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살이의 즐거움 중의 하나는 자연을 비교적 가까이에서 쉽게 보고 체험하고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중에서도 새들을 보고 있으면 중력과 지형의 한계를 초월하여 비상하는 존재의 자유로움이 느껴져서 참 좋다.
사람 수보다 호수의 수가 더 많다는 캐나다의 그 많은 호수와 강의 맑은 물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청둥오리와 룬, 원앙, 홍머리 오리와 가마우지, 고니, 캐나다 구스가 여유 있게 잔물결을 일으키며 수면 위를 헤엄치다가 물속으로 쏙 자맥질을 해서 사라졌다가 불쑥 솟아나기도 하고 이따금씩 푸드덕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가 또 날개를 활짝 펼치고 활공을 하여 물 위로 내려앉기도 하는 모습이 마치 단체로 춤을 추는 것 같아 보인다.
또 물가 모래톱에는 두루미와 도요새가 마치 아이들이 놀이로 장난을 치는 것처럼 가늘고 긴 발을 얕은 물에 껑충껑충 담그거나 뽀르르 달려가기도 하고 긴 목을 물속에 푹 담가 먹이를 낚아채기도 한다.
'따다닥'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는 소리에 눈을 돌려 숲 사이를 보면 까치와 까마귀, 어치, 다양한 참새, 여새, 딱새류들이 나무 가지 사이를 포로롱 포로롱 이리저리 날아서 옮겨 다니는 게 보인다. 특히 이 작은 새들은 사람들에게 친밀해서 때로는 사람이 숲 속에 들어오면 쫓아오기도 하고 모이를 손에 올려놓고 휘파람을 불면 금세 휙 하고 손에 날아와 앉아서 모이를 주워 먹기도 한다.
가끔은 부엉이나 올빼미가 미동도 하지 않고 가지 끝에 가만히 터를 잡고 있는 것이 보일 때도 있다. 그렇게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 낮은 하늘에는 제비갈매기가 날아가고 중간쯤 높이에는 기러기나 매, 말똥가리가 떠있고 까마득히 높은 곳에는 흰머리 독수리가 멋있게 큰 날개를 펴서 우아하게 상승기류를 타고 빙빙 돌거나 활공을 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래서 여기서는 새 관찰을 취미로 하는 사람이 많아서 대 배율 렌즈를 끼운 큰 카메라나 쌍안경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정원 나무에도 새 모이통을 걸어놓는 집들이 꽤 많이 있다. 그중에는 새를 '지나치게' 사랑한 나머지 겨울이면 강가에 매일 나가서 새들에게 모이를 일삼아 뿌려주는 사람이 가끔 있다. 이렇게 하면 겨울에 남쪽으로 가야 할 철새들이 공짜 먹이에 취해서 아주 눌러앉아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야생동물이나 새에게 먹이를 주거나 접근하지 말라.'는 경고도 붙여놓았지만 이 '맹목적인 사랑'을 멈추지 않는 사람들은 여전히 있다.
사람들의 이런 개입이 철새들의 활동과 이동과 새끼양육에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또 사람들의 음식에 익숙해진 다람쥐나 곰, 너구리같은 야생동물들의 삶은 어떻게 바뀌는지 관찰과 연구를 해보고 싶은 개인적 바람도 있지만 대개는 새와 동물들의 생존과 번식에 장기적으로 좋지 않을 것이라는 게 생태학계의 입장이다. 그래서 캐나다 국립공원도 중점 정책을 처음의 '개발'에서 '보호'로 바꾸었다가 늑대 제거 산불방지 등의 보호활동도 생태계의 균형을 깨서 큰 맥락에서의 자연파괴라는 것이 밝혀진 이후에는 '보존과 유지'로 전환을 했다.
이처럼 추운 겨울에 먹이를 구하기 힘든 새와 동물들에게 모이를 주는 그 따스한 마음처럼, 동기는 아무리 좋아도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그 대상에게 피해를 입히는 경우를 우리는 인간사에서도 많이 본다. 우리가 현명하고 바르게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동기뿐만 아니라 과정과 수단과 결과가 다 올바르고 일맥상통하게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것이 말처럼 그렇게 쉽지가 않다. 이렇게 동기는 좋았지만 결과는 정반대가 나오거나 더 악화되는 것을 한자숙어로 適得其反이라고 하는데 이는 예전에 한 관리가 새장의 새가 불쌍해서 돈을 주고 사서 풀어주었더니 오히려 돈을 벌려고 새를 잡으러 다니는 사람이 더 많아지고 결과적으로 새장에 갇혀 사는 새들이 더 많아졌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불교신도들이 초파일에 물고기를 放生하는 것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그런데 왜 세상사는 사람들이 의도한 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것일까?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들이 모든 정성을 바치는데 아이들은 그 뜻도 몰라주고 삐뚤어지는 것일까? 집값을 잡으려고 규제 대책을 쏟아내는데 강남 집값은 오히려 더 오르는 것일까? 전쟁은 안 된다며 히틀러와의 평화협정을 맺고 돌아온 영국 체임벌린 수상의 어리석음이 히틀러의 야욕에 고삐를 풀어서 오히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되었을까? 조국통일의 과업을 이룩하려는 김일성과 공산주의자들의 숭고한(?) 투쟁이 왜 동족상잔의 비극을 낳았을까? 자유 평등 박애 해방의 기치를 내 건 프랑스혁명이 일시적으로 또 소련과 캄보디아의 공산혁명이 장기간 스탈린과 폴 포트 일당의 학살과 폭력과 독재와 불평등과 가난과 억압을 낳았을까? ‘인민이 위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라’며 정부가 국민들 에게 아낌없이 베푼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같은 나라들의 국민들이 결국에는 비참하고 빈곤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반면에 돈을 벌려는 이기적인 의도가 산업혁명과 농업혁명을 일으켜 방직, 합성섬유, 자동차, 비료를 통한 식량증산, 의료, 공중위생 증진, 전등, 라디오, 세탁기, 스마트폰, 인터넷 등 우리가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롭고 건강한 삶을 누리게 했을까?
그것은 인간은 불완전하고 세상 환경은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인간이 아무리 좋은 의도로 합리적인 계획을 세우더라도 결과는 뜻하지 않게 다르게 나올 수가 있는 것이다. 또한 사람의 어설픈 의도적 개입이 자연스러운 성장과 발달 순환을 방해 저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아이들의 경우 인간은 흥미와 자발적인 성취동기가 있을 때에만 뇌가 움직여서 관심과 動因이 되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부모가 강요할 때에는 성과가 나올 수가 없으며
생태계에 있어서는 호주의 토끼와 모기 천적 도입이 생태계 교란으로 더 큰 피해를 낳은 사례, 프랑스 혁명기에 유제품 가격통제를 했다가 공급 감소로 가격이 폭등한 사례, 인도에서 코브라를 퇴치하기 위해서 현상금을 걸었다가 오히려 코브라가 더 늘어난 사례, 50년대 말 중국에서 마오쩌둥의 지시로 시작된 소위 대약진운동 기간 동안 곡식을 축내는 참새와 쥐를 대대적으로 박멸하였다가 역효과로 수백만이 아사하는 식량기근을 초래한 사례, 최근 한국에서 주택 가격 안정을 명분으로 다주택자를 규제하고 증세하다가 오히려 공급 부족 심리로 집값 폭등을 가져온 사례 등 자연과 시장에 대한 사회주의자들의 어설픈 개입이 의도와 반대되는 결과를 낳은 사례는 수 없이 많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손'이 가장 합리적인 결정을 한다는 아담 스미스의 시장을 기본적으로 신뢰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국가의 인위적 조작과 계획은 복지와 사회안전망 증진과 불공정 감시 등으로 최소화하는 것이 옳다는 것은 공산주의의 몰락과 서구 자유 자본주의 성공이 증명하고 있다. 또한 논리적으로도 Milton Friedman의 ‘선택할 자유’에 따르면 시장은 공정성만 유지한다면 비합리적인 경제활동을 하는 개체나 집단을 경쟁을 통해서 도태시킴으로써 효율적 자원분배가 가능 하도록 하고 합리적인 소비와 투자의 의사결정을 보장해 준다. 이는 일면 잔인해 보이지만 자연계의 적자생존 원리와 비슷하게 작용함으로써 장기적 거시적으로 다수의 번성에 유익한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원리이다.
이처럼 역사가 예외 없이 의도와 결과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데도 여전히 여론이나 재판에서는 우발적이거나 의도가 좋았던 점 또는 반성하고 있다는 점, 심지어 술에 취해서 심신미약이었다는 등의 동기요인을 참작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 하버드대 인간진화생물학과 교수인 Joseph Henrich의 "Weird'에 따르면, 이처럼 동기를 중요시하고 이권개입과 의사결정에 있어서 사적 친분을 배제하는 것은 사실 근대 서구 사회가 발달시킨 '특이한' 현상이고 인류학적으로 볼 때 대부분의 인간집단에서는 '결과'만을 보고 그에 상응하는 보복적 응징과 처벌을 하며 또한 사적인 연대와 이권 나눔은 극히 자연스럽고 일반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동양 특히 한국에서는 개인의 개성과 인격보다는 그의 신분과 상호관계를 더 고려하는 친족 공동체 신분제 사회의 전통 때문에 어떤 개별 행위의 잘잘못을 판단할 때 행위 그 자체보다도 누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동기로 그런 행동을 했는지를 더 중요한 판결 근거로 삼게 되었다.
하지만 그 weird 한 문화와 제도가 지금은 세계의 대세가 되었고 인류가 역사상 만들어낸 최상의 시스템인 것은 서구의 번영과 인권의 증진이 입증하고 있으니 얼핏 보면 모순인 것 같다. 그러나 개인행동에 있어서는 동기를 중요시 하되 전체 시스템에서는 개인의 동기요인을 배제하고 (인치가 아닌) 법치와 (독재가 아닌) 민주주의와 (통제가 아닌) 자유체제라는 제도를 정립했다. 그래서 이 체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고 한 개인이나 소수의 능력과 선한 의도에 의존하지 말고 촘촘하게 3권을 분립하고 절대로 개인이나 한 집단에게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을 주지 말아야 한다.
물론 개인과 집단의 의지와 의도와 실천력이 현실과 역사에 큰 변화를 가져오며 그만큼 중요하긴 하다. 하지만 아무리 착한 의도를 가진 사람일지라도 한 사람의 지도자나 소수 집단을 전적으로 믿고 의존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들의 계획이 세상을 망친다. 그들은 신이 아니고 세상이 그들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으며 누구나 아집과 욕망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스스로 대통령 연임을 제한한 미국 건국의 아버지 Washington이 맞고, 대를 이어 군림하는 김일성 일가는 그 사실만으로 사악하며 북한사람들의 비참한 삶의 현실도 장기독재가 반드시 악으로 간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개인적으로도 그리고 크고 작은 집단과 공동체에서도 '착한'의도와 독선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경계를 해야 한다.
자신(들)만이 옳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과 그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집단보다 세상에 더 위험하고 무서운 존재는 없다. 세상을 통째로 멸망시키는 그들에 비하면 호환과 마마는 장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