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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립소 Jul 11. 2021

그래도 남이 해준 밥이 가장 맛있지

파스타

나는 파스타를 좋아하지 않는다. 프랑스에 처음 발 들였던 시절. 가진 돈으로 어떻게 꾸려가야 할지 두려워 벌벌 떨며 관리하던 극한의 긴축재정 탓도 있지만, 수많은 슈퍼의 식재료 중 까막눈의 외국인이 맘 놓고 선택할 수 있었던 값싼 파스타면과 반조리된 소스를 사다 끼니를 해결했던 그 몇 개월의 기억 때문이다. 한 병이면 서너 끼를 해결할 수 있는 시판 파스타 소스에 첨가된 통조림 특유의 시큼한 향이 싫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파스타 면에는 이상한 밀가루 비린내가 난다. 면을 완전히 익히지 않은 알덴테 상태에서 그 거부감의 냄새가 훅 느껴진다. 언젠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영화 따뜻한 색 블루 얘기가 나왔을 때, 아델의 가족들과 먹던 볼로네즈 파스타 장면에서 식욕이 당겼다는 사람들의 리플이 이해되지 않았다. 내게 그 장면은 우울한 어학 시절이 투영된 신이었을 뿐이다. 별 곁들인 재료 없이 토마토소스만 물들인 면을 우걱우걱 먹는 아델의 모습은 슬퍼 보이기까지 했다. 내게 파스타는 무지와 가난의 맛이다.


학교 동기였던 H는 파리에 나보다 훨씬 전부터 정착해 있었다. 비록 2살 동생인 그녀였지만, 프랑스 생활은 나보다 9년이나 앞섰다. 원체 지각 인생이라 그런지 나와 비교된 H의 시간은 어른, 혹은 인생 선배 같은 착각마저 들게 했다. 지방 어학교 방학 기간이니 파리 방문을 계획하고 있고, 그동안 한번 만나자라며 H에게 연락했다. 그녀는 내게 숙소 여부 먼저 물어왔고, 어디 백백커 예약해 뒀다 하니 손사래를 치며 자신의 집에 머물라며 제안하였다. 그렇게 입성한 파리 15구의 H의 스튜디오는 내 조그마한 학생 기숙사와는 비교할 수 없이 아늑했다. 집다운 집에서 자리 잡고 사는 모습과 당시 H의 유창한 프랑스어는 정말 어른 같아 보였다.

H네 집에 머무르는 일주일 동안, 몇 번의 외식을 하긴 했지만 대부분은 그녀가 밥을 차려줬다. 한인 슈퍼는커녕 중국인 마켓도 찾아볼 수 없었던 그때의 나에게 한국 음식이 그리웠을 거라며 끓여내 온 된장찌개, 김치볶음밥 등. 한국이었다면 익숙하게 먹었을 메뉴들이지만, 몽파르나스 타워 인근의 스튜디오 작은 주방에서 뚝딱 한 끼를 만들어내는 H는 마술사 같았다. 어느 날은 한식재료가 떨어졌다며 볼로네즈 파스타를 만들어 줬는데, 기숙사에서 홀로 먹던 그 지긋지긋한 맛과는 확연히 달랐다. 겨울밤 차가운 바깥공기와 마주하느라 몽글몽글 서리가 맺힌 창가 옆 식탁에 앉아, 따뜻한 김 모락모락 올라오는 접시에 머리를 박고 맛있게 비워냈다. 먹고 나서도 이걸 다 끝냈나 싶어 의아해 빈 그릇을 몇 분 동안 바라보았다.


이후 내 기숙사에 돌아와 H가 하던 방식대로 파스타를 만들어봤다. 간 쇠고기 한 팩을 올리브유 두른 마늘에 볶은 뒤, 토마토소스를 뭉텅 들이 넣어 잔불에 들들 익혔다. 나름 정성스레 익힌 소스에 삶아놓은 면을 추가해 버무려 접시에 담아보니 그럴싸했는데, 몇 가닥 집어먹자 평소 때처럼 금세 밀가루 비린내가 입안으로 퍼져 포크를 내려놨다. 내 혼신의 시도가 담긴 볼로네즈 파스타는 모두 쓰레기통으로 직행했고 이후 몇 년 동안 파스타를 먹지 않았다.

(볼로네즈 파스타는 아니지만) 얼마 전 해 먹은 나폴리탄 파스타

지금은 아주 가끔 파스타를 먹긴 한다. 하지만 여전히 즐겨먹지 않는다. 건면의 특성상 유통기한이 긴 덕분에 오래고 놔두어 밥 생각이 없을 때, 상 차리기 버겁지만 배는 고플 때 종종 해 먹는다. 그럴 때마다 면은 푹 익혀 밀가루 식감이 덜 느껴지도록 조심하지만 내가 만든 파스타는 여전히 맛이 없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가끔 남이 해준 (레스토랑 혹은 친구가 만들어준) 파스타는 맛있게 먹는다. 역시 남이 해준 밥이 가장 맛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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