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 조작
‘탕 탕 탕..'
누군가가 단단한 박달나무 지시봉으로 철창살을 두드리는 소리에 윤주는 잠을 깼다. 지시봉이라기보다는 몽둥이로 더 자주 쓰이는 굵고 굴곡이 있는 원기둥형 나무봉이 속 빈 철봉을 두드리는 소리는 타악기 소리처럼 공명을 내며 붉은 벽돌로 사방이 막혀있는 교화소 건물 내부를 메아리쳐 울린다.
"윤주 동무! 날래 날래 아침 먹어라요! 오늘 할 일이 많으니까니 꾸물대지 말고 서둘러라."
추레한 카키색 정복을 대충 입고 붉은 테가 둘려진 모자를 삐딱하게 눌러쓴 안전원이 식판을 철창 아래 배식구로 밀어 넣으면서 채근한다.
평소에 나오던 강냉이 밥과는 달리 오늘은 웬 일로 하얀 쌀밥에 고기 국이 있고 제대로 붉게 양념이 된 김치도 수북이 담겨 있다.
윤주는 식판을 반갑게 받아서 밥을 입 안에 가득 퍼 넣고 우물우물 씹으면서 물었다.
"준비 다 됐나요? 오늘인가요?"
"나야, 자세히는 모르지! 날래 밥 먹고 저기 양복으로 갈아입고 나오라우!"
그동안 낯이 익고 제법 친밀해진 안전원이 지시봉으로 벽에 걸린 짙은 남색 양복을 가리켰다.
윤주가 납치될 때 입고 왔던 옷이다. 처음 교화소에 끌려들어 와서 지금의 갈색 수용복으로 갈아입은 후로 한 번도 입어본 적이 없는 옷이다.
윤주가 베이징 출장을 갔다가 북한 공작원에게 납치되어 평양 인근의 교화소에 갇힌 지 어느덧 두 달 여가 흘렀다.
[2달 전]
윤주가 근무하는 증권회사가 중국 주식을 취급하게 되자 그 거래를 중개하기 위하여 중국 현지 증권사와의 업무협의차 윤주가 베이징에 출장을 오게 되었다. 그날도 일을 마치고 현지 증권사를 나와서 택시를 타고 숙소인 인근 호텔로 가는 도중에 그 택시기사가 갑자기 윤주를 총으로 위협을 하며 다짜고짜 윤주를 끌고 가서는 몇 번 차를 갈아타게 하고 이틀 밤낮을 달린 후 결국 여기 교화소에 처넣었다.
"아니, 대한민국 국민을 백주 대낮에 이렇게 납치해도 되나요? 아무리 서로 적대적이라지만 국제법에도 어긋나고 나중에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지 않나요?"
잡혀온 후 처음으로 심문을 받을 때 윤주가 항변을 해 보았다. 그러나 안전원은 씩 비웃으며 대답했다.
"우리가 바보인 줄 알아? 우리도 아무나 납치하진 않아! 너같이 뒤가 구려서 나중에 입을 놀리지 않을 놈만 고르지!"
"제가 왜요? 왜 뒤가 구려요?"
"흐흐흐.. 너 오정숙 과장이랑 잤지? 회사 돈도 빼돌리고..."
"아니 그걸 어떻게?"
"다 아는 수가 있으니까 거짓말할 생각하지 말고 잘 협조해. 그러면 돌아갈 길이 생길 수도 있어. 아니면 평생 여기서 노동교화나 받다가 죽든지..."
"아니에요. 그건 나중에 다 돌려주려고..."
"야! 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나중에 돌려주어서 괜찮으면 세상에 횡령 사건이 하나도 없겠다. 너 그 돈은 어떻게 빼냈어?"
"고객 예탁금 중에서 일부를 회사계좌에 입금을 안 시키고..."
"그럼 고객들이 뭐라고 하지 않아?"
"저를 믿는 고객들 중에는 제게 투자를 일임하고 맡기는 사람이 있어서..."
"야.. 너 재주가 좋다 응?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겼네! 그래서 그 돈으로 뭐 했는데?"
"정숙이랑 만날 장소가 필요해서 오피스텔 전세 얻고 일부 같이 해외여행 갈 때 경비로 쓰고.."
"너희가 그러는 거 네 부모님은 알아? 오정숙의 남편은 당연히 모를 테고..."
"몰라요."
윤주가 대답을 하면서 고개를 푹 숙인다.
"그래 잘했다. 하지만 세상 다 속여도 우리 북조선 해킹부대 눈은 못 속인다.
그동안 재미는 좋았어?"
안전원이 능글능글하게 웃는다.
"..."
윤주가 대답을 하지 않자
"이 간나가 좋게 대해주니까 같이 놀려고 그러는 줄 아나?"라고 호통을 치면서 지시봉으로 윤주의 어깻죽지를 후려친다.
윤주가 깜짝 놀라서 자세를 바르게 하자 안전원이 정색을 하고 말한다.
"우선 네 부모님과 정숙이에게 연결을 해 줄 테니 돈을 좀 받아낼 수 있어?"
"얼마나?"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최소한 미화로 오십만 불!"
윤주의 입이 벌어진다.
"그렇게나?"
"네 목숨 값인데 그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어?"
"예. 한 번... 노력은..."
"그래, 따라와!"
안전원은 윤주를 옆 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 안에는 전화기와 컴퓨터 그리고 잘 모를 무선 통신기구들이 한 벽면에 늘어선 책상 위에 있고 운용요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헤드폰을 쓴 채 뭔가 말도 하고 컴퓨터 자판도 두드리며 일을 하고 있었다.
안전원은 그중의 한 사람에게 윤주를 데리고 가더니 뭐라고 귓속말로 속삭인다. 그러자 그 통신요원이 전화기를 조작하고 연결이 되자 수화기를 윤주에게 넘겨준다.
수화기 너머에서 윤주의 어머니 목소리가 들린다. 반가움과 서러움에 감정이 격해져서 눈물이 나오려고 하고 목소리가 잠기지만 애써 진정을 하고
"여보세요.."라고 침착하게 말한다.
"아이고. 윤주가? 이게 우짠 일이고? 괜찮나? 어디고?"
"예. 괜찮아요. 아직 중국이요."
"그래? 그란데 왜 회사에서 널 찾고 난리가 났나? 난 무슨 일이라도 있는 줄 알았지!"
"아니에요. 집엔 별일 없어요? 아버지는요?"
"응, 별일 없다. 그럼 언제 오는데?"
"예. 일이 잘 풀리면 곧 갈게요. 회사에는 제가 따로 연락할게요."
"그래 그래. 괜찮다니 참말 다행이다. 난 무슨 일 났는 줄 알고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지..."
"걱정 마세요. 근데 집에 돈 좀 있나요? 좀 부쳐줄 수 있어요?"
"글쎄, 아버지한테 물어봐야겠지만 집에 돈이 남아날 날이 언제 있어야지! 어저께 고추 판 돈도 벌써 농약값으로 나가고 남은 게 없을 긴데..."
윤주가 난감해서 안전원의 눈치를 보자 안전원이 한숨을 쉬며 손가락으로 자기 목을 치는 시늉을 한다. 윤주가 그 뜻을 알아채고 전화를 마무리한다.
"알겠어요. 걱정 말고 계세요. 아버지에게도 잘 말씀드리세요..."
"그래. 알았다. 우야든동 몸 조심하고.."
"예. 끊어요!"
윤주가 수화기를 넘겨주자 이번에는 정숙에게 연결을 한다.
"과장님!"
"윤주 씨? 어디세요? 어떻게 연락을?"
"자세한 건 묻지 마시고 저는 괜찮으니까 돈 좀 보내주실 수 있어요?"
"어디로, 얼마 나요?"
"중국 계좌로 미화 50만 불 이요!"
"혹시 지금 이거 피싱사기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건 아니니까 걱정 마시고 송금 좀 해 주세요."
"글쎄. 어쩌나? 공금은 안 될 거고 저도 제가 융통할 수 있는 돈이 많지는 않아서..."
"얼마 정도 가능하겠어요?"
"글쎄요.. 다 긁어모으면 5만 불 정도... 그것도 외환관리법 상 최대 송금한도예요."
윤주가 안전원의 눈치를 보자 안전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지를 보여준다.
"예. 그럼 그거라도 보내주세요. 급해요. 중국은행 135-28-46927 Wang 계좌로 바로 좀 보내주세요."
"알겠어요. 정말 별일 없는 거지요? 회사에는 뭐라고 해요?"
"예. 중국에서 교통사고가 나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하고 대신 휴직계 좀 내주세요."
"그래요. 몸조심..."
"예. 저도요.."
윤주는 자신을 염려하고 최선을 다해준 정숙이 고맙고 그리웠다. 잠시 전화를 못 끊고 있자 안전원이 전화기를 빼앗아서 끊어버린다.
"아쭈 아주 영화를 찍어라!
따라와!"
안전원은 윤주를 좀 전의 그 취조실로 데리고 갔다.
"야, 너 증권사 직원이라고 해서 뭐 좀 있을 줄 알았더니 이거 완전 개털이네!
뭐 5만 불? 그걸로는 너 데리고 온 경비도 안 나오겠다.
넌 하는 수 없이 몸으로 때워야겠다. 그런데 몸도 비리비리해서 여기 노동을 얼마나 버텨낼지 모르겠다."
윤주는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인 채 안전원이 내뱉는 말을 듣고만 있다.
"야. 일어 서. 이리 와서 저기 좀 봐!"
윤주는 시키는 대로 일어서서 안전원이 가리키는 창살이 박힌 작은 창 밖을 내다보았다.
사람들이 농장에서 곡괭이와 삽으로 밭을 일구고 있었다. 하나같이 남루한 옷에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다.
"힘들어 보이지? 그래도 저긴 양반이야. 공장이나 탄광으로 가면 1년을 버티기도 쉽지 않을걸!"
윤주는 사람들이 애처롭기도 하고 자신이 처할 곤경을 상상하니 겁도 나서 그만 시선을 돌리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잠시 후 궁하면 통한다더니 절망 속에서 희망이 보이듯이 윤주의 머리에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있었다.
"저... 제가 돈을 좀 벌어볼게요! 오십만 불만 벌면 되나요?"
"어떻게? 무슨 좋은 수가 있어?"
"예. 근데 종잣돈이 좀 필요해요!"
"얼마나?"
"500억 정도요!"
"얘가 갑자기 돌았나? 500억? 북조선에 그만한 돈이 어디에 있으며 너에게 뭘 믿고 그 돈을 맡겨?"
"거의 확실해요. 저를 한 번 믿어보세요."
"그래 뭔지 한 번 들어나 보자."
"예, 500억으로 특정 주식을 사서 찌라시를 뿌리고 통정매매로 주가를 끌어올린 다음에 꼭대기에서 털고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한 50억은 단번에 벌 수가 있어요."
"50억? 그럼 5백만 불 이잖아! 되기만 하면 괜찮겠는데... 정말 그게 될까? 너 괜히 뻥치는 거 아니야? 그게 그렇게 말처럼 쉬우면 누가 안 하겠어?"
"그게 주가 조작이라서 함부로 못해요. 그렇지만 우리는 지금 그런 거 따질 때가 아니니까.."
"그게 네 전공이라 이거지? 알았어. 한 번 보고나 해보자. 기다려 봐!"
안전원은 윤주를 두고 밖으로 나갔다가 한참 후에 또 한 사람을 대동하고 다시 들어왔다.
"좀 더 자세히 설명을 해 봐!"
번지르르한 인민복을 입고 볼과 턱과 배에 살집도 있어서 꽤 높아 보이는 그 사람이 옅은 선글라스 너머로 윤주의 눈을 마주 보면서 말을 했다. 눈 빛이 날카롭다.
"예. 종목 선정이 가장 중요합니다. 너무 크면 500억 정도로는 움직일 수가 없고 너무 작으면 나중에 연기금의 자금을 끌어당길 수가 없습니다."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
인민복이 좀 짜증을 낸다.
"예. 먼저 증권계좌를 가명으로 몇 개 개설합니다. 그리고 호재가 좀 있는 적당히 건실한 상장 중견기업을 골라서 집중 매수를 해서 주가를 끌어올리는 겁니다. 그러면 다른 투자자들도 시장에 안 알려진 정보가 뭔가 있나 보다고 생각하고 따라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때 무조건 막 사 들이면 돈이 너무 많이 들고 혹시라도 나중에 일이 예상대로 안 되어 주가가 떨어지면 큰 손해가 날 수도 있으니까 우리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가격으로 우리끼리 올려서 사고파는 것입니다. 그러면 돈이 밖으로 나가지 않고 우리 손에서 돌고 도니까 최소한 손해를 볼 일은 없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주가가 올라가면 증권사와 연기금 자금이 들어옵니다. 지수를 추종하는 펀드와 연기금은 시가총액이 어느 정도 비율 이상이 되는 기업은 반드시 무조건 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다른 외국인 투자자도 들어오고요...
바로 그때가 우리는 팔고 나올 때이지요. 거래량이 적을 때 다 팔고 나오면 표시가 나고 주가도 폭락하니까 기다렸다가 기금이 들어와서 거래량이 많아졌을 때 눈치 못 채게 조금씩 매도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최소 10% 최대 50%도 먹을 수 있습니다."
"오호.. 그래? 정말 안전한 거 맞아?"
"제 이름으로는 안 되겠지만 북한의 조직력이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네요."
윤주가 자신 있게 인민복을 쳐다본다.
"그거야, 우리가 할 수 있지! 그래 가명 계좌는 몇 개나 필요한데?"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최소 10개!"
"알았어. 기다려 봐!"
인민복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밖으로 나갔다.
며칠 후 윤주는 북한의 통신 요원들을 통솔해서 주가 조작에 나섰다. 북한 요원들은 똑똑했다. 윤주가 설명을 해주면 알아서 척척 일을 처리하고 심지어 예기치 못했던 상황이 발생해도 임기응변으로 처리하기도 했다.
윤주가 지목한 배터리 원료 제조 기업의 주가는 마침 전기차 시장의 활황에 힘을 입어 거침없이 상승했다. 조금 주춤하려고 하면 윤주의 계좌들이 받쳐주니까 며칠 만에 거의 100%가 오르고 예상대로 연기금과 지수 펀드 자금도 몰려 들어왔다.
윤주는 평균 70%라는 어머어마한 평균 수익률을 내고 빠져나왔다. 무려 350억 원을 벌었다.
윤주의 공작팀과 인민복은 신이 났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어지는 실적이 없자 주가는 다시 떨어지고 그 손해는 개인 투자자와 기금이 고스란히 떠안았다.
"이제 저 집에 가도 되지요?"
관련 요원들이 참석한 조촐한 축하 연회가 열린 자리에서 윤주가 안전원에게 물어보았다.
"윤주 동무! 이번에 공로가 많았는데 충분히 치하를 하라는 부장동지 지시가 있어서.."라고 안전원이 말끝을 흐린다.
"아뇨. 전 이만 됐으니까 얼른 집에 갈래요!"
"저.. 그게.."
"뭐예요? 혹시 나보고 또 하라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요? 이미 목표량을 초과 달성 했지 않나요? 이건 약속과 다르잖아요! 난 더는 못해요!"
"윤주 동무! 그러지 말고 한 번만 더..."
"됐어요. 난 죽어도 못해요."
윤주는 말을 내뱉고 연회장을 박차고 나왔다. 하지만 윤주가 이것을 미리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안전원은 윤주를 쫓아 나오면서 거의 빌다시피 사정을 한다. 윤주는 못 이기는 척하고
"알았어요. 딱 한 번만 더요!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에요!"라고 한다.
다음 날 윤주는 다시 요원들과 함께 1천억의 종잣돈으로 좀 더 큰 기업을 2개 골라 주가 조작에 착수했다. 이번에도 역시 예상대로 주가는 올랐고 윤주의 조작팀은 상당한 수익을 내고 주식을 처분한 후 시장에서 빠져나왔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매도대금이 인출되지 않았다. 지난번 주가 조작사건 이후로 금융당국이 의심거래를 지켜보고 있다가 윤주 팀의 가명계좌들을 동결한 것이었다.
"제가 서울에 가서 해결을 해야 합니다."
윤주가 인민복에게 말했다.
"괜찮겠어?"
인민복이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어본다.
"아까 말씀드린 실명 인증만 타이밍에 맞추어서 올려주십시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혼자는 힘들 테니 여기 최 동무와 동행을 하도록 해. 그리고 서울에 가면 또 다른 현지 협조자가 접선을 해서 도와줄 거야."
'도와주기는 개 뿔! 감시하는 거겠지! 그런데 서울에도 협조자가 있어? 그건 미처 예상을 못했는데... 조심해야겠다.'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윤주는
"알겠습니다. 그럼 더 좋고요!"라고 웃으며 답변을 했다.
그리하여 드디어 윤주가 서울로 출발할 날이 온 것이다.
[현재]
윤주는 안전원과 함께 북경을 경유하여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 도착했다.
"최강호 씨! 한국에 와 보니까 어때요?"
윤주가 인천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리무진 버스를 타고 옆 좌석에 앉아있는 안전원에게 귓속말로 물어보았다. 안전원은 대답은 안 했지만 차창 밖 풍경에 연신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이 무척 놀라워하는 것 같았고 버스가 서울로 진입을 하자 활기차고 세련된 건물과 사람들의 모습에 감명을 받은 듯했다. 윤주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강호 씨, 혹시 여기 남고 싶지 않으세요?"라고 안전원에게 제안을 했다. 안전원은 놀라서 펄쩍 뛴다.
"무슨 소립니까. 얼른 임무 완수하고 귀국해야지요. 안 그러면 윤주 씨도 큰 일 납니다."
안전원은 은근히 윤주를 위협한다. 그러나 윤주는 위축되지 않고 계속 설득한다.
"사실은 제가 강호 씨를 좀 속였는데요 저는 다시 돌아갈 생각이 없고 강호 씨 가족들도 원하면 바로 서울로 올 수 있도록 조치를 해 놓았어요."
"뭐라고요? 그게 어떻게..."
"사실은 요원 중에 한 명을 제가 포섭을 했지요. 돈으로 안 되는 건 없더군요. 그 분과 그분의 가족도 서울로 올 겁니다. 대신 이번에 동결된 자금은 북으로 보내지 않을 겁니다. 이미 한국의 금융당국과 협의를 마쳤어요. 지금은 강호 씨 결단만 남았어요. 정 싫으시면 혼자 돌아가세요."
"그러면 나도 숙청될 텐데..."
"그럼 저를 죽이고 올라가시든지요..."
능청스러운 윤주의 말에 안전원은 멍하니 윤주의 눈을 바라본다.
"한 가지 걸리는 건 현지 협조자인데 일단 접선을 해서 누군지 신분을 알고 체포해야 한다고 하네요."
"그건 내가 있어야..."
"예. 그래서 지금 미리 강호 씨의 결단과 협조를 구하는 겁니다."
최강호는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상황전개에 한동안 판단과 결심을 못하고 있다가 버스가 남대문 정류소에 도착하자
"저도 남한 사정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니고 사실 동경을 하고 있었지요. 가족 등 여러 가지가 걸려서 망설였지 저라고 이남에서 자유롭고 풍요롭게 살고 싶지 않았겠습니까?"라며 말문을 뗐다.
"잘 생각하셨어요. 제가 정착을 하실 수 있게 경제적으로도 도와드리겠습니다. 당국과도 협조가 되어있습니다."
두 사람은 버스에서 내려 상생증권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윤주는 자신이 근무하던 것이라 익숙하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 사무실로 올라갔다.
직원들이 오랜만에 출근한 윤주를 반기며 인사를 한다.
"다치셨다더니 괜찮으세요? 출장에서는 언제 돌아오셨어요?"
사람들의 안부에 건성으로 대답을 하고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오정숙 과장을 만났다. 간난신고(艱難辛苦) 끝에 재회를 한 서로의 기쁨은 감추고 두 사람은 곧바로 금융감독원에 전화를 넣었다.
"예. 오전에 신청한 실명인증 건으로 전화드렸습니다. 예. 준비되었습니다.
아, 아직 안 올라왔다고요?
확인하고 다시 전화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오정숙이 최강호를 바라본다.
최강호가 휴대전화를 꺼내서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예. 도착했습니다. 실명인증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아닙니다. 아무 문제없습니다.
예. 예."
최강호가 전화를 끊고 의미심장하게 오정숙을 바라본다.
오정숙이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이 설명을 한다.
"됐네요. 저 자가 실명인증을 올리면 당국에서 IP를 추적해서 체포를 할 겁니다. 이제 우리 할 일은 다 했습니다."
오정숙이 말을 마치자 윤주가 정숙에게 다가가 살며시 손을 잡은 후 놓고 돌아서서
"강호 씨 저기 앞에 평양식 냉면 잘하는 곳이 있는 데 가서 저녁 먹읍시다. 긴장이 풀리는지 배가 고프네요! 아, 그전에 강호 씨 옷도 한 벌 사야겠어요!"
그러자 강호가 일부러 상을 찡그리며 대답을 한다.
"아, 일 없습니다. 냉면이야 평양에서 먹는 게 진짜지... 서울 건 다 가짜란 말입니다!"
그 말에 윤주와 정숙이 마주 보며 환하게 웃는다.
통창 너머 남대문을 붉게 물들이는 서울의 노을이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