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막 2장 - 유산

12일 오후 - 유산

by 이윤수

윤주가 잠시 기다렸다가 주문한 커피 두 잔을 들고 노인의 앞자리에 앉았다.

"아이고 좋다."

윤주가 내려놓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노인은 커피 향을 잠시 음미한 후 말문을 열었다.

"사실은 내가 자네를 좀 시험을 했네. 아까 자네 고모님 이야기를 들으며 자네 심성은 어느 정도 짐작은 했네만 다시 한번 더 확인을 해보려고 일부러 돈을 두고 내렸네."

"시험이요? 왜요?"

윤주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살짝 기분이 상하기도 해서 좀 퉁명스럽게 물었다.

"아참, 이름이 뭔가? 이름도 미처 못 물어보았네."

"윤주요. 강윤주!"

윤주 목소리에 아직 불신이 묻어있었다.

"이 사람 화가 났나 봐. 미안해. 성질내지 말고 내 말 좀 들어봐. 사실은 말이야 내가 돈이 좀 있거든...

그런데 내 인생도 얼마 남지 않아서 그 돈을 어디에 보람되게 쓰려고 계획을 세웠는데 믿고 맡길 사람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우연히 자네를 만난 거야."

"그런 거라면 자제분이나 다른 가족이 더 적임이 아닐까요?"

"아, 그 놈들? 내 돈만 탐을 내는 놈들이라, 나 죽고 나면 그 돈을 어떻게 쓸지 믿을 수가 없어.

내가 보니 자네는 내 돈을 내 뜻대로 제대로 쓸 것 같아. 당장 택시운전은 그만두고 나랑 일 좀 하세."

"예? 무슨 일이요?"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한 윤주가 되물었다.

"응, 요즘 자네 고모님처럼 말년에 돈이 없거나 돈을 날리고 고생하는 분들이 많지 않은가? 그리고 아들 딸 조카 피붙이도 다 칼만 안 든 강도들이고....

그래서 내가 시니어 공제회를 하나 만들었어. 일단 내 돈을 다 넣어서 기금을 만들고 그걸로 투자수익도 내면서 노인 요양 및 주거시설을 만들었어."

"요즘 그런 것도 여기저기 꽤 많던데요?"

"응, 그런 건 다 돈이 몇 억 있어야 들어갈 수 있고 또 중간에 부도가 나서 돈만 뜯기는 경우도 많아."

"그럼 무료로 누구나 입소를 하게 하나요? 그러려면 돈이 엄청나게 들 텐데요?"

"오, 내가 사람을 제대로 봤구먼! 벌써 경영 마인드가 있어! 좋아 좋아!

당연히 무료로는 아니지!

일단 가진 돈을 넣고 들어오는 것은 맞는데 다만 금액에 차등을 두지는 않아.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있는 돈 모두를 넣은 후 생존 시에는 은행 신탁에 안전하게 맡겨놓고 쓰다가 사망 시 남은 금액은 가족에게 상속을 하지 않고 공제에 귀속시켜서 기금으로 삼는 거야. 대신 돈이 떨어졌다고 쫓아내지도 않으니 안심을 할 수가 있지. 일종의 보험의 성격도 있고 다른 사람과 상부상조하는 공제의 성격도 있지."

"그럼 돈을 숨기거나 돈 없는 사람들만 들어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

"그렇다면 할 수 없고! 그러면 수용인원에 제한이 생기는 거고 반대로 기금이 많이 쌓이면 좀 더 많은 사람이 혜택을 누릴 수 있겠지! 하지만 내 돈으로도 어느 정도는 규모는 되고 이미 취지에 공감하여 돈을 상당히 내고 들어온 분들도 많아서 아무 문제는 없어."

"오, 대단하군요! 그럼 돈을 많이 낸 사람과 못 낸 사람의 차별은 없나요?"

"당연히 있지!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나? 다만 누구라도 일단 들어오면 평생 기본적인 보살핌은 받을 수 있지! 그게 근본 취지이니까!"

"그럼 서로 들어오려고 하겠네요? "

"응, 그래서 가족관계와 재무상태 등을 가입신청 때 엄격하게 심사를 하지. 아마 자네 고모님 같은 경우는 바로 입소가 가능할 거야. 어쨌든 가입과 탈퇴는 언제든지 자유롭고...

아무튼 지금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으니 너무 신경 쓸 필요는 없고 자네만 동의한다면 바로 나를 이어받을 경영수업을 하세. 월급도 아마 지금 수입보다는 나을 걸세.

어때? 한 번 해볼 텐가?"

"그렇다면 저야... 좋지요!"

"그래 잘 생각했네. 그럼 내일 여기로 출근하게."

노인은 주머니에서 명함을 하나 꺼내서 건네준다.

'실버 공제회장 김만복

경기도 가평군 강촌길 12

010-123-4428'

윤주가 명함을 받아 들고 보는 사이에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어조를 바꾸고 엄숙하게 말한다.

"그 돈 이리 내놔. 이제 계산은 분명히 해야지. 공금이니까..." 라며 손을 내민다.

윤주가 봉투를 내밀자 안에서 5만 원권 4 장을 꺼내서 윤주에게 주고는 나머지는 자기 주머니에 넣는다.

"이만하면 충분하지? 2시간 일 못한 거 20만 원!"

"아.. 예 예."

윤주가 엉거주춤 일어서며 돈을 받자

"세상에 공짜 없다."라고 말을 하고선 획 돌아서서 문 밖으로 나간다.

윤주는 잠시 노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아, 주차비...'라고 중얼거리며 서둘러 주차장으로 나간다.

차를 몰고 나온 윤주는 바로 택시 회사로 가서 사표를 냈다.

워낙 이직이 잦은 직업이라 다른 곳에 취직이 되었다는 윤주의 말에 배차담당은 별로 놀라지도 않는다. 사무실 문을 열고 나오니 마침 다른 기사가 세차를 마치고 막 일을 나가려는 참이다.

"기사님! 평창동이요!"

윤주가 호기 좋게 외치고 뒷자리에 타자 그 기사는

"아, 좋지! 메다기 좀 있다가 꺾을까?"라며 시동을 건다.

"아니, 지금 꺾어. 이왕이면 할증으로!"

"어쭈 강 씨 오늘 계 탔나? 로또가 됐나?"라며 웃는다. 그래도 할증은 안 하고 '주행'을 누른다.

잠시 후 집에 들어선 윤주는 세상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맞이하는 고모에게 외친다.

"고모! 걱정 마세요! 이제 편히 여생을 즐길 일만 남았어요.

고모 덕분에 저도 좋은 데 취직도 했어요!"

무슨 소리인지 어리둥절해하는 고모를 윤주가 번쩍 안고 방을 빙빙 돈다.

"야가 갑자기 왜 이라노?"

영문도 모르고 착한 조카에게 안긴 고모는 손으로 윤주를 살짝 밀며 내려달라는 시늉을 하지만 입가에는 함박웃음꽃이 활짝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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