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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깊고푸른 Apr 09. 2021

믿을 수 없을 만큼 평범한 날들. 52

그림은 나의 벗

처음에는 만화를 베껴 그리는 것에서 시작됐다

태권V와 마징가Z를 연습장에 그려서 나눠줬다 

친구들이 좋아했고 신이 나서 그림을 그렸다

그게 연습이 되었는지 교내 사생대회에서 학교 대표로 뽑혀 시교육청에서 주관하는 대회에 나가게 됐다

그 대회에서 금상을 받았는데 그때부터 학교에서 나는 '그림 잘 그리는 아이'가 되었다

아르누보에서 영감을 받은 그림...이라고 주장합니다...

중학생이 되면서 순정만화를 베껴 그리기 시작했다

명랑만화나 스포츠 만화보다 그림체가 마음에 들기도 했고 (그게 체코의 알폰소 무하 같은 아르누보 계열 작가의 그림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여학생들이 이런 그림을 좋아했다

여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남학생이 되는데 글과 그림이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이때쯤 눈치채게 되었다

인기 있는 남학생이 되는 것이 그 당시 나의 지상과제였기 때문에 고등학교 시절에는 '씨알'이라는 교내 문학동인회에서도 활동을 했다

문학 동인회에서는 봄과 가을에 시화전을 했는데 나는 순정만화풍의 그림을 그려 그 위에 시를 써넣는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어 걸었다. 당연히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대학생이 되어서는 무슨 변덕인지 여학생들에게 잘 보이는 것보다 사회문제에 관심이 더 많이 가게 되었다 

학보에 네 컷 만화와 시사만평 연재를 했는데 그러다 보니 그림체가 순정만화에서 캐리커쳐 중심의 선 굵은 그림체로 변했다 결국 주변에서 여학생들이 사라지고 남자들만 득실거리는 대학생활이 시작됐다

군대를 제대하고 난 뒤에는 학보사에 만화를 그린 경력으로 지역 신문에 금요초대석 시사만평을 연재했다 

꽤 많은 돈을 원고료로 받다 보니 그림을 제대로 배워 시사만화가의 길을 가볼까 잠깐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의 회사에 덜컥 합격을 하게 됐고, 안정된 직업과 괜찮은 연봉 앞에 만화가로서의 진로는 미련 없이 폐기 처분되었다


입사 후에도 그림과의 인연은 계속되었다 

사보에 만화를 연재하던 유명 만화가가 건강 문제로 연재를 중단하게 되면서 새로운 만화가를 찾던 중에 홍보실에 근무하던 입사 동기가 나를 추천한 것이었다

신입사원 연수 시절 일과가 끝나고 지역 신문사에 보낼 만평을 그리던 나를 기억하고 있었고 그래서 갑자기 내가 사보에 만화를 연재하게 되었다

꽤 오랜 기간 만화를 연재를 했고 지금은 만화가 아닌 그림을 연재하고 있다


요즘도 특별한 일정이 없거나 여유가 생기면 그림방으로 들어간다

잠깐 그리다 나올 때도 있고 필이 받는 날은 하루 종일 틀어박힐 때도 있다

밑그림을 그리고 쓱쓱 색칠을 하다 보면 복잡했던 마음이, 무거웠던 근심들이 한 구석으로 밀려난다

지쳐서 방전됐던 마음이 채워지고, 전구에 불이 들어오듯 새로운 힘이 충전된다

그림은 내게 위로가 되는 오랜 벗이고 에너지를 채워주는 좋은 친구이다

아마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그림을 그리고 주저리주저리 글을 쓰며 살 것 같다



매주 월~ 금요일 그림과 글을 올리고 토, 일요일과 공휴일은 쉽니다

성실하게 주 5일 근무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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