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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립소 Jul 26. 2021

뜨거운 여름은 야채들의 전성기

가스파초 Gaspacho

카니발 복장을 한 군중들은 끊임없이 길거리로 흘러나왔다. 3층 높이 숙소에서 바라본 인파들은 마치 검은 석유가 투명한 송유관을 따라 이동하는 것 같았다. 눅눅한 공기의 무게로 보아 분명 곧 비가 쏟아질 거 같으면서도, 해는 구름 속에 몸을 숨겼다 드러냈다 반복하며 징그럽게 애태웠다. 내 몸에서 뿜어내는 열조차도 감당할 수 없어 끊임없이 갈증이 나 연거푸 물을 들이붓고 있었지만 쉽게 가라앉히질 못했다. 나의 뜨거움을 진화시킬 새도 없이 주위 사람들의 체온은 복사열처럼 서로가 서로를 타고 피부까지 전파되고 있었다. 때마침 유로 2016 개최 국가인 프랑스가 결승까지 올라갔다며 낮과는 다른 민족주의적 사유로 아비뇽은 밤까지 들썩거렸다. 용광로처럼 펄펄 끓는 도시에 머물러있는 동안, 솟아오를 수 있는 최고 온도까지 체험한 것 같다. Y와 나는 수많은 길목 구석구석을 탐험했지만 도시의 풍광은 어째 머릿속에 남기지 못했다. 마지막 학생 신분의 여름방학 아비뇽의 기억은 끈적한 몸에 티셔츠가 척척 들러붙고 홍옥처럼 새빨간 얼굴을 새겨냈다.


인파들 사이사이를 헤집고 다닌 탓에 허기는 졌지만 입맛은 잃은 상태였다. 그렇다고 멀리서 남프랑스를 여행하기 위해 날아온 친구를 위해서도 남은 여정을 생각해서도 끼니를 거를  없는 . Y에겐 이태리 북부 여행을 마치고 도달한 프랑스  도시라 현지 식당에서 하루에  끼는  하고 싶었다. 나름의 책임감으로 걷는 동안 수많은 인파들 사이에서도 레스토랑 밀집 지역을 눈으로 체크해두었고, 해가 저물 무렵 다시  길목으로 돌아가 주르륵 이어진  노천 좌석에 자리 잡아 식사를 주문했다.

전식으로 나온 야채수프 가스파초 Gaspacho  스푼 입안으로 밀어 넣자 나와 Y   입맛이 돌기 시작했다. 신선한 야채의 풍미는 새큼한 비네그렛 Vinaigrette 어우러져   안쪽에 숨겨진 침샘들이 축제의 불꽃놀이 마냥 팡팡 터져 나왔다. 가스파초  그릇을 깨끗이 비워 내고 본식 스테이크까지 열심히 썰어 먹은  (고기를  먹지 못하는 Y 다른 메뉴를 시켰던  같은데 기억이   난다),  동안 잃어버린 기운을 충분히 채워 넣었다. 이후 프로방스 여행길에 가스파초는 우리의 식욕을 보충해주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굳이 식당에 가지 않더라도 슈퍼에서 냉장용으로 팔고 있는 Alvalle 500ml 한팩씩 사서 나무 그늘에 앉아 후루룩 둘러마시며 샌드위치와 곁들이기도 했다.

이제 가스파초는 불을 쓰기 고된 날에  먹는 단골 메뉴  하나가 되었다. 만들자고 생각해두면  보러 가는 순간부터 행복해진다. 모든 야채, 과일들이 시리도록  익어 눈이 즐거운 여름 시장 가판대의 재료들을 차근차근 고른다. 그렇게 고심하여 모셔온 재료는 집에 돌아와 정성스레 깨끗이 씻어 채반에 올려 준비한다. 토마토 4, 오이 반개, 붉은 양파 하나, 파프리카   반을 투박하게 썰어두고, 손으로 아무렇게나 찢어  식빵  장과 마늘  톨과 바질  , 올리브유  스푼, 식초  스푼, 냉수 다섯 스푼 한데 넣어 믹서기에 갈아내면 완성이다. 소금, 후추 간은 입맛에 맞게 한다 (생각보다 소금을 많이 넣어야 먹을만하다). 이렇게 만들어 두면  끼니는 해결할  있다.  향긋함을 느끼려면 만든 다음날에는 소진해야 한다. 갈아놓은지 3 차부터 청량함은 점점 희미해진다.


스페인 남부지역에서 유래한 이 여름 수프는 지구 반대편에서 태어나고 자란 내 입맛까지 사로잡았다. 여름 밥상에 가끔씩 함께했던 냉국들 보다 더 걸쭉한 형태라고 생각하면 거부감도 없다. 어쩌면 가스파초의 향을 곁들인 익숙한 마늘, 양파의 역할 덕분에 내 혀는 더 쉽게 받아들였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것만으로 한식으로 견고하게 쌓여 꽉 막힌 취향의 철옹성을 뚫은 건 아닐 거다.

빨간 제 몸처럼 햇살 쬐기를 좋아한 토마토가 석 달 동안 태양을 먹고 자란 단단한 맛. 오돌토돌한 피부와는 달리 수분을 잔뜩 머금은 촉촉한 오이의 속살. 같은 가족이면서도 고추처럼 자극적으로 맵지 않고 은은한 풋내와 심지어는 달큰한 맛까지 뿜어내는 파프리카. 사계절 중 최고조로 뽐낼 수 있는 녀석들의 전성기, 여름에만 느낄 수 있는 한창때 자연의 맛 때문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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