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주말이라 술을 마시고 좀 늦게 들어왔더니 아침에 일어나기가 힘들어서 늦잠을 자고 있는데 아내가 새벽부터 곁에서 청소기를 돌리고 세탁기를 돌리고 주방에서 무엇을 하는지 그릇을 달그락 달그락거려서 도무지 잠을 편히 잘 수가 없다. 짜증이 나서 도대체 왜 그러냐고 했더니 오늘 장모님 생일이라 처갓집에 가야 한단다. 점심때쯤 좀 천천히 가면 안 되냐고 했더니 처남과 약속이 어쩌고 하면서 얼른 일어나라고 성화다.
어쩔 수 없이 일어나서 옷을 입으려고 보니까 내가 쉬는 날 편히 잘 입는 옷이 아직도 빨래통에 있었다. 세탁기를 돌릴 때 왜 같이 빨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뭐 속옷과 겉옷, 색깔 옷과 흰 옷은 따로 빨아야 한단다.
양치를 하려고 보니 치약이 안 보인다. 물건을 쓰면 제자리에 갖다 놓으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또 얘들이 아무 데나 휙 집어던져 놓았나 보다. 잔소리를 할까 말까 하는데 얘들 방에서 벌써 아내와 아들이 실랑이가 벌어졌다.
“아니 오늘 외갓집에 가야 된다고 예전에 말했는데 왜 또 못 간다는 거야?”
“아 친구랑 약속했단 말이에요. 오늘 교회에서 같이 기타 반주하기로 해서 내가 빠지면 안돼요”
왜 이렇게 다들 생각이 다른 걸까? 생각을 하나로 통일하면 싸울 일도 없고 좋을 텐데 별거도 아닌 일로 집에서도 밖에서도 서로 자기 생각이 옳다고 우기고 상대방이 이해심이 부족하다고 난리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래도 생각이 같으면 안 된다.’ 싸움을 불사하더라도 생각은 서로 달라야 한다. 그 이유는 생각이 모두 같으면 변화하고 발전할 것도 없기 때문에 항상 그대로 정체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가시지만 다행인 이 생각의 차이는 왜 생기는 걸까?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사람들 사이의 입장의 차이 때문이기도 하지만 심리적 요인 때문이기도 하다. 우선 한정된 자원을 두고 경쟁할 수밖에 없는 숙명인 사람들 중 사이에서 그 자원의 소유 또는 배분의 권한 즉 돈과 권력을 가진 기득권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세상을 보는 눈과 이해관계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사람들은 서로 동조화하는 이중성도 가지고 있다. 즉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이라고 말을 하지만 사실은 대중매체나 책이나 교육기관에서 영향을 받은 남들의 주장을 자신의 주관이라고 착각하기도 하고 단순히 주변 사람들의 판단을 유행처럼 쫓아가는 경향도 있다.
실제로 길이가 비슷한 막대기 중에서 가장 긴 것을 고르는 한 심리실험에서 피실험자는 다른 사람들이 미리 몰래 짠 대로 모두 짧은 막대를 고르면 덩달아서 눈치를 보고 짧은 막대를 고르는 현상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들은 명백한 사실에 대해서도 남들이 대부분 아니라고 하면 그에 휩쓸려 동조하는 경향이 있으며 역사적으로도 선동이나 풍문에 대중들이 움직인 사례들이 엄청나게 많다.
즉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의미는 물리적으로 사회적 네트워크를 이루어 집단적 이익을 추구한다는 뜻이면서 동시에 심리적으로도 집단적 사고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나의 생각이나 주장이 사실은 어디까지나 나의 독창적이고 고유한 것이며 어디까지가 남들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구분하기가 쉽지가 않다. 아니 어쩌면 나만의 생각이란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결국 모든 발명이 그러하듯이 우리의 생각도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변형, 조합, 가공한 것에 불과하다. 특히 meme 이론에 의하면 인간의 생각은 원래 어린 시절부터 받아들인 정보를 기억하고 모방함으로써 생성되는 것이 그 본질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모방된 생각이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집단적 사고를 통해서 발전해 가기 때문이다.
그러니 뉴턴이 겸손하게 ‘나의 업적은 별게 아니다. 그저 거인의 어깨 위에서 조금 더 멀리 바라보았을 뿐이다 “라고 한 것은 이미 당대의 유행어로 집단적 지성의 중요성을 당시 지식인들은 다들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처럼 집단지성은 분명 좋은 방식이다. 하지만 이 집단적 사고의 문제점과 함정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높다.
일찍이 플라톤은 대중은 愚衆이라고 하여 populism을 경계해서 현명한 지도자 즉 哲人에 의한 정치가 옳다고 보았다. 그리고 요즘 일부 정치인들이 여론을 ‘집단지성’이라며 추켜세우면서 다수는 무조건 옳다고 호도하며 자기주장을 정당화하고 이른바 ‘떼법’을 쓰고 있지만 이는 히틀러를 지지한 대중들처럼 집단적 사고의 오류를 저지를 수도 있고 선동에 의한 인민재판식 판결로 갈 위험성이 있다.
그래서 근대 민주주의의 기초를 다진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국회의원도 한꺼번에 다 뽑지 않고 중간선거로 조금씩 물갈이하고 상하원을 나누고 선거인단을 통해서 직접선거와 간접선거를 섞는 등 일시적 여론의 변덕을 경계하고 직접민주주의가 아니라 선출된 엘리트에 의한 권력분립으로 대의정치를 확립했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이처럼 집단지성이 제대로 작용하려면 먼저 다양성에 대한 인정이 필요하다. ‘하나의 의견을 가진 전문가보다 다양한 의견의 평균이 더 뛰어나다’는 것이 집단지성의 장점이지만 모두가 하나의 생각만을 갖는 만장일치는 오히려 그 집단지성의 장점에서 벗어나 있다. 즉, 집단지성을 활용해 의사결정을 할 때에는 만장일치의 환상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결국엔 생물의 유지 번성을 위해서 종 다양성이 필요하듯이 인간사회의 건강한 유지 발전을 위해서는 생각의 다양성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싫으나 좋으나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예전에는 모든 것들이 직접 접촉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그래서 그 범위도 가족 친족 마을 정도였지만 지금은 인쇄매체와 인터넷을 통해서 전 세계 사람들과 거의 실시간으로 집단 사고가 이루어진다. 더욱이 최근에는 utube 덕분에 거의 대면 접촉에 못지않은 정보와 의사교환이 가능해졌다.
다시 말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노동과 서비스의 도움이 없이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듯이 인정하든 거부하든 좋으나 싫으나 의식을 하든 못하든 off line에서건 cyber 상에서건 우리는 집단적 사고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 내가 이렇게 누군가가 작곡하고 연주하고 녹음한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다시 누군가가 읽으라고 공개를 하는 이유다.
거듭 말하지만 생각은 아주 같아서도 안 되고 아주 달라서도 안 된다. 너무 같으면 집단오류의 함정에 빠지고 너무 다르면 전쟁도 나고 지리 분열하여 사회유지가 안 된다.
그러면 같아도 달라도 안 된다면 도대체 어쩌라는 것인가? 그 답은 또 중용과 균형이다.
사람의 생각 즉 집단지성은 힘이 세다. 그러니 화약과 원자력처럼 사람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하는 양날의 칼이므로 항상 균형을 잡고 가야 한다.
아, 제정신을 가지고 제대로 살기란 역시 또 쉽지가 않다.
그래서 나도 결국 내가 조금 양보하고 아내와 아이도 설득을 해서 어른은 아침 먹고 출발하고 아이는 점심 후에 따로 오는 것으로 타협을 봤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