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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깊고푸른 Jan 25. 2021

믿을 수 없을 만큼 평범한 날들. 1

어쩌면 누군가와 함께 나눌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림을 좋아하지만 한 번도 정식으로 배워본 적이 없다.

미술을 전공한 작은형의 그림을 어깨너머로 본 게 전부였다.

나름 그림에 재능이 있어서 미대 진학을 생각하기도 했지만 이미 큰형이 대학에서 사진을, 작은 형이 미술을 전공하고 있어서 아버지의 월급으로 세 명이나 예체능계 대학에 다니는 것은 집안 형편상 무리였다.

은행원이셨던 아버지는 내가 상대를 졸업하고 안정적인 은행에 취업하길 원하셨고 나는 군말 없이 경영학과를 선택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경영학 전공 수업은 상상 이상으로 지루하고 재미없었다.

나는 대학시절의 대부분을 교지편집위원회와 학보사에서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만화를 그리며 보냈다.

다행히 운 좋게 현재의 회사에 취업해서도 몇 년간 사보에 만화를 연재했고, 사내 사진 서클 활동을 했다.


한때는 그림을 제대로 배워보자는 욕심이 들었던 적도 있었다.

퇴근 후에 들을 수 있는 직장인을 위한 미술강좌를 찾아 어렵사리 등록을 했으나 나는 정식으로 그림을 배울 운명이 아니었다.

첫 번째 강의가 있기 전날 오른팔의 척골이 골절되는 사고를 당했다. 3개월 이상 깁스를 해야 하는 부상이었다.

결국 다음날 미술학원에 가서 등록을 취소하고 강습료를 환불받았다. 그렇게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미술학원 등록은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핑계 같지만 그 이후로는 그림을 배우러 다닐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그래도 퇴근 후 잠깐 시간이 날 때나 특별히 약속이 없는 주말에는 집에서 그림을 그렸다.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리기도 하고, 두서없이 떠오르는 생각들이나 일상의 순간들을 주섬주섬 그렸다.

그렇게 그린 그림들이 한 장 두 장 쌓이다 보니 클리어 파일에 꽤 많은 그림들이 쌓였다.


희망차게 시작한 2020년은 얼마 가지 않아 코로나 19의 공격으로 엉망이 되었다.

집 문밖을 나설 때마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사람들을 피해 다녀야 했다. 잠깐이면 회복되리라 여겼던 일상은 일 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바이러스의 습격을 피해 회사들은 재택근무를 실시하고, 가게들은 문을 닫고, 사람들과의 약속은 기약 없이 미루어졌다.

사람들은 홈트레이닝을 하면서, 혼술을 하면서, 밀린 드라마를 보내면서 이 길고 긴 시간들을 견뎠다.

나 역시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고 시간이 조금씩 남아돌기 시작했다.

나는 집에 틀어박혀 그림을 그리면서 시간을 보냈다.


며칠 전 주말에 그림을 그리는 작업실로 사용하는 작은 방을 정리하다가 지난 10년이 넘게 그렸던 그림이 들어 있는 클리어 파일을 하나씩 열어보았다.

그 속에 나도 잊고 있었던 내 평범한 날들의 기억들이 그려져 있었다.

산책길에 원효대교 아래서 만난 보름달과, 종로타워 위를 헤엄치던 귀신고래의 꿈.

여행에서 만난 생경한 이국의 풍경들과 나른했던 휴일 오후.

길에서 마주친 이웃들.  술자리에서 낄낄대며 나누었던 동료들과의 대화.

오래 묵은 좋은 친구들과의 추억들.. 아름답고 따뜻했던 사랑의 기억들

믿을 수 없을 만큼 평범하지만 내게는 반짝이는 기억들이었다.

서툴고 모자란 그림이고, 영글지 못한 생각과 글이지만 어쩌면 누군가와 함께 나눌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연재를 시작한다.


           여의도 한강공원 둔치를 산책하다 원효대교 위로 뜬 보름달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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