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막 - 하늘 호수

10일 - 하늘 호수

by 이윤수

깊은 잠에 빠져있던 윤주는 가톡 전화벨 소리가 여러 번 울리고 나서야 겨우 잠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충분히 피로가 풀리지 않았는지 아직 눈이 시리고 눈꺼풀이 무거워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실눈을 떠보니 아직 캄캄한 밤이다. 손을 더듬어 머리맡 어딘가에 있을 휴대전화를 찾는다. 요즘엔 언제 어디서나 어디를 가든 휴대전화를 애첩이라도 되는 듯 끼고 다닌다. 심지어 아무리 피곤해도 vtube를 틀어놓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고, navi 뉴스를 보며 괄약근과 아랫배의 긴장을 풀고 있지 않으면 똥도 안 나와서, 화장실과 침실도 반드시 휴대전화와 동행한다. 어린아이들이 엄마와 떨어지면 근거 없는 불안감에 휩싸이는 것보다 더 심각한 이 '스마트폰 분리 불안증세'는 선옥과 헤어진 이후로 더 심해졌다.

전화기에서 나는 소리와 불빛이 베개와 이불 틈에서 스며 나온다.

한 손으로 전화기를 집어 들고 다른 한 손으로 눈을 비비며 화면을 보니

'선옥이 전화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수신 버튼을 누른다. 시각은 새벽 1시 37분이다.


[1달 전]


선옥이 '하늘 호수의 나라'로 여행을 떠난 것은 한 달 전이었다.

그 나라에서는 물질적 가치보다 정신적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산다고 했다. 우리처럼 돈에 얽매여 아웅다웅 살지 않고 세속을 초월해서 마음의 평안을 찾으며 여유롭게 산다고 했다. 그 나라 사람들은 자연과 교감하며 영혼이 충만한 삶을 지향한다고 그랬다. 그래서 그 나라에 반드시 가보고 싶다고 했다. 윤주는 말렸다. 우선 자신이 장기 여행을 할 돈도 없었지만 또 장기 휴가를 낼 만큼 복지가 잘 된 회사에 다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만일 한 두 달 장기 휴가를 낸다고 하면 팀장은 보나 마나 아예 사표를 내라고 할 것이 뻔했다. 윤주가 하는 택배 분류 업무는 그다지 숙련이나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기존 인원을 굳이 붙잡을 이유도 없다. 신입을 뽑아서 며칠만 훈련시키면 바로 대체가 가능하기 때문에 윤주가 큰 소리를 칠 입장은 아니었다.

그에 비해 선옥은 그동안 자기가 다니던 강남의 성형외과 상담사 일을 그만두었기 때문에 처신이 훨씬 자유롭다. 어쩌면 그래서 그 여행을 하기로 결심했는지도 모른다. 비록 평소에도 가지고 있던 일생의 버켓리스트라고는 했지만, 만일 새로 들어온 더 젊고 예쁜 상담사에게 치여서 떠밀리듯이 사표를 내지 않았다면 선옥은 여전히 예전처럼 강남 병원에서 근무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신나게 직장 생활을 계속했을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법적으로는 의료기관이 영업활동을 할 수 없지만 실질적으로 강남에 있는 대부분의 성형외과나 치과는 간호사 자격증도 없는 상담사들이 컨설팅을 넘어서서 판촉과 영업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역시 그다지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일이 아니라서 안정성이 없고, 어쩔 수 없는 질병 치료가 아니라 선택적 미용시술이라 갑질을 하는 환자(손님)들의 비위를 맞추어야 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에 따른 정신적 스트레스가 심했다.

혼자 선옥을 보내는 것이 싫어서 처음에 만류를 하던 윤주는 선옥의 심정을 이해하고 '그래 어쩌면 휴식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들어 선옥의 여행에 더 이상 반대를 하지 않았다. 하긴 선옥 자신이 그동안에 번 돈과 약간의 퇴직금을 다 털어서 여행을 간다는 데 그저 남자친구 신분인 윤주로서는 더 이상 저지할 힘도 명문도 없었다.

"같이 가면 더 좋을 텐데... 아쉽다."

큰 케리어 두 개에 짐을 눌러 담으면서 옆에 서서 지켜보고 있는 윤주를 보고 선옥은 이렇게 말을 했지만 그녀의 몸짓과 표정에는 아쉬움보다는 여행에 대한 기대와 흥분이 더 크게 느껴졌다.

"수건도 다 싸야 할까?"

벌써 몇 번째 짐을 꾸렸다가 풀고 있는지 모르겠다.

"글쎄.. 수건 정도야 거기서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대답은 하지만 어차피 진짜 조언을 들으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윤주도 알기 때문에 애매하게 대답을 한다.

"그래, 혹시 모르니까 두어 개만 가져가자."

역시 예상대로 선옥은 자신이 이미 답을 가지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더 가지고 가고 싶지만 캐리어의 공간이 부족하니 어쩔 수 없이 수건 몇 장을 챙기고 나머지는 쓰레기 통에 넣으라고 윤주에게 건네준다.

두 사람의 애틋한 사랑과 함께 한 시간들이 묻어있는 정든 수건들을 한 장 한 장 들여다보니 그 폭신한 감촉이 윤주의 손에서부터 가슴으로 그리고 눈시울로 짠하게 젖어든다. 차마 매정하게 버릴 수가 없어서 수건을 들고 쓰레기 통 앞에서 머뭇거리던 윤주는

'내가 쓸까?'라고 생각하다가 집에서 혼자 그 수건을 쓰다가는 감상에 빠져 더 마음이 아파질 것 같아서 그만 과감하게 쓰레기 통에 쑤셔 넣었다.

같이 여행을 가서 산 돌 하르방 기념품도 냉장고 문에서 미련을 버리듯이 떼어내고, 첫 키스를 할 때 입었던 빨간 코트와 몇 년 전 크리스마스 선물로 윤주가 수줍게 내밀었던 선옥의 하늘하늘 속이 비치는 분홍색 레이스 속옷도 이제는 낡았다며 망설임 없이 윤주의 설렘 찌꺼기와 함께 쓰레기 통으로 들어갔다.

윤주는 이러한 물건들이 버려지는 것이 마치 용도 폐기되는 자신의 신세인 것만 같고 선옥과 곧 헤어진다는 슬픔을 더 실감 나게 해서 더 이상 지켜보기가 힘들었다.

"나 그만 갈래."

"어.. 그래? 조금만 더 하면 되는 데..."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선옥의 손은 짐을 정리하느라 여전히 분주하고 눈길은 다음에 챙길 짐이 어디에 있는지 찾느라 정신없이 방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천천히 해. 그럼 내일 7시에 봐. 12시 비행기라고 했나?"

"응, 공항까지 같이 가게?"

"당연하지. 짐도 무거운데.. 택시 부를까?"

"아니야, 요 앞에서 전철 타고 공항버스 갈아타면 돼."

"그래, 그럼 내일 봐."

[다시 오늘]


"응, 웬일이야? 한동안 연락이 없더니.."

"...."

전화기 너머에서는 아무 말이 없고 선옥이 흐느껴 우는 소리만 들렸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 있어?"

"...."

"왜 그래? 무슨 일인지 얼른 말해봐."

"나... 데리러 올 수 있어?"

선옥이 풀이 죽은 작은 목소리로 간신히 말한다.

"왜? 무슨 일인데?"

"나 돈이 하나도 없어."

"왜? 가지고 간 돈 벌써 다 썼어?"

"응, 나 사기당했나 봐."

"누구한테? 어쩌다가?"

"..."

"괜찮으니까 말해봐. 그래야 도와주지."

"여기서 어떤 남자를 만났는데 자기가 호텔도 소개해 주고 관광도 시켜준다고 해서 따라다녔는데... 어제 호텔주인이 자기는 돈을 안 받았다며 나보고 내놓으래."

"너는 돈을 줬는데?"

"응, 그 남자에게 줬지. 식비, 경비, 호텔비, 교통비..."

"그 남자는 뭐래?"

"몰라. 갑자기 사라졌어. 연락도 안 되고..."

"같이 잤어?"

"...."

윤주는 화가 나서 전화를 당장 끊고 싶었지만 옛 정이 남아 있고 당장 궁지에 빠진 선옥이 애처로워서 애써 감정을 억눌렀다.

"그래서 내가 뭐랬어? 그 사람들 믿지 말라고... 그 사람들은 자기 유리한대로 말을 언제라도 손바닥 뒤집듯이 바꾸고 죄의식도 없고 아예 우리 같은 선악이나 도덕관념도 없다고 하지 않았어?"

"아니야. 이 사람들 엄청 느긋하고 친절하고 절대 화를 안 내."

"하이고 답답하네. 그게 다 할 일도 없고 가진 것도 쥐뿔이나 없으니까 그러는 거지. 그저 당장 자기 편한 대로 살고, 모두 말로 때우며 자기만족하는 거야. 문화와 사고방식이 그따위니까 또 그렇게 더럽고 미개하고 가난하게 사는 거고! 그렇게 당하고서도 몰라?"

"..."

"거기서는 아이들이나 천민들은 사람 취급도 안 해. 거기 남자들의 눈에는 여자들도 그냥 자기 욕망을 채우는 수단에 불과하다고 내가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어?"

"알았어. 이제 와서 어떡하라고! 도와주기 싫으면 말아!"

선옥도 윤주의 잔소리에 짜증이 났나 보다. 윤주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그 나라 사람들을 두둔하는 선옥이 미웠지만 애써 한 번 더 참았다.

"알았어. 답답해서 한 말이야. 그래서.. 지금은 어디야?"

"눈바이 호텔이야. 밀린 호텔비 내고 나면 귀국할 비행기 삯이 없어."

"그럼 내가 당장 가서 몸으로 도와줄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그냥 돈을 부쳐줄 테니 비행기 타고 바로 귀국하는 게 더 빠르고 경비도 적게 들지 않겠어?"

"그럴 수도 있겠네.."

"그래, 송금이 가능한 은행 계좌 하나 개설하고 번호를 알려줘. 거기 지금 몇 시야?"

"밤 10시."

"그럼 내일 아침에 바로 은행에 가서 통장 만들고 문자로 보내줘. 얼마면 되겠어?"

"비행기 표는 한 400달러면 될 거 같아."

"알았어. 내가 백만 원 환전해서 부칠게."

"고마워."

"그래. 너무 걱정 말고 얼른 자. 그럼 모레면 한국에 오겠네? 표 끊으면 도착시간 알려줘. 공항에 나갈게."

"고마워."

"그래. 잘 자."

"잘 자."

전화를 끊고 윤주가 혼자 중얼거린다.

"하늘 호수는 개뿔이나.. 말은 멋있다. 말로는 뭘 못할까? 제길! 언제나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거지! 하긴 우리도 예전엔 보릿고개 때 굶어 죽으면서도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으니 대장부 인생이 어떻고 저떻고 헛소리하던 적이 있었지..‘

갑자기 윤주의 세상이 밝아 보이고 헬조선이라던 지금의 대한민국이 엄청 살기 좋은 나라로 느껴졌다.

오랜만에 편안한 꿀잠을 잤다.


이전 13화9막 - 이번 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