹 여행자였다. 언뜻 봐도 우리처럼 우발적으로 걷기 시작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등산 스틱에 복장까지 완벽히 갖추었다. 그리고 마주치는 순간 들리는 그들의 한마디.

"Bonjour"

난생처음 보는 사람. 앞으로도 마주칠 일 없을 듯 한 행인이 건넨 익숙한 인사말은 꽤 낯설었다. 잠시 망설이는 사이 그들은 휙 지나가 버려 마치 인사를 무시한 것 같은 상황이 돼버렸다. 한참 후 마주한 다른 여행자도 똑같이 우리에게 인사를 한다. 지쳐 보이는 내 얼굴을 보며 기운 내라는 고갯짓과 함께. 이번엔 놓이지 않고 나도 그들에게 화답했다.    

"Bonjour!"


좁은 트레킹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인사는 응원이 되었다. 상대가 걸어가야 할 길은 내가 걸어온 고된 길이다. 서로 언제부터 걸어왔는지 알 수 없어도 내가 알고 있는 당신의 적막한 여정에 힘내라는 단어를 대신했다.


가슴에 불덩어리를 안고 사는 생활은 언제나 물음표다. 월급의 책임감은 하루 동안 만들어낸 온 에너지를 쏟아붓고 저녁이 되면 탈진해버린다. 조금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어 돈을 버는 건데, 돈을 벌기 위해 숨 쉬고 있는 건지 자꾸 되묻게 된다. 고통의 사유들이 누적되어 조금만 툭 하고 건드려도 스스로 발화되어 타오를듯한 순간들도 종종 마주했다. 이런 지경에 이르면 속수무책으로 가까운 사람들에게 힘듦을 토로하게 된다. 그러고는 ‘그 정도면 잘하고 있는 거야’라는 격려에 기막히게 진화된다. 진부한 한마디에 다시 각오를 다지는 게 우습지만 너무 흔해 빠져 다른 의미를 부여할 필요조차 없는 문장에 진심을 읽는다.


평지라면 한 시간 만에 돌파할 거리를 3시간 만에 도착했다. 간간히 열기를 녹여준 거센바람과 여행자들의 격려로 가능한 일이었다. 확 트인 수평선과 바다를 마주한 곶 중심에 덩그러니 남겨진 조그마한 옛 등대터가 «연안의 집Maison du Littoral»이였다. 프랑스 고전 배우 사라 베르나르Sarah Bernhardt 가 벨일에 매료된 뒤 이곳을 매입하여 1923년까지 실제로 살았던 집이다. 파리에서 나고 자라 활동한 완전한 파리지엔느였던 그녀는 생의 마지막 순간을 포함한 26년 동안 이곳에서 보냈다고 한다. 실로 첫눈에 반할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아무것도 없이 벼랑만 가득한 등대를 개조해 수년간 살아왔다는 건 스스로 은둔하겠다는 의지와 다름없다. 모든 도시의 삶을 뒤로한 채 섬 가장자리로 떠나온 그녀에게 섬과 사랑에 빠진 것 말고도 분명 다른 사연이 있었을 거다. 그녀가 이곳을 사랑했던 마음을 깃들여 지금 연안의 집엔 벨일의 천연자원을 소개하는 작은 상설 전시가 열려있다. 일부 공간만 허용되어있지만 그늘 한 점 없던 산책일주로를 거쳐온 탓에 꿀 같은 쉼터가 되어준다.


사라가 내어준 집터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다 보니, 다음 뷰포인트까지 재촉해 둘러보는 건 지나친 욕심인 듯했다. 몸도 지쳐있고, 오후 6시 마지막 페리를 타려면 시간도 촉박했다. 선착장 행 버스가 오기까지 남는 한 시간 동안, 화려한 생활을 등지고 자발적인 외톨이로 살았을 옛 배우를 상상하며 고립된 바위*들을 둘러보았다.


'당신도 파리에서 멀리 떨어지고 싶을 만큼 불덩이를 안고 살았나요? 그 격렬의 응어리들이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식혀졌을까 궁금합니다. 덤벼드는 바닷바람을 호흡하며 걸었더니 저는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비록 섬의 5분의 1도 즐기지 못했지만 한동안 버틸 양식을 잔뜩 안고 돌아왔다.


*폴렌Poulaines 이라는 명칭은 브르타뉴 단어에서 유래했는데 ‘고립된 바위’ 혹은 ‘요란한 물구덩이’ 두 의미로 추측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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