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좀 추운 날이라 잔뜩 끼어 입고 산책을 나섰다. 언덕길을 올라 공원으로 접어드는데 갑자기 커다란 누렁이 개가 껑충껑충 뛰어오더니 나를 보고 막 짖으며 달려들었다. 난 위협을 느껴서 손으로 개를 밀쳤다. 그러자 좀 떨어진 곳에서 어떤 건장한 남자가 내게 뭐라고 소리를 질렀다. 아마 개 주인인 듯했다. 당연히 사과를 하고 개를 제지해 줄 거라고 기대를 했는데 오히려 내게 소리를 지르니 황당했다. 그래서 나도 여기는 개를 묶고 다녀야 하는 on leash 구역이니 즉시 개를 묶으라고 맞받아쳤다. 그랬더니 이 남자는 더 화를 내면서 내게 한번 해보자는 거냐고 바짝 다가와서 고함을 쳤다. 이 인간의 주장은 여기는 off leash 바로 곁이고 내가 마스크를 써서 개가 짖었고 내가 개를 손으로 때렸으니 모두 내 잘못이라는 것이었다. 기가 막혔지만 치고받고 싸우면 나만 손해다 싶어서 똥 밟았다 생각하고 그냥 피해버렸다. 서로 옷깃만 스쳐도 사과하고 양보하는 게 생활화된 여기 사람들에게는 극히 드문 일이다. 정말 나도 여기 온 지 10년 만에 처음 당해보는 일이라 이런 게 인종차별인가 싶기도 하고 어디나 미친놈은 있나 보다 싶기도 하고 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고 보니 살면서 억울하게 당한 게 참 많다. 몇 년간 월급에서 차곡차곡 아껴서 모아둔 저축 전부인 6천만 원을 사업하는 친구에게 빌려주었다가 떼여버린 기막힌 사건, 직장에서 궂은일은 내가 도맡아 하고 승진은 아부꾼이 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고, 부모님 부양은 내 아내가 다 했는데 시골의 작은 집과 땅 한 밭뙈기 그 꼴꼴한 유산은 큰형이 다 가져가고, 학교에서도 보면 나쁜 놈들은 착하고 순한 애들만 골라서 괴롭히고, 사회에서도 이기적이고 뻔뻔한 놈들만 돈과 권력을 잡아서 약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것 같아 보인다.
아니면 원인과 결과가 바뀌었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지위에 있으니 그렇게 군림하고 힘이 없으니 당할 수밖에 없는 건가?
또 아니면 어릴 때 어떤 나쁜 선생님이 걸핏하면 아이들 둘을 불러내서 서로 번갈아 뺨을 때리게 시켰는데 갈수록 서로 세게 때리게 되었듯이 누구나 자기가 당하고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정말 예수님 말씀대로 언제까지나 왼뺨을 맞으면 오른뺨을 내밀고 겉옷을 요구하면 속옷도 내주어야 하나? 실천이 쉽지 않을 뿐 아니라 뭔가 이건 현실적인 해결책이 아닌 것 같아서 답답했는데, 그렇게 오른뺨을 내미는 것이 잘하는 짓이 아니라 오히려 악당을 키우는 것이니 선행에는 협조하고 악행에는 응징하는 것이 옳다는 극히 상식적이고 논리적이고 마음에 들면서도 과학적 근거가 있는 이론을 발견해서 기뻤다.
그 이론은 바로 니컬라 라이히니의 ‘협력의 유전자’에 있는데 핵심 내용을 인용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그래서 처벌은 남을 해롭게 하는 행위다. 하지만 처벌하는 사람이 직접 비용을 치르면서까지 집단 수준의 편익으로 보이는 것을 제공하니, 이는 친사회적 행위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남을 처벌하겠다는 결심은 투자 게임을 토대로 생성된 또 다른 공공재 게임이다. 이런 까닭에 처벌을 ‘2차 공공재’라 부르고, 처벌에 나서지 않는 사람에게 ‘2차 무임 승차자’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처벌을 협력의 한 형식, 그러니까 2차 공공재로 보면 ‘사람은 처벌받지 않으려고 협력한다’라는 주장의 순환 논법이 드러난다. 처벌은 대개 협력을 장려한다. 이는 인류 역사에서 우리가 어떻게 가까운 일가친척 너머로 협력의 범위를 넓혔는지를 설명하는 중요한 이유다. 하지만 우리가 왜 협력하느냐는 물음의 답으로 ‘처벌’을 말한다면 또 다른 난관을 마주하게 된다. 협력에서 문제가 되는 동기가 처벌 기제에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비용이 드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왜 처벌에 나서느냐는 물음에 대한 답을 하나 제시하자면, 우리가 명백히 처벌을 즐기기 때문이다. 친사회적 선행이나 다른 보람찬 활동을 할 때 뇌에서 활성화하는 보상 영역은 남을 벌할 기회를 잡을 때에도 밝게 빛난다. 아이들조차 못된 친구가 마땅한 벌을 받는 모습을 지켜볼 때 짜릿함을 느낀다. 꼭두각시 인형극을 이용한 연구에서 아이들은 못된 인형이 다른 인형한테 맞는 모습을 계속 보려고 진짜 돈을 지불했다. 실제로 우리 인간은 사회적 사기꾼을 벌하고자 하는 성향이 무척 강하다. 오죽하면 자신이 직접 연관되지 않은 상황에서조차 피해자를 대신해 사기꾼을 벌줘야겠다는 의욕을 느끼는 ‘제삼자 처벌 third-party punishment’ 현상을 보인다"
즉 왼뺨을 때린 사람에게는 똑같이 왼뺨을 때려주어야 사회에 정의가 실현된다. 잘못을 응징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마음 놓고 악을 저질러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사회가 무질서에 빠져 약육강식으로 궁극적으로 모두가 피해를 보게 된다. 사적인 처벌과 보복이 허용되거나 처벌을 즐기는 것이 제도화되면 피해가 증폭되어 부작용이 생기지만 법률과 제도로 적절히 제한된 처벌은 인간 사회에서 필수적이다. 모두가 조화롭게 서로 양보하고 도우며 살아가는 그런 아름다운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착하고 선한 사람들이나 종교적 이상으로 그런 세상을 꿈꾸는 것은 가능하고 그런 것을 지향하라고 가르치고 장려할 수는 있지만 제도적 처벌이라는 안전장치도 없이 그런 이상을 꿈꾼다면 늑대 굴에 토끼를 던져주며 모든 생명의 존엄과 평등을 지키라고 하는 것만큼이나 비현실적이고 어리석은 짓이다. 그래서 만인이 평등하리라는 사회주의 이상은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법과 제도와 이념과 신앙이 모두 있어야 의미가 있는 것이지 어느 하나라도 결여되면 사회는 망가진다. 인간은 꿈을 꾸지만 꿈을 깨고 나면 호혜주의와 처벌이 있어야만 서로 협력을 하며 그 협력이 있어야만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삶과 사회가 보장이 되는 것이다.
아이러니이지만 인간의 이기심이 인간의 생존과 사회의 변화 발전을 이끄는 에너지이므로 이 본능을 없앨 수는 없고 그것이 무절제하게 발현될 때 나타나는 전쟁과 폭력과 착취 등의 부작용을 적절히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법과 정부와 종교와 관습이 존재하는 것이다.
처벌이 만족을 주는 것이면서 동시에 비용이 드는 행동이라면 어쩌면 불의에 눈을 감고 스스로 마음의 위안을 얻는 행위는 이기적이며 비겁한 행동일 수 있다. 어쩌면 처벌을 하기 위해서 나쁜 배신자와 싸우다가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거나 에너지를 소모할 위험을 감수하는 행위가 더 이타적일 수가 있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세속적으로 보이는 처벌자가 어쩌면 우아하게 용서하는 자보다 인류의 장기적 이익에 봉사하는 더 훌륭한 사람일 수 있다. (국가가 다행히도 선이라면) 마치 애국심에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이 평화주의를 외치며 도망간 탈영병보다 위대한 사람일 수 있듯이...
"그러므로 선행은 위신 편익과 지위 편익을 안겨줄 도깨비방망이가 아니다. 사람들은 걸핏하면 선행의 동기를 추론해 지나치게 너그러운 행동을 이타 행동은 커녕 경쟁 행위로 받아들이기까지 한다. 이런 ‘오염된 이타주의 tainted altruism’ 효과 때문에 최선과 동떨어진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 니컬라 라이히니, 협력의 유전자
더욱이 지나친 관용은 다른 평범한 사람들을 부끄럽고 화나게 한다. 그래서 그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기도 한다. 특히 그 선행을 과시하거나 드러낼 때는 위선자로 보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않았는데도 배척을 당한다. 하지만 조금 더 내밀하게 보면 피해를 입히지 않은 것이 아니다. 이기적이며 처벌을 하는 일반 사람들을 상대적으로 나쁜 사람으로 보이게 만드는 피해를 입혔다. 그러므로 정말 오른 뺨을 내밀려면 왼 뺨도 영원히 남 모르게 내밀어야 한다.
아, 세상에는 천사만 있는 것도 악마만 있는 것도 아니며 항상 나만 억울한 피해자이고 남들은 다 나쁜 것도 아니다. 나도 상황에 따라 곧 천사이자 악마가 될 수 있다. 그러니 내 주변에 나쁜 놈이 많다는 것은 내가 약하다는 증거이고 내 주변에 좋은 사람이 많다는 것은 내가 빈틈을 보이지 않고 현명하게 잘 대처한다는 증거이다.
이제 마음이 편하다. 이제부터는 운 좋게 착한 사람을 만나기를 바라며 마음을 졸이거나 그저 착하게만 살려고 억지로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다음부터는 악당을 만나면 비겁하게 피하지 말고 당당히 맞서 싸울 힘과 용기만 기르면 된다. 단 내가 악당이 되지 않도록 항상 경계하면서… 자, 생각은 그만하고 운동 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