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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chelle Lyu Oct 24. 2020

어머니,   나의 어머니

먼길 떠나신 엄마

어머니

나의 어머니

 

 

My mother was the most beautiful woman 

I ever saw. 

All I am I owe to my mother. 

I attribute all my existence in life to the moral, intellectual 

and physical education 

I received from her.

 

담대함이 필요했다기억을 불러내는 데는.

그것은 슬픔이었다어둡고 섬뜩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새벽 어스름이 지나가는 시간에.


   “ㅇㅇㅇ씨 집인가요?”

   “네.” 

   “ㅇㅇㅇ씨가 교통사고로...” 


전화를 받으며 느꼈던 막연한 불안감이 공포가 되어 온몸을 엄습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어느 병원에요...”

   “잠실병원이요.”


거의 무의 시적으로 전화를 내려놓고 허겁지겁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내내 엄습해오는 막연한 불안감이 극한으로 치달아 안절부절 허둥대었다. 


   “빨리 좀 가 주세요. 빨리 좀요” 


택시 안에서 발을 구르며, 빨리 가달라고 기사 아저씨를 끊임없이 채근했다. 


엄마, 어머니는 영원한 여행을 떠났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영원한 곳으로... 

만남은 이별을 전제로 한다. 운명적인 삶의 순간은 만남과 이별의 연속선에 존재한다. 어머니와 마지막 말, 단 한 마디도 나누지 못한 채 이별을 고하고도 나는 아직 이렇게 여전히 그 삶의 연속선상에서 살고 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던 날, 어머니의 모습이 내게 영원히 지어지지 않는 짙은 한으로 남았다. 그 한은 내가 살아가는 나날 동안 도저히 지울 수 없는 거대한 고통이 되어 삶의 매 순간마다 짙은 획을 그으며 처참한 아우성을 드러냈다. 지금도 어머니가 떠나시던 날의 모습이 생생히 떠오른다. 잊혀지지가 않는다.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그날은 중간고사 기간이었다. 며칠째 밤을 새워 공부한 탓에 너무 졸려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비몽사몽인 내 시야에 엄마를 위해 큰 형부가 지어다 주신 보약을 들고 방문을 나서시는 엄마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엄마는 잠실 아줌마한테 다녀오신다고 하셨다. 잠실 아줌마는 엄마의 소중한 오랜 친구시고, 두 분은 친자매처럼 긴 세월을 하나가 되어 지내셨다. 그때 잠실 아줌마는 암 진단을 받으시고 투병 중이셨는데, 친구를 걱정하던 엄마는 ‘옳다구나! 이게 기회다’ 하시고는 사위가 지어온 보약을 그대로 들고 그 길로 아줌마에게 달려가셨다.  


   “잠실 아줌마한테 이 보약 좀 갖다 주고 오마. 너무 오래 아픈 게 마음에 걸려서... 이 보약 먹고 나았으면 해서...” 


큰 형부가 엄마를 위해 지어주신 보약은 개봉도 안 된 채 고스란히 엄마 손에 들려 잠실 아줌마한테 가고 있었다. 엄마는 엄마를 위한 보약이 엄마 자신보다도 아픈 친구가 드셔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셨다. 오래전부터 잠실 아줌마가 아프신 게 엄마는 너무 마음에 걸려 아파하셨기에. 


   “잘 쉬고 있어라, 곧 다녀오마.” 말씀하시곤 보약 상자를 들고 엄마는 방을 나서셨다. 난 눈을 감은 채, 잠결에 

   “네, 다녀오세요. 엄마” 건성으로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했다. 

언제나 엄마가 외출하실 때면 내가 엄마에게 늘 당부하던 그 한 마디, 

   “엄마, 차 조심하세요.” 그 소리를 그 날은 미처 꺼내지도 못했다.


그렇게 엄마가 나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벨이 울렸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불길한 마음으로 전화를 들었다. 가슴이 왜 그리 심하게 떨리던지... 손이 바르르 떨렸다. 그리곤 그 불안감은 곧 현실이 되어 온 마음을 사정없이 흔들어대었다. 


엄마는 잠실병원 응급실에 누워계셨다. 차 사고였다. 엄마가 버스에 치였다. 버스가 교차로를 건너던 엄마를 치었다. 엄마는 뇌를 다치셨다. 즉사였다. 병원에서 대면한 엄마의 머리는 핏줄이 파랗게 보일 정도로 빡빡 깎여져 있었다.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는, 파란 핏줄이 선명한 채로, 깎여진 빡빡머리에 무수히 많은 링거 바늘이 주렁주렁 꽂혀 있었다. 엄마 머리에는 피 한 방울의 미세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말없이 누워 계셨다. 입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엄마는 나를 볼 수가 없었다. 엄마는 나를 보지도 못했다. 엄마의 눈은 감겨있었다. 그때 가슴이 쿵 소리를 내며 덜컥 내려앉았다. 그 순간 난 이미 알고 있었다. 난 그때 이미 보았다. 알게 되었다. 단 한 방울도 들어가지 않던 줄어들지 않던 링거를... 그냥 매달려만 있는 링거를... 나는 병원복도 바닥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도저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숨이 막혀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가슴을 손으로 누르고, 때리고, 치고 치면서... 소리 없는 눈물만이 흘러내렸다. 알고 있었다. 결코 이제 엄마를 의사가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어떻게 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다 아는 사람인데도, 이성은 이미 모두 마비되어 소용없었다. 의사의 가운을 붙들고 병원 바닥을 기고 돌면서 대롱대롱 매달렸다. 


   “살려주세요. 우리 엄마 좀 살려주세요. 제발, 우리 엄마 좀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오빠가 달려오고, 언니가 달려오고... 모두 황망해 생각 없이 허둥대었다. 모두 고개를 흔들면서도 어쩌지 못하고 담담히 받아들이던 언니들과 오빠의 허허로운 몸짓이 끝내 잊혀지지가 않는다. 엄마는 말 한마디 못하시고 그렇게 세상을 떠나셨다. 그렇게, 엄마 가시던 그 날 진눈깨비가 하얗게 내렸다. 초겨울이 오고 있었다. 


   음력 10월 14엄마 세상 떠나신 날!!!


나는 잠시 스치는 바람에도 소리 없이 울어대었다. 누군가의 격려 어린 작은 숨소리에도 목이 메어 꺼이꺼이 울었다. 엄마를 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전하는 작은 한 마디도 소용돌이치는 거대한 설움이 되어 끝도 없이, 소리 없는 눈물만이 흘렀다. 


   “엄마!” 


아무리 불러도 엄마는 대답이 없었다. 침묵만이 되돌아왔다. 수 십 년이 지났다. 그 해 겨울 이후로. 겨울마다 엄마에 대한 기억의 단편들이 너무 아프게 가슴을 파헤치고, 세월과 더불어 진하게 아로새겨졌다. 난 엄마를 그렇게 가슴에, 마음에 품고 살았다. 때론 다 잊은 듯이. 때론 절대 잊어선 안 되는 듯이... 놓칠 수 없는 순간, 지나는 시간으로 그렇게.  


   “차 조심해요.” 미처 다하지 못한 그 한 마디는 그 이후로 가슴에 깊은 죄의식이 되어 내내 함께 거센 숨을 몰아쉬었다. 


엄마는 내게 이렇게 조용히 알려주셨다. ‘죽음은 삶 다음에 오는 것’이라는 것을. 먼 여행을 떠나는 것이라는 것을. 내가 죽는 날까지, 죽어가는 순간에도 나는 결코 엄마 가시던 그날의 모습을 잊지 못할 것이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사람은 누구나 한번 죽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도 가볍다’고 한다. 

엄마의 죽음은 나에겐 결코 태산 따위로는 비교도 될 수 없는 무거움이었다. 지금도 그 무거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나는 죄인이다. 아주 큰 대역 죄인이다. 형제자매 누구보다도 엄마에게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사랑을 받고 자란 ‘막내’, ‘막둥이’이기에 더욱 엄마의 죽음이 무거움으로 가슴에 남아있는지도 모른다.


엄마의 마지막 모습은 처연하리만큼 고우셨다. 그렇게 편안하고 환한 표정일 수가 없었다. 가족과 이승에서 마지막 인사를 하는 순간, 엄마의 모습이 너무나 평온해 야속하기까지 했다. 나는 엄마의 몸 전체를 하나하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군데라도 놓치지 않으려 꼭꼭 손으로 더듬었다. 하나하나 일일이. 마지막이었다. 다시는 볼 수가 없다. 엄마를, 나의 엄마를...


엄마의 몸이 내 손으로 전해지며 내게 마지막 말을 하시고 계시는 것 같았다. 


   “막내야! 막둥이야! 부디 잘 지내거라.” 


난 와락 엄마를 부여안았다. 오빠가 반사적으로

   “화진아, 막내 잡아라!”하며 나를 떼어내었다. 작은 언니가 나를 부여안고 우셨다.   

   “그러면 안 돼. 안 돼. 막내야. 그러면 안 돼. 엄마가 편히 못 가셔. 그러지 않아도 엄마는 너 때문에 발이 안 떨어지실 거야” 언니의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난 엄마가 너무너무 야속했다. 엄마를 도저히 보낼 수가 없었다. 엄마를 보낼 수 없는 내 처절한 마음은 아이러니하게도 어느새 엄마에 대한 원망으로 바뀌고 있었다. 내 마음이 아우성치며 묻고 있었다. 


   “엄마 왜, 어떻게 나를 혼자 남겨두고 엄마만 혼자 가실 수가 있으세요? 어떻게요?”


엄마는 어떻게 그렇게 그림같이 곱게 누워계실 수 있느냐고, 엄마가 어떻게 나를 두고 그렇게 가실 수 있느냐고, 나를 두고 어떻게 그렇게 고운, 평온한 평소의 모습으로 가실 수 있느냐고, 어떻게 나를 혼자 나두고 가시면서 그렇게 편안하시냐고 묻고 또 물었다. 내 숱한 몸부림치는 절규에도 엄마는 그저 말없이 누워계셨다.


사람은 영감의 동물이라고 말들 한다. 아마도 엄마는 다른 누구보다도 마음으로 세상을 사셨던 분이셨기에 삶의 매 순간을 더 진지하게 바라볼 줄 아시는 눈을 가지셨던 것 같다. 엄마가 세상을 떠나시기 며칠 전, 마치 자신이 이제 세상을 하직할 시간이라는 것을 아시는 듯 작은 형부에게 말씀하셨다.


   “고맙네. 나(엄마)와 처제(나)를 데려와 함께 살게 해 줘서. 고생 많았고 너무 미안했네. 철없는 처제까지 싸안아줘서 너무 고마웠네.” 그 말씀은 결국 유언이 되었다. 작은 언니는 엄마의 유언이 된 그 말씀을 되새길 때마다 울고 또 울었다. 


엄마와 나는 아버지 돌아가시고 단둘이 고향인 제기동에 살고 있었다. 오롯이 둘이 하나가 되어 생,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유난히 햇살이 빛나던 겨울 어느 날이었다. 집 앞에 트럭이 와서 서더니 작은 언니와 형부가 차에서 내리셨다. 작은 언니와 형부가 엄마와 나를 데리러 오셨다. 작은 언니와 형부는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와 엄마가 단둘이 살고 있던 제기동 집의 짐을 단숨에 모두 정리해 트럭에 실으셨다. 마지막으로 온갖 희로애락이 담긴, 엄마의 평생이 담긴 제기동 집을 휘둘러보시면서 엄마는 끝까지 눈물을 보이지 않으셨다.

엄마와 나를, 둘을 그렇게 살도록 나두기에는 형제들의 마음이 너무 편치 않았나 보다. 큰언니에게도 오빠에게도 결코 가지 않으신다던 엄마는 결국 형부의 끈질긴 권유로 작은 언니와 형부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렇게 작은 언니 집에 더부살이로 살게 된 엄마는 내내 이 사실이 마음에 걸리셨던 것 같다. 

돌아가시던 그날까지... 숨을 거두시는 그날까지...


작은 형부는 생각이 깊고 책임감 있는 분이셨다. 크고 깊은 생각을 가진 분이셨다. 그런 마음으로 엄마 돌아가시고 혼자 남겨진 나를 결혼하는 날까지 지켜주셨다. 나는 결혼하는 날 작은 형부 집을 나서며 짙은 눈물을 흘렸다. 엄마가 형부에게 하신 마지막 말씀처럼 


   “형부 감사했어요. 많이 미안했어요. 정말 고맙습니다.” 마음으로 말을 하며 대문 앞에서 한참을 서서 안방을 향해 머리 숙여 인사를 드렸다.


시간의 흐름이 불현듯 낯섦으로 다가온다. 무상하게. 무심하게.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고 그리고 또다시 언제나 엄마가 떠나시던 바로 그 날이 온다. 그리곤 늘 언제나처럼 난 똑같은 우문을 한다. ‘만일 엄마의 다친 머리에서 피가 났더라면 지금도 살아 계실까?’하고. 


언제나 해마다 초겨울의 바람이 불면, 어느새 떠나시던 날과 똑같은 엄마의 모습이 내 곁에 와 조용히 머문다. 푸른 옥색 비취색 한복을 곱게 입으시고... 먼 여행 준비를 마치신 엄마가 손짓을 한다. 멀리서.    


<어머니그리운 나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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