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참 다루기 어려운 주제이지만 인생에서 반드시 한 번은 넘어가야 할 큰 과제이며 역사상으로도 참 거창한 문제였다. 인류는 신석기시대부터 시신을 부장품과 더불어 정성껏 매장하고 고인돌을 세우는 등 죽음과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과 의식이 있었으며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미라는 고대의 사람들과 사회에서도 죽음과 사후세계가 현생의 삶을 지배할 정도로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 후에도 모든 종교들은 죽음과 사후세계에 대한 나름의 교리와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현재 인류에게 가장 영향력이 있고 세련되고 고등한 종교라고 할 수 있는 범 기독교도 예수의 죽음과 부활, 영생 등 죽음이 가지는 의미를 그 핵심교리로 다루고 있다. 또한 힌두교는 생명이 윤회한다고 보고 불교 역시도 '생로병사' 즉 죽음에 대한 해석과 해탈을 석가의 주요 깨달음과 가르침으로 보고 있다.
나 역시 10대에 자의식이 생길 때부터 죽음에 대한 공포도 생겼는데 아마도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들에게 죽음과 폭력에 대한 두려움은 본능 속에 뿌리 깊게 박혀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만약 그것이 없는 종이 있다면 아마 예전에 멸종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나는 비교적 적게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무슨 사이비 교주 같은 소리냐고 하겠지만, 사실 나는 고등학교 때 유도를 하다가 목조르기를 당해서 잠시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난 적이 있다. 그때 처음에는 숨이 막히고 답답하고 괴로웠지만 잠시 후 몽롱하고 편안해지면서 몸이 둥둥 떠서 날아 가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렇게 강을 건너거나 어두운 터널을 지나간 후 환한 빛을 보는 황홀경을 맛보는 것은 많은 임사체험자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현상이고, 과학적으로는 최낙언의 '감각, 착각, 환각'에 따르면 어떤 이유로든 뇌로 가는 산소가 차단되면 뇌 활동이 일시정지하고 강력한 진통 호르몬이 분비되면서 생겨나는 환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일부 이상한 사람들처럼 죽음을 동경하거나 자살을 미화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고 그 사건 때문에 삶에 대한 아쉬움이나 미지의 죽음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아주 없어진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그 후에도 많은 죽음을 지켜보면서 나름 담담하게 서서히 죽음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할 수는 있었다.
물론 살아가는 것이 더 소중하기에 죽음은 항상 조금 뒷전의 관심사이긴 했지만 중학교 때 단짝과 대학교 때 친하게 지냈던 동아리 선배가 허무하게 계곡에서 물놀이를 하다가 익사한 사건, 그리고 군대시절 같은 방을 쓰던 동료가 훈련 중 사고로 죽는 바람에 내가 화장과 운구를 도맡아 하기도 했고, 캐나다에 와서 우연히 소나 돼지 등 가축을 대량으로 도살장에 운반하는 일을 좀 하다 보니 조금 전까지 팔팔하게 뛰어다니던 그 많은 생명들이 순식간에 고깃덩이가 되어서 매달려 나오는 것을 보고 삶과 죽음의 경계가 생각보다 낮고 생명의 덧없음을 실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충격은 역시 내 부모님의 삶과 죽음이다.
종교에 심취하여 가정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어쩌면 경제적으로 무능하고 이기적이었던 아버지 때문에 끼니 걱정을 할 정도로 가난했던 우리 집에서 나는 대개 어두운 기억의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그런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마지막 힘으로 나를 안아주시면서 '그동안 고생 많았다'라고 하는 순간에 평생의 서러움이 하염없는 눈물로 녹아내렸고 움직임을 멈춘 아버지의 육신은 잘잘못을 따질 의미가 없는 하얀 백지와 같아 보였다.
또한 이런 아버지를 대신해서 평생을 쉼 없이 행상과 가사로 자식들 먹이고 입히고 학교 보내려고 고생만 하던 어머니는 착한 내 아내 덕분에 말년은 편안했고 거의 백수 장수는 하셨지만 나중에 기력이 없어서 음식을 삼키지 못해서 돌아가셨고 마지막 말로 '윤식아 배고프다. 물 좀 다오.' 하시고는 내가 드린 물을 채 다 넘기지 못하셨다.
과연 죽음은 끝인가? 죽음 뒤에도 무엇이 있을까? 아무도 알지 못하고 증명할 수도 없다. 그저 각자가 믿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후세계가 있다고 믿든 없다고 믿든지 간에, 죽음이 추하면 삶도 추하고 죽는 순간이 아름다워야 살아온 삶도 아름답다는 사실이다. 물론 사고사는 고통스럽고 어리거나 젊은 죽음은 당연히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느 정도 성인이 된 후인데도 언젠가는 당연히 닥칠 죽음을 평화롭게 맞이할 수 없을 정도로 여건을 불비했거나 생명유지 장치에 기대어 억지로 수명을 연장하고 안 죽으려고 악을 쓸 정도로 마음의 수양이 부족했다면 그 사람의 삶도 과히 성공적이었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 같다. 그러니 깨끗하고 담담하고 미련 없이 삶을 마감할 수 있도록 오늘 하루도 여한이 없게 행복하고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죽음을 최고로 잘 준비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는 다른 나라에 여행을 갈 때마다 그곳의 공동묘지에 가보는 데 그 비석에 적힌 생몰연대와 짧은 비문을 보며 역사적 배경과 더불어 그 사람들이 살았던 시대와 삶을 상상해 보면서 (그들의 성취와 삶을 존중하면서도) 한편으로 그들이 살아있을 때 가졌던 꿈과 애욕이 얼마나 허망한지도 같이 느껴보곤 한다. 그러면 부수적으로 내가 현재 가진 고민과 문제와 욕망이 지나치게 나를 구속하는 것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온을 얻을 수 있었다. 이처럼 숙명적 죽음을 염두에 두고 현세의 욕망을 경계하는 철학적 사유는 라틴어로 Memento mori (영어로 remember that you [have to] die 즉 죽을 운명임을 기억하라)는 경구로 서양에서는 중세에서부터 18세기까지 문학과 음악 미술에서 단골 주제였으며 유명한 Hans Holbein의 회화 The Ambassadors에도 해골이 소품으로 진열된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러니 너무 겁먹을 필요 없다. 기다림이 무서울 뿐 막상 그 때가 닥치면 그저 순간일 뿐이고 , 깨달은 사람에게는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요 하나로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