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라이 없는 신세계

by 이윤수

아마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겠지만,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일 자체보다도 같이 일을 하는 사람이 더 나를 힘들게 하는 경우가 많다. 따지고 보면 대단한 것도 아닌데 누군가가 조금이라도 덜 힘든 일을 하려고 또는 어려운 일에서 빠져나가려고 잔머리를 굴리는 게 보이면 짜증이 나고 반대로 고생은 내가 하고 생색이 나는 일이나 성과는 딴 사람이 가로채 가면 은근히 화가 난다. 이 상황에서 내가 양보하면 바보가 되는 것 같고 그렇다고 지지 않으려고 다투자니 똑같이 치사해지는 것 같아서 께름칙하다. 하지만 이 정도면 그나마 참고 견딜 만하지만 지위를 이용해서 또는 패거리를 지어 교묘하게 나를 괴롭히거나 근거 없이 비난하고 험담하고 따돌릴 정도가 되면 정말 견디기가 힘들어지고 이판사판 대판 싸워서 결말을 내거나 직장을 당장 때려치우고 싶어진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그냥 참고 견뎌야 하나? 사회생활이 원래 그런 거니 숙명이려니 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괴롭다.

하지만 다른 모든 일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세상 모든 문제에는 다양한 해결책이 있다. 다만 내가 우물 안 개구리처럼 한 가지 생각에 매몰되어서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지 못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당면한 문제에서 벗어나 살짝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또라이 3대 법칙이라는 게 있다.

1. 세상 어느 집단에도 반드시 또라이는 있다.

2. 그 또라이를 제거하면 반드시 새로운 또라이가 나타난다.

3. 만일 아무리 살펴보아도 또라이가 보이지 않으면 그건 내가 바로 또라이라는 거다.

어쩌면 그저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이는 Matt Ridley가 '이타적 유전자'에서 소개한 게임이론과 일치한다. 즉 인간뿐만 아니라 미생물 사회에서 조차 모든 집단에는 항상 남을 착취하는 개체와 항상 당하는 개체, 그리고 선에는 선, 악에는 악으로 대응하는 상대적 반응 개체 등의 3종류가 있다. 그리고 얼핏 생각하면 ‘착한’ 개체들만 있는 군집이 천국이 되어 잘 번성할 것 같지만 실험 결과는 이 중 어느 한 종류만 있는 경우에는 그 군집은 소멸하고 이 3 종류의 개체들이 적당히(2:2:6 정도?) 섞여있을 때 즉 세상 현실과 유사한 상황에서 가장 잘 번성한다.

이는 또한 우리의 직관적 인식과도 일치한다. 즉, 세상 인간사에 갈등이 없을 수는 없으므로 그것이 자연의 섭리이며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 우리의 해결과제는 그 갈등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풀어가는 것이 가장 현명한 것인지를 찾는 것이다. 한정된 자원을 두고 다양한 능력과 개성과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서로 경쟁하고 상황에 따라 협력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런 숙명적 특성을 나쁘게만 볼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오히려 인류의 성장과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고 긍정적으로 바라본다면 보다 주체적이며 능동적으로 상황을 전개할 길이 열릴 것이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나 자신과 상황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나를 괴롭힌다면 그건 그저 그 사람이 나쁜 것이 아니라 내가 무언가 잘못을 했거나 내가 약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상황이 뒤바뀌면 나도 얼마든지 그렇게 할 개연성이 있다.

한편 그 '나쁜' 또라이들은 항상 만만하고 약한 대상을 희생물로 삼기 때문에 상대를 원망하고 욕만 하면서 상대가 개과천선하거나 하늘이 그놈에게 벌을 내리고 '정의로운(?)' 세상이 오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나도 대항할 힘을 키우든지, 잘못을 시정하든지, 내 편을 규합하여 맞서든지 아니면 당분간 굴복하고 현재 내 힘이 취할 수 있는 몫만 챙기고 거기서 우선 만족해야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합리적인 처분은 상대방 입장에서는 불리하고

내가 손해를 보았다고 느낄 때 상대방은 만족한다.'는 말이 있다. 다시 말해서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결정은 쉽지 않다는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옳다고 보이는 방향으로 세상과 사람들이 움직여 주리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욕심이다.

'세상은 본질적으로 불합리하다. 심지어 내 내면과 내 집 안에서도!'

나 자신도 항상 이상적이고 합리적이며 바르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는 없는데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더 내가 만족할 만큼 움직여주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그러니 다만 현실을 직시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가끔 나 자신의 모습을 비디오로 찍어서 본다. 무슨 나르시시즘이나 관종 같은 괴팍한 자기도취는 아니고 다만 내 모습을 객관적으로 한 번씩 돌아보기 위해서이다. 그러면 거울을 통해서 나를 볼 때와는 또 다른 내 모습에 놀란다. 화면에서 말하고 움직이는 사람이 분명 내가 맞는데도 내 뒷모습과 걸음걸이 그리고 목소리도 영 남을 보는 것 같이 낯설다. 대게는 내 외면의 모습이 만족스럽다기보다는 덧니 같은 약점이 두드러져 보이고 요즘엔 세월의 흔적이 더 느껴져서 썩 기분이 좋지는 않을 때가 많지만 굳이 이렇게 해서 나를 바라보면 내가 훨씬 겸손해지는데 도움이 된다.

사람의 마음이란 간사하기 짝이 없어서 그저 착하게 살자거나 성실하게 일을 하자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자거나 겸손하자는 다짐이 마음만 먹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 있는 경험과 환경을 만들어주지 않으며 실천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를 과신하지 말고 유혹이 될 만한 것을 멀리 치워버려야 한다. 예를 들어 다이어트를 하려면 주변에서 먹을 것이 보이지 않도록 해야 하고 책이나 간단한 운동 기구를 눈에 뜨이는 곳에 배치하고 취미나 운동을 같이 할 수 있는 친구를 가까이해야 하며 원하는 행동들을 매일 습관적으로 할 수 있도록 routine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나를 비디오로 보는 것이고 그러면 내가 나도 모르게 나를 세상의 중심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에서 깨어나 나 역시 이 세상 많은 사람들 중의 하나이며 나의 소망과 믿음과 욕구 같은 것들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자아의식에 매몰되어서 괴롭던 마음에서 해방이 되는 데도 도움이 될 수가 있다.

물론 그 누구도 자신을 엄밀하게 완전히 객관적으로 볼 수는 없으며 누구나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러나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의사결정을 하고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며 그 객관화 정도에 따라서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그 사람이 또라이나 꼰대가 되느냐 아니면 창의적이고 건설적이며 함께 하면 생기가 나고 즐거운 사람이 되느냐를 결정지으며 나아가 그 사람이 인격적으로 성숙하고 삶이 즐겁고 풍요롭게 되느냐를 좌우하게 되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인생의 성공여부를 다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객관화가 사회생활에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이렇게 비디오를 통해서 나를 바라보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외에도 객관화 방법으로는 다른 사람이나 상담가로부터 나를 평가받고 조언을 듣는 방법도 있지만 감정적 개입과 간섭이 일어나기가 쉽고 평가자나 나나 솔직하지 못할 수가 있고 또 서로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하고 듣고 싶은 말만 듣는 경향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으므로, (이처럼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향 즉 자기가 믿고 있는 것만 믿고, 듣고 싶은 것만 골라서 들으며 다른 것들은 배척 또는 무시하는 성향을 '확증편향' 또는 '동굴의 우상'이라고 한다) 스스로 비디오로 자신을 보면서 나에게 주어진 상황과 주변 사람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판단하는 경험을 해보는 것이 좋고, 필요하다면 그 비디오를 다른 사람과 같이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자신의 처지와 현실을 객관적으로 볼 수만 있다면 그것이 나 자신이 남을 괴롭히는 또라이가 되는 것을 예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또라이가 나를 괴롭히는 것에서 벗어나 즐겁게 살며 성공적으로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비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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