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막 1장 - 횡재

12일 오전 - 횡재

by 이윤수

“어서 오세요"

윤주는 오늘의 세 번째 손님을 환하게 웃으며 맞이한다. 한복과 두루마기를 깔끔하게 차려입은 할아버지다. 갓 대신에 쓴 검은색 모피 중절모가 한복과 잘 어울린다.

"어디로 모실까요?"

"서울대 병원으로 가 주게!"

'아싸. 오늘 운이 좋네! 아침부터 대기 없이 계속 장거리 손님들이야..'

"알겠습니다. 수서 터널과 88 도로를 경유하여 서울대 병원으로 모시겠습니다."

윤주는 기분이 좋아서 주행 버턴을 누르면서 경로와 행선지를 다시 한번 친절하게 안내한다.

"기사 양반!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나? 싱글벙글이네!"

손님이 뒷좌석에서 룸미러로 윤주의 눈을 바라보며 묻는다.

"예. 오늘 아침부터 손님 운이 좋아서요.."

"손님 운? 손님 운도 있나?"

"예. 손님이 내리시고 나서 바로바로 다음 손님을 태우면 우선 공차 주행을 안 해도 되니까 좋고요 단거리보다는 손님처럼 장거리를 가시면 신호가 많지 않은 고속화 도로를 탈 수 있어서 좋은데, 오늘은 제가 아침부터 계속 좋은 손님을 모셔서 신이 나요. 집에서 나오자마자 인천공항 한 분 모시고 거기서 바로 분당 손님 모시고 왔고 그다음엔 손님이 바로 타시고... 오늘 사납금 벌써 거의 다 채웠어요!"

"아, 그랬나? 다행이네. 그럼 나도 좋은 손님이겠네?"

할아버지에게 오랜 세월의 흔적으로 주름이 된 온화한 미소를 짓는다.

"아이, 좋은 손님 나쁜 손님이 어디 있어요? 다 고마운 손님들이시지요. 그냥 기사 입장에서는 그렇다 이거지요."

"그래? 서울 택시 기사가 모두 기사님만 같으면 좋겠네. 어떤 사람들은 밤늦게 가까운 곳에 가자고 하면 문도 안 열어주고 씽 가버리더라고!"

"죄송합니다. 가끔 그런 기사님도 계시지요. 다른 기사들까지 욕 먹이고... 너그럽게 양해해 주세요. 저도 정해진 하루 수입을 못 채우면 그런 짓을 할 유혹이 생기기도 해요."

윤주가 대신 사과를 하자 손님이 손을 들어 손사래를 치며 만류한다.

"아닐세. 내가 자네를 나무라는 게 아니야."

"예.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한데 오늘 무슨 일로 출타를 하시는지요?"

"응, 검진 좀 받으려고.."

"아 그러시군요. 저도 검진을 한 번 받긴 받아야 하는데 게을러서 바쁘다는 핑계로 여태 한 번도 못 받아봤어요."

그때 윤주의 휴대전화 벨이 울린다.

"잠시만이요. 혹시 제가 전화를 잠시 받아도 괜찮겠습니까? 핸즈프리라 주행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예. 그러세요."

"감사합니다."

윤주가 전화기 거치대에 한 손을 뻗어 통화버턴을 민다. 이어폰으로 고모의 풀 죽은 목소리가 가냘프게 들린다.

"예. 고모!

지금 운전 중이라..

예. 알았어요. 그럼 우선 우리 집에 가 계세요.

어딘지 아시지요? 예. 3988 누르고 들어가시면 돼요. 냉장고에 먹을 거 찾아드세요.

예. 아따 봬요."

전화를 끊고 윤주가 다시 양해를 구한다.

"죄송합니다. 좀 급한 일이라 잠시 받았습니다."

"나는 괜찮네. 그래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예. 고모님이신데, 딸 네 집에 갔다가 쫓겨났나 봐요."

"뭐? 쫓겨나? 왜?"

"어휴, 말씀을 다 드리자면 사연이 길어요."

"그래? 어차피 길이 막히는 것 같으니까 기다리는 동안에 어디 이야기나 한 번 들어보세. 고모님이 연세가 많으신가?"

"예. 올해 일흔이신데 건강이 좀 안 좋으세요."

"요즘 일흔이면 아직 청춘인데.."

"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정하셨는데 고모부 돌아가시고 갑자기 안 좋아지셨어요. 게다가 안 좋은 일도 있었고요"

"안 좋은 일?"

"예. 고모부 돌아가시고 유산을 상속받는 과정에서 나쁜 놈들에게 사기를 당해서 싹 날려버렸어요. 법에 대해서 잘 모르시니까 그냥 사기꾼들이 하라는 대로 도장을 찍어주었나 봐요."

"아이고 이런... 법무사에게 맡기지 않으셨나?"

"예. 그러려고 법무사에 가던 날 마침 집 앞에서 우연히 동네 아저씨를 만났는데 가는 길이라며 차를 태워주겠다고 하더래요. 그래서 얻어 타고 갔는데 자기가 상속세를 절약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하면서 대신 서류를 받아 오고 접수하고 신고하고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고모를 홀렸나 봐요. 고모는 또 세금을 줄여준다니까 혹하고 넘어갔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 벌써 아침에 계획적으로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위법 운운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하지 말라고 해서 우리도 일이 다 터지고 나서야 알았지 뭐예요!"

"그래 그놈은 잡혀갔나? 동네 사람이라며?"

"아휴, 순 건달 같은 사람이에요. 집도 남의 집에 살고 백수건달 남의 등이나 처먹고 살다가 몇 억 큰 건 하나 해 먹고 바로 도망을 가 버려서 찾지도 못해요."

"경찰에 신고는 했고?"

"경찰도 적극적으로 잡지도 못한데요. 이게 강력사건이 아니고 고모도 적극 협조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일반 사기사건과는 좀 성격이 다른가 봐요. 암튼 돈 찾기가 쉽지가 않고 그놈이 집까지 잡히고 돈을 빼먹어서 결국 집은 경매로 넘어가고 길거리에 나앉게 되었지요.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딸내미 하나 있는 것이 전에는 평생 모시고 살 것처럼 요설을 떨더니만 막상 고모가 빈털터리가 되니까 구박을 어찌나 하고 무시를 하고 아주 종 부리듯 하니까 도저히 얹혀살 수가 없나 봐요. 사위란 놈은 장모가 멍청해서 돈을 다 날렸다고 아주 면전에 대 놓고 욕을 한데요.."

'아휴, 저런 인심이 있나! 하긴 요즘엔 그런 일이 새삼스럽지도 않아. 어찌나 흔한지.. 그래도 지 엄마인데 그럴 수가 있나?"

"그러게요. 그 딸 년이 보통 딸 년이 아니에요. 원래 우리 고모가 얘가 없어서 시동생 딸을 양녀로 삼았거든요. 있잖아요. 옛날엔 얘 못 낳으면 여자들이 죄인이었던 거..."

"그랬지. 가문의 대를 끊는다고.. 구박을 많이 받았지!"

"예. 그래서 양녀로 들이고 나서도 끔찍하게 잘해줬어요. 남의 자식 구박한다는 소리 안 들으려고 잘 먹이고 잘 입히고 공부도 대학까지 시키고 시집도 잘 보냈지요. 지가 입양 안 왔으면 어디서 그런 사치를 누려요? 지 친 남매들은 대학 물 먹은 얘가 하나도 없어요. 좀 못 살았거던요!"

"그런 배은망덕이 있나?"

"그러게요. 외동이니 고모부가 사업을 해서 벌어놓은 유산을 몽땅 차지할 욕심을 부리다가 그게 삐끄러지니까 본성을 드러내는 거지요. 조카라지만 아주 얄미워서 보기도 싫어요."

"그래도 기사양반이 거두어주니 그나마 다행일세."

"저라도 해야지 어떡해요? 정말 길거리에서 주려 죽을 판인데..."

"그래, 고맙네. 나도 살 만큼 산 인생이라 남의 일 같지가 않은데.. 기사 양반이 마음을 잘 쓰니 복 받을 거야."

"아후, 뭐 대단한 거라고요! 저도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릴 때 고모가 절 귀여워해주셔서 그 은혜를 조금 갚는 거지요."

"그래. 그나저나 수고했네. 잔돈은 됐네."

윤주가 좀 흥분을 해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택시는 서울대 병원에 도착했고 손님은 만 원짜리 두 장을 내밀었다.

"아닙니다. 여기 거스럼 돈.."

윤주가 천 원짜리 두 장과 동전을 집어 들고 주려고 몸을 뒤로 돌리는데 손님은 벌써 차에서 내려서서 문을 닫고 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윤주가 꾸벅 인사를 하자 문이 닫히고 뒷 차가 빵빵거린다.

윤주는 백미러를 보면서 서둘러 핸들을 돌리고 차를 출발시킨다.

택시 주차장으로 가서 다음 손님을 기다리려고 했더니 대기하고 있는 택시들의 줄이 길다. 마음을 고쳐먹고 근처 성대 정문 옆 골목에 있는 기사식당으로 차를 몰았다. 손님을 받을 미련을 아주 버리지는 못해서 가는 길에라도 손님이 있으면 태우려고 '휴무' 대신에 '대기' 버튼을 눌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식당으로 가는 도중에 손님은 없었다. 택시 운전을 하면 안 좋은 것이 식사와 잠자는 시간이 불규칙하고 때로는 대소변도 억지로 참아야 한다는 점이다.

사는 게 뭐라고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밥이라도 잘 챙겨 먹자고 매번 다짐을 하지만 막상 손님이 계속 있으면 밥 먹겠다고 손님을 안 태우고 '휴무'를 누르기가 쉽지가 않다. 이 손님만 태우고 다음엔 쉬자고 하다 보면 자꾸만 밥때를 놓치기 십상이다. 돈이 무섭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윤주는 차를 길가에 주차하고 식당 문을 열었다. 홀에는 몇몇 기사들이 밥을 먹고 있다.

"안녕하세요? 주차장에 자리가 없네요."

윤주는 빈 식탁을 찾아 앉으며, 분주하게 반찬그릇을 나르고 있는 여주인에게 아는 척을 한다.

"어서 와. 길 가에 잠깐 세워도 괜찮아. "

열심히 살아서 그런지 중년을 넘긴 나이에도 몸이 호리호리한 주인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다.

손님이 대부분 기사들이다 보니 조금만 낯이 익고 단골이 되면 거의 반말이다. 그래도 기사들은 편안하고 친밀하게 느껴져서 아무렇지 않게 받는다. 식당엔 메뉴판도 없다. 그냥 아줌마가 주는 대로 먹는다. 집에서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듯이 오늘 메뉴가 좋기만을 바랄 뿐이다. 하지만 대부분 밑반찬도 감칠맛이 나고 생선과 육고기도 다양하게 빠지지 않고 나온다. 가격대비 정말 괜찮아서 윤주도 근처에 오면 이 기사식당에서 밥을 꼭 먹는다.

오늘은 조기와 제육볶음에 윤주가 좋아하는 생미역 무침까지 있다.

"와! 오늘 누구 생일인가? 싸장님 싸랑해요!"

윤주가 신이 나서 젓가락을 들며 주인에게 너스레를 떤다.

"그래 내 환갑날이니 맛있게 먹고 부조나 많이 해!"

주인도 칭찬에 기분이 좋은지 농으로 받는다.

"아휴, 웬 아가씨가 환갑은 무슨... 시집가는 날이라면 믿겠네!"

식당에 있던 다른 기사가 농을 이어받고 홀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유쾌하게 웃는다.

맛있게 점심을 먹고 식당을 나서며 윤주는 '역시 여길 오기를 잘했네'라고 중얼거린다.

리모컨으로 차의 잠금장치를 풀면서 윤주는 혹시 주차위반 딱지라도 뗐는지 싶어서 차 앞 뒤 유리창과 주변을 살펴보았다. 별 이상은 없는데 차 뒷좌석에 뭔가 쪽지 같은 것이 떨어져 있는 게 보인다. 뒷 문을 열고 보니 작은 종이봉투 하나가 앞 좌석 아래 부분에 반쯤 가려진 채 손님 발 두는 곳에 놓여있었다. 열어보니 오만 원짜리 지폐가 꽤 두둑하다. 백만 원도 넘을 것 같다.

'아까 그 할아버지가....

어떻게 하지?'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이 돈이면 갖고 싶었던 태블릿 pc를 살 수도 있고 한 두어 달 월세에 쪼들리지 않을 수 있는데... 그 할아버지가 돈을 잃어버린 줄은 알까? 신고를 하면 어떡하지? 아니야. 택시에 두고 내린 줄 안다면 지금쯤이면 연락이 왔을 텐데... 모른 척하고 조금만 기다려볼까? 연락이 오면 그때 발견했다고 하고 연락이 안 오면...'

윤주는 일단 차에 올라타고 종암동 쪽 큰길로 접어들었다. 돈을 어찌할지 갈등을 하느라 마음이 시끄러워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길 가에서 택시를 기다리던 아줌마 하나가 윤주의 차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무심코 타려다가 '휴무'라고 표시된 근무 등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러선다.

'아니야. 그 돈 없어도 사는 데 아무 지장 없어. 어차피 내 돈도 아니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돈이잖아! 이 돈으로 뭘 해도 두고두고 찝찝할 거야. 그냥 돌려주고 마음 편히 살자.'

윤주는 결심을 하고 종암경찰서 사거리에서 유턴을 한 다음에 서울대 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막상 서울대 병원에 도착하니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택시 주차장에 차를 대면 운전석을 떠날 수도 없어서 일반 주차장에 주차를 했다. 차단기가 올라가고 자신의 차량번호와 입차시간이 찍히는 걸 보면서

'제기랄 주차비에 시간 낭비에 이게 뭐람!'

짜증이 났다. 하지만 얼른 빈자리에 차를 세우고 무작정 할아버지가 내린 곳에서 가장 가까운 병동으로 들어갔다. 회전문을 밀고 들어가자 바로 앞 안내 데스크 옆 의자에 그 할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깜짝 놀라

"할아버지, 여기 두고 내리신 돈..."이라며 봉투를 두 손으로 내밀었다.

노인은 별로 놀라지도 않고 돈을 받을 생각도 없는지 그냥 윤주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고만 있었다. 마치 이럴 줄 알고 기다리고 있던 사람 같았다.

당황한 윤주가 돈 봉투를 들고 뻘쭘하게 서 있으려니

"왔나? 생각보다는 오래 걸렸네.."라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윤주는 자신이 좀 전에 유혹에 빠졌던 걸 들킨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죄송해요. 점심을 먹느라 미처 못 보고 좀 전에 발견했어요. 그래도 금방 이렇게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어떻게 돌려드릴지 막막했거든요."라고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그랬구만! 혹시 안 올 수도 있겠다 싶어서 포기하고 막 일어서려던 참이었네. 아무튼 잘 왔어. 저기 가서 차나 한 잔 하게!"라며 편의점 옆 구내 커피숍으로 앞장서서 걸어갔다.

"아니 그럼 다 알고 일부러 기다리신 거예요?"

윤주가 계산대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면서 물어보았다.

"뭐가 그리 급한가? 자 천천히 숨 돌리고 이야기 좀 하세. 내가 시간 로스난 거 충분히 계산해 줄 테니까..."

노인은 라테를 시키고 카드로 값을 치른 다음 창 가 빈자리로 뚜벅뚜벅 걸어가서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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