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 열린 하루
프레임 5
통나무 틀이 벌어진 벽 틈으로 들어온 얇은 아침 햇살이 바람에 나부끼는 커튼처럼 너울댄다. 자세히 보니 햇살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방 안의 공기가 이리저리 흐르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공기가 아니라 공기 중에 떠다니는 작은 먼지와 희뿌연 연기 입자들이 환한 햇빛에 반사되고 있는 것이었다.
햇살이 뻗어가서 닿는 끝부분에서 박제된 사슴의 눈이 반짝인다. 목 아래 부분 가슴의 일부까지 절단되어 머리가 온전히 벽난로 위에 걸려있는 사슴은 갈색 털이 풍성하고 나뭇가지처럼 갈라진 회백색 두 개의 뿔이 우람하다. 유리로 만든 눈은 투명한 각막과 동공, 홍채의 채색까지 정밀하게 되어있고 귀가 쫑긋 솟아있으며 코 끝과 입술의 검은색 피부에 윤기마저 도는 것이 마치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 생명체처럼 보인다.
'이 사슴을 사냥하고 또 정성껏 박제를 한 사람은 이 동물을 죽인 것일까 아니면 썩어 없어질 몸을 영구히 살려서 멋지게 보존해 놓은 것일까? 아니면 그저 자신의 유전자에 새겨진 수렵인으로서의 공명심을 과시한 것일까? 이집트 파라오의 미라로부터 시작된 인간의 육체와 삶에 대한 집착이 애처로울 정도이지만 적어도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비명횡사한 사슴의 입장에서는 별로 반갑지 않은 인간의 문화일 것이다. 하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산장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장식일 수도 있겠네. 하긴 이렇게 사냥에 대해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걸 보니 내가 농경민족의 후손이 맞긴 맞나 보다.'
막 잠에서 깨어난 윤주는 자신의 상념을 떨쳐버리려고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건물은 벽과 기둥, 문, 대들보, 지붕의 안장까지 모두 나무판자나 통나무로 되어있고 화재 방지를 위해 벽난로 위의 좁은 벽만 둥근 호박돌을 회반죽으로 쌓아 굴뚝까지 이어놓았다.
벽난로 안의 타다 남은 재에서 아직도 실타래를 거꾸로 푸는 듯이 연기 한 줄기가 굴뚝 안으로 빨려 올라가고 있다. 지붕 위로 솟아있는 굴뚝은 방 안과 밖의 온도와 기압 차이로 인해 마치 흡입기가 달린 것처럼 신기하게 방 안의 공기를 빨아들이고 있다. 약간 매캐하면서도 자극적이지 않은 연기냄새가 은근하게 방 안을 채우고 있다. 덕분에 체취나 음식냄새 같은 다른 잡 냄새는 나지 않아 오히려 상큼하다.
그래도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어서 윤주는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키고 손을 뻗어서 나무틀로 된 유리창을 활짝 열어젖힌다. 시리면서도 상쾌한 아침공기가 실바람을 타고 왈칵 밀려와 밤새 고여있던 실내공기를 단숨에 밀어내고 윤주의 콧구멍 안까지 쓸어내린다.
그 바람에 창을 가리고 있던 짙은 파란색 밸벳 커튼이 젖혀지고 환한 햇빛이 윤주의 얼굴에 내리쬔다. 차광이 잘 되는 두꺼운 천에는 늦잠을 자는 손님을 위한 주인장의 배려가 엿보이고 그 위에 하얀 자수로 새겨진 잔잔한 프랑스 왕실 백합문양은 소박한 오두막에 품격을 높여준다.
갑작스러운 햇살의 습격에 윤주는 눈이 부셔서 실눈을 뜨고 두 팔을 들어 기지개를 켜면서 늘어지게 하품을 한다. 등과 어깨의 근육이 땅기면서 조금 통증이 있다.
'너무 많이 잤나?'라고 중얼거리며 윤주는 침대에서 내려와 마룻바닥에 놓여있는 털이 복슬복슬한 실내화를 신는다. 폭신폭신하고 뽀송뽀송한 면이 발을 감싸는 느낌이 좋다. 허리를 굽혔다가 펴고 상체를 좌우로 비틀며 간단한 체조를 하자 몸이 풀린다. 여전히 팔을 좀 휘저으면서 발걸음을 옮겨 냉장고 문을 연다. 피자나 탕수육 등 이미 조리가 되어서 데워서 먹기만 하면 되는 음식도 있고 육고기, 새우 같은 신선한 요리 재료가 다양하게 있으며 과일과 채소도 풍성하다. 맥주와 와인, 청량음료도 있고 옆에는 양념과 에스프레소 커피머신도 보인다.
'오, 완벽하군!'
윤주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우선 냉수를 꺼내 한 모금 들이킨다. 시원한 물이 밤새 건조했던 입과 목젖을 적시고 식도를 타고 내려가면서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를 깨우고 행복 호르몬이 발산되어 기분이 좋아진다.
싱크대에서 물을 한 컵 받아서 커피머신에 붓고 캡슐을 넣은 다음 dark brew 버튼을 누른다. 쿠르르르… 물이 끓어올랐다가 관을 타고 내려오는 소리가 들리고 곧 고소한 커피 향이 퍼져 나온다. 갈색 커피가 쪼르르 컵에 흘러내리자 윤주는 얼른 한 모금을 맛본 후 냉장고에서 샌드위치와 포도를 꺼내서 쟁반에 받친 후 커피잔과 함께 들고 문 밖으로 나선다. 문 밖에는 좁다란 나무데크가 있고 등받침이 뒤로 젖혀진 등나무 의자가 있다.
쿠션은 없었지만 앉으니 몸이 비스듬하게 반쯤 누워지는 자세가 편안하다.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문다. 야들야들한 식빵에 싸인 부드러운 계란 그리고 상큼한 토마토, 아삭아삭한 상추의 청량감이 입 안에서 환호를 한다. 새콤 달콤한 포도를 송이째 들고 입으로 포도 알을 뜯어먹으니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이 왜 항상 포도를 먹고 있는지 그 이유룰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시장기가 조금 가시자 여유롭게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바라본다. 호숫가 버드나무의 늘어진 가지에는 연한 연두색 새싹들이 한창 돋아나고 있다. 호수를 끼고돌아 산으로 이어지는 오솔길가에 사열을 하듯이 눌어선 자작나무 가지에도 부드러운 새 잎들이 작은 손가락을 빼꼼빼꼼 내밀어 하얀 수직 줄기들과 어우러져서 멋진 색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추운 겨울에 큰 위안을 주던 침엽수의 짙푸른 잎들도 다음 한 겨울을 지킬 연한 녹색 새 잎과 임무교대를 준비하고 있다. 저 여린 잎이 어떻게 저 딱딱한 나무껍질을 뚫고 나오는지 또 썩은 흙 속에서 화사한 꽃의 색소와 달콤한 과일의 과즙이 올라오는지 자연은 신비롭기 그지없다. 같은 원소를 가지고 조합만 약간 다르게 하면 이토록 다양하고 새로운 물성이 생겨난다니 설명을 들어도 경이롭기는 마찬가지다.
동물도 식물도 무릇 모든 어린것은 아름답고 나약하고 귀여워 보인다. 그것이 연약한 어린것들의 생존전략이든 뭐든 상관없이 멀리 보이는 산 언덕에 융단처럼 펼쳐진 연녹색 새 잎들의 향연이 주는 기쁨은 눈과 마음과 몸에 행복과 활력을 주는 고마운 존재들이다. 綠陰芳草 勝花時라고 노래한 옛 시인의 감성에 새삼 공감이 간다.
그러고 보니 꽃들도 여기저기 피어있는 것이 보인다. 매화나 개나리는 이미 져버렸고 진달래와 철쭉이 양지바른 곳에 피어있다. 윤주는 일어나서 관목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진달래 꽃을 몇 개 따본다. 진분홍이라기보다는 옅은 보라색에 가까운 얇은 꽃 잎 안에 수술 몇 개가 삐쭉 내밀고 있다. 꽃은 식물 생식기의 노골적 도발이라는 어떤 시인의 외설스러운 생각이 갑자기 미워진다.
'참 진달래 꽃은 먹을 수도 있다고 하던데... 세상에 花煎이라고 꽃을 먹는 낭만적인 민족이 한민족 외에 과연 또 있을까?'
요즘엔 여러 가지 꽃 요리가 개발되고 난초 꽃을 요리의 장식으로 쓰는 것은 보았어도 이렇게 꽃으로 요리를 하는 전통을 가진 경우는 많지 않을 것 같다. 어쩌면 그것이 극심한 보릿고개 춘궁기를 넘기고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었다기보다는 자연을 사랑하는 선조들의 풍류였으면 좋겠다. 아니 그럴 것이다. 진달래 꽃에 과연 무슨 실질적인 맛이나 영양가가 있겠는가? 그러기에 김소월 시인도 가시는 님에게 허다한 다른 꽃 대신에 굳이 진달래를 뿌렸겠는가?
윤주가 꽃잎을 들여다보고 만지작거리며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영변의 약산 진달래 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라며 시 구절을 읊조리다 보니까 이어서 송창식의 '선운사'라는 노랫가락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나를 두고 가시는 님아 선운사 동백꽃 숲으로 와요.
떨어지는 꽃송이가 내 맘처럼 하도 슬퍼서
당신은 그만 당신은 그만 못 떠나실 거예요.'
갑자기 윤주의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세상에 이처럼 처절하게 이별을 슬퍼하고 아쉬워하는 마음이 또 있을까 싶어서 누군지 모를 그 사람의 처절한 아픔이 느껴진다.
윤주의 망상을 깨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푸드덕 소리를 내며 물새 두 마리가 윤주 머리 위로 날아오더니 날개를 고정하고 활강을 하면서 고도를 낮추면서 발을 뻗고 미끄러지듯이 호수 물에 착수한다. 잔잔한 물 위에 파문이 길게 퍼져나간다. 청둥오리 두 마리다. 그런데 암 수 한 쌍일 것이라는 예측과는 달리 두 마리 다 목덜미에 진한 청록색 윤기가 흐르는 수컷이다. 다른 암 수들은 이미 짝을 지어 노란 병아리들을 끌고 물 위를 헤엄쳐 다니는데 저 불쌍한 놈들은 아직 짝을 찾지 못했나 보다. 그래도 혼자는 외로워서 수컷끼리라도 같이 다니는 것이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더 안타깝기도 하다.
물 위를 이리저리 다니며 자맥질을 하는 물새들을 따라 시선을 쫓아가다 보니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걸어 다니는 소금쟁이도 보이고 짙은 날개에서 무지개빛 광택이 나는 물잠자리도 보인다.
어릴 때 잠자리를 잡으면 꼬리 끝을 떼어내고 작은 나뭇가지를 대신 꽂아서 잠자리가 비칠 비칠 이상한 궤적을 그리며 날아가는 모습을 보며 재미있어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렇게 짓궂고 잔인했을까 싶다. 하긴 그 외에도 개구리 뒷다리를 떼어내서 구워 먹고 딱정벌레를 잡으면 머리를 돌린 후 배를 하늘로 향하게 거꾸로 두어 날개를 윙윙거리며 제자리 맴을 도는 것을 보며 즐기는 친구들도 있었다. 개체 발달이 계통진화를 따른다는 이론이 맞다면 인간은... 적어도 남자는 원래 잔인하고 야만적인 족속이었나 보다. 지금의 문명과 동정심은 학습된 것이 분명하고...
물에 좀 더 다가가 손을 담가본다. 물이 맑고 차갑다. 신발을 벗고 몇 발자국 물 안으로 들어가서 걷다가 갑자기 충동적으로 웃통을 벗어 젖혀 옷을 물 밖으로 던지고 물속에 몸을 담갔다.
'앗 차가워.'
처음에는 물이 시렸지만 조금 지나니 그런대로 견딜만했다. 고개만 물 밖에 내밀고 발 다리를 교대로 뻗고 오므려 천천히 개구리헤엄을 치다가 자세를 바꾸어 배영을 한다. 팔은 스트로크를 하지 않고 물속에서 팔과 다리만 가볍게 첨벙첨벙 움직여 주면 몸이 물 표면에 떠오르는 변형된 배영이다. 힘도 들지 않고 편안하게 부력이 주는 안락함을 느낄 수 있어서 윤주가 특히 좋아하는 자세다. 그렇게 물 위에 둥실둥실 뜬 채로 푸른 하늘과 흘러가는 흰 구름을 보면 마치 하늘을 날아가는 듯한 희열을 느낄 수 있다. 사람들은 남녀노소 대부분 하늘을 날거나 물놀이를 하는 것을 신나게 즐긴다. 아마도 지구에 태어나서 평생 중력의 노예로 살다가 부력과 양력의 도움으로 중력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자유로운 해방감을 몸으로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리라.
솔개 한 마리가 까마득하게 높은 곳에서 원을 그리며 날고 있다. 상승기류를 타고 있는지 날개조차 움직이지 않는다. 포식성 조류는 빠른 방향전환을 위해 날개가 몸체의 앞 쪽에 달려있고 기러기처럼 장거리 비행을 하는 새들은 에너지 절약을 위해 큰 날개가 뒤로 치우쳐 있기에 멀리서 보아도 그 종류를 구분할 수 있고 비행하는 형태도 많이 다르다. 아마 근처에서 먹잇감을 찾고 있나 보다. 역시, 솔개는 활강을 멈추고 갑자기 윤주에게서 멀지 않은 풀 숲 속으로 내려 꽂힌다.
물속에서 좀 있다가 보니 배가 출출해진다. 윤주는 물 밖으로 걸어 나와서 진달래 꽃 몇 송이를 더 딴다.
'이게 참꽃이 맞나? 엄마가 개꽃은 독이 있어서 먹으면 안 된다고 했는데... 개꽃은 철쭉을 말하는 건가? 아니면 진달래꽃 중에도 못 먹는 게 있다는 말인가? 좀 더 배울 걸 그랬네...'
혹시나 해서 몇 송이만 따서 집 안으로 들어왔다.
밀가루와 식용유를 찾아보니 선반에 다 갖추어져 있다.
프라이 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가스레인지 위에 올린 다음 밀가루 반죽을 붓고 진달래 꽃을 살짝 얻으니 지글지글 익기 시작한다. 고소한 냄새도 나고 희멀겋던 색깔도 노릇노릇 맛있어 보이는 색으로 변한다. 아름다운 색은 먹기 좋은 색이고 녹색이나 불쾌한 색깔은 썩은 물체의 색이니 인간의 미감과 색감도 결국은 살아남기 위한 경험의 결과이지 種의 본능적 감각을 넘어서는 객관적이고 절대적 기준은 없나 보다.
'튀김 요리는 나뭇가지도 맛이 난다는데 어디 한 번 믿어보자.'
요리를 별로 즐기지 않는 윤주는 항상 요리에 자신이 없다. 거의 익은 것 같아서 프라이팬을 들고 손에 반동을 주고 튀겨서 화전을 멋지게 공중도약 시킨 다음 반대쪽으로 뒤집어 안착시킨다. 재미있다. 이제 다 익었다. 불을 끄고 접시에 담은 다음에 젓가락으로 떼어서 한 입 맛을 본다.
'이런, 소금 간을 안 했네!'
아무 맛도 없고 밍밍하다. 하는 수 없이 익은 화전 위에다 맛소금을 조금 살살 뿌린다. 다시 한 입 맛을 본다. 그런대로 먹을 만하다. 냉장고에서 콜라와 바나나를 꺼내서 접시와 함께 들고 다시 밖으로 나온다. 호숫가 벤치에 앉아서 소풍 기분을 만끽해 본다.
어느새 콜라의 단 냄새를 맡았는지 벌과 나비가 모여든다. 정찰벌인지 한 두 마리가 콜라 캔 입구 주변을 윙윙거리다가 호수 건너 아카시아 꽃이 하얗게 피어있는 숲을 향해 날아간다. 바람결에 연한 아카시아 향기가 실려온다. 윤주는 진한 백합이나 장미 향보다는 연하고 부드러운 아카시아 향기를 더 좋아한다. 노랑나비 한 마리도 날개를 팔랑거리다가 노란 나리꽃으로 날아간다.
윤주가 먹다가 떨어뜨린 음식 부스러기에 개미들이 꼬인다.
'대단한 놈들이다. 어떻게 알고 벌써..
지구상에 가장 성공적으로 번성한 동물은 인간이 아니라 개미라더니... 과연 그 명성이 헛소문은 아닌가 보다.'
개미들은 어디에 선가로부터 와서 입에 먹을 것을 하나씩 물고 군대가 행진을 하듯 줄을 지어 하나 둘 하나 둘 다시 어디론가 부지런히 간다. 개미도 베짱이도 다 자기 방식대로 잘 살고 있는데 인간들은 괜히 자기 기준으로 다른 동물들을 좋은 놈 나쁜 놈 어리석은 놈 현명한 놈이라고 평가를 한다.
개미들의 행렬을 쫓아가다 보니 또 다른 곤충들이 보인다. 이슬을 구슬처럼 매달고 있는 거미줄도 있고 그 거미줄에 걸린 운 나쁜 파리, 그 파리를 거미줄로 칭칭 감고 체액을 빨아먹고 있는 운 좋은 거미도 있다.
예전에 거미는 왜 거미줄에 걸리지 않는가를 궁금해하다가 소용돌이 원에만 끈끈이가 있고 방사형 연결 거미줄에는 끈끈이가 없어서 거미는 끈끈이가 없는 곳만 밟고 다닌다는 설명을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나서 정말 그런지 관찰을 시작했다. 그러나 거미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거미는 기다림의 달인이다. 눈이 있지만 눈으로 세상을 보지 않고 거미줄의 진동으로 세상을 느낀다. 미동도 하지 않고 있다가 먹잇감이 거미줄에 걸려서 파닥거리면 그 방향으로 정확하게 달려간다. 물론 지뢰밭을 피하듯이 끈끈이 줄을 밟지 않고 빠르게 움직인다.
요즘에는 자연에서 힌트를 얻은 발명품이 유행이라 벽을 자유자재로 타고 오르는 게코도마뱀 발바닥의 미세 구조를 응용한 접착제도 있고 거미줄의 나노분자 모형으로 가볍고 강한 섬유를 만들기도 한다는데…
‘가만, 자율주행 자동차를 만들 때 굳이 인간처럼 시각 이미지에 의존해서 수많은 카메라를 설치하고 그 방대한 데이터를 처리할 것이 아니라 박쥐처럼 고주파를 쏘아서 그 반향으로 주변을 인식하면 더 간편하고 데이터 용량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겠다. 또한 프로그래밍을 할 때도 거미줄처럼 loop구조로 할 것이 아니라 nod를 jumping 하면 더 빠르게 반응처리를 할 수 있겠다. 일단 아이디어를 메모해 놓고 회사에 가서 본격적으로 모델을 만들어 보자.’
윤주가 생각을 정리하고 일어선다. 그 와중에도 옆에 있는 포플러 나뭇잎에는 어느새 알에서 깨어난 산누에나방 애벌레가 기어 다니고 그 애벌레를 쪼아 먹는 노랑지빠귀도 폴짝폴짝 가지 사이를 날아다닌다.
조금 더 가다 보니 다람쥐 한 마리가 땅바닥에 죽어서 누워있는데 금방 죽었는지 부패가 되거나 구더기가 끓지 않고 잠든 것처럼 아주 평화로운 모습이다. 자연 속에서 이렇게 온전한 주검을 보기란 쉽지가 않다.
‘까악 깍' 어디선가 까마귀 소리가 들린다. 인간들은 그 외모가 흉측하다고 싫어하지만 실제로는 고마운 자연의 청소부들이다. 하지만 좀 더 따지고 보면 세균과 전염병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예전에는 경험적으로 까마귀가 있는 곳은 피하는 것이 사체와 그에 관련이 있는 감염병을 회피하는 현명한 선택이었을 것이니 까마귀를 흉조라고 기피하는 것이 나름 이유가 있다.
잠시 후 독수리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가 덩치가 더 작은 까마귀 서너 마리에게 쫓겨서 줄행랑을 친다. 하긴 둥지와 먹이를 지키려는 작은 새들의 극성 앞에는 큰 몸집도 소용이 없다.
어느덧 해가 높이 떠서 양지쪽은 뜨겁다. 그늘로 자리를 옮길까 하다가 집 안으로 들어가서 물과 쿠키, 사과를 꺼내 작은 배낭에 담는다. 다시 밖으로 나와서 오솔길을 따라 호수를 끼고 등산로에 접어든다.
숲 속에 난 길은 겨우 사람 하나 다닐 정도의 좁은 폭이지만 등산객의 발길로 다져진 듯 흙바닥이 평평하고 장애물이 없어서 걷기에 편안하다. 길 가 호수물 위에서는 잔잔한 물결이 산들바람에 일렁이며 햇살에 반사되어 비늘처럼 반짝거리고 이따금씩 물 위로 펄쩍 뛰어오르는 물고기도 있다. 물수리가 물 위로 스치며 지나가더니 물고기 한 마리를 발가락으로 낚아채서 둥지로 솟아오른다. 새의 발가락에 매달린 하얀 물고기는 꼬리지느러미를 여전히 푸드덕거리고 있다.
그리 빽빽하지도 않고 적당한 간격과 키로 자라난 각종 활엽수들로 이루어진 숲은 시원한 그늘과 더불어 산책하기에 알맞은 채광과 환기를 제공하고 있다. 이따금씩 캐노피를 뚫고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이 어둑어둑한 숲 그늘에 신비로운 분위기를 선사한다. 숲도 나이를 먹는다. 산불 등으로 숲이 사라지면 처음에는 풀이 자라는 초지가 되고 그다음에는 키가 작은 관목 숲, 이어서 양수림인 활엽수, 마지막으로 그 그늘에서 자라는 침엽수가 숲을 차지하게 된다. 지금 이 숲은 주로 활엽수림이고 작은 침엽수들이 돋아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인간의 일생으로 치면 한창 장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때가 생태적으로 보면 생명력이 가장 왕성하다.
그래서인지 숲이 품고 있는 다른 생명들도 많은 것 같다. 각종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다람쥐와 청설모도 부지런히 나무를 탄다. 아직 도토리나 잣이 나올 철은 아닌데 무엇이 저렇게 분주한지 모르겠다. 어쩌면 작년 가을에 숨겨둔 도토리를 캐내러 다니는 것일 수 있다. 다람쥐는 도토리를 숨겨둔 곳을 수백 곳을 기억할 수 있고 가끔은 다른 다람쥐가 숨겨놓은 것을 훔치기도 하고 또 그것을 막기 위해 속임수로 엉뚱한 곳에 숨기는 척하기도 한다. 어치 같은 새들도 나무 열매를 숨겨서 저장하기도 하는데 가끔 잊어버리고 못 찾은 것들이 이듬해 싹을 틔워서 나무의 번식을 돕는다.
꽃과 벌, 개미와 진딧물 같이 마치 의도적인 것 같아 보이는 이러한 공생관계를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자연의 조화가 너무 경이롭다. 과연 인간은 자연과 공생을 하고 있을까 아니면 기생을 하고 있을까? 보기에 따라 또 정의하기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일방적으로 착취하는 기생이라면 결국엔 숙주를 죽이고 자신도 멸망할 것이기에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연과 공생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인간집단들의 생각과 이해관계가 워낙 복잡하기 때문에 합의된 해결책을 찾고 실행에 옮기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그러다 실패하면 다른 수많은 종들처럼 멸종하는 것이고… 인간은 성경에서 말하듯이 만물의 영장이 아니고 지구라는 행성의 일시적 거주자이기에 인류의 영속을 위해 보장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걷다가 보니 평지가 끝나고 차츰 가파른 경사로에 접어든다. 바위 길도 나서는 걸로 봐서 정상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다. 바위는 주로 화강암이다. 한국의 산은 대부분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표토가 깊지 않아 나무가 깊게 뿌리를 내리기 어렵다. 덕분에 굳이 높은 산이 아니어도 웬만한 산은 숲과 바위가 어우러진 멋진 산악의 경치를 만들어 낸다. 수도에서 한 시간 거리에서 암벽 등반을 할 수 있는 나라는 아마 한국 이외에는 거의 없을 것이다.
마침내 정상이다. 역시 바위 덕분에 정상에 나무가 없어서 사방의 경치가 훤히 내려다 보인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나무들이 빽빽하게 늘어선 숲이 마치 너른 잔디밭처럼 펼쳐져 있다. 뛰어 내려서 팔을 저으면 훨훨 날아갈 수 있을 것 같다. 떨어져도 푹신할 것 같기도 하다. 호수에서 피어난 물안개가 골짜기를 타고 오르면서 구름이 된다.
시원한 산 바람에 땀을 식히며 윤주는 바위 위에 앉아 싸가지고 온 간식을 먹고 물을 마신다. 다시 한번 온몸의 세포들이 조물주에게 감사기도를 드린다.
땀이 식자 썰렁함이 조금 느껴진 윤주는 다시 하산 길에 접어들었다. 다시 내려올 걸 왜 힘들게 올라갔을까? 허허 그건 아니지. 배가 고파질 걸 왜 밥을 먹느냐는 질문만큼이나 의미 없는 소리이고 한 편으로는 왜 사느냐는 심오한 답을 요구하는 엄청난 의문이기도 하다. '산이 거기 있으니까'는 도전충동만을 설명하는 궁색한 답이고 '내가 살아있고 삶의 행복은 종착점이 아닌 여정'이라는 것이 더 적절한 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렇게 생각하니 산을 오르고 내려오는 것이 힘들지가 않고 더 즐겁게 느껴진다.
오두막에 당도하니 서쪽 하늘에 선홍 빛 노을이 아름답다. 호수물에 반사된 구름은 더욱 예쁘다.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자니 그 빛이 시시각각으로 변하여 짙어지고 점점 어두움이 스멀스멀 주위를 감싼다. 하늘 색도 점점 어두워지면서 초승달이 보이고 샛별도 나오고 별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한다.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데 햇빛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제법 초롱초롱하다. 은하수는 한자로는 하늘의 강이란 뜻이고 영어로는 Milky way 즉 신의 가슴에서 흘러나온 젖이란 뜻이지만 실제로는 태양 같은 별이 5천억 개 이상 모여있는 은하라니 그 크기가 상상이 가지를 않는다. 우주에는 그런 은하가 또 천억 개 이상 있다고 하니 차라리 하늘은 아름다운 동화와 꿈과 신비의 영역에 그냥 두는 것이 더 좋을 것 같기도 하다.
집 안으로 들어와 탕수육을 데워서 저녁을 먹고 벽난로 앞에 앉아 커피를 한 잔 더 마신다. 참나무 장작이 타닥따닥 소리를 내면서 타고 따스한 불기운이 얼굴과 가슴을 덥힌다. 붉고 희고 푸른 불길이 너울댄다. '촛불의 미학'이라고 촛불빛을 주제로 책 한 권을 쓴 가스똥 바슐라르라는 철학자도 있었듯이 일렁이는 불꽃은 그 변화무쌍한 움직임 때문에 사람을 상념에 빠지게 만든다.
윤주도 어린 시절의 추억부터 시작하여 지금의 고민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것을
'아니야. 잡념은 좋지가 않아. 그 잡생각을 없애려고 스님들이 참선을 하고 신부 수녀님들이 묵상을 하잖아! 오늘 참 즐거웠고 행복했어. 보람되고 감사한 또 하루였어!'라고 생각하며 포근한 침대에 몸을 눕히고 부드러운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