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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깊고푸른 Apr 20. 2021

믿을 수 없을 만큼 평범한 날들. 59

기억의 동네

추자나무 잎들이 무너진 마을 담장을 지나 바람에 흔들린다

봄바람이 서숲을 돌아 고요히 시간 속을 지나고 있다

나는 배롱나무 꽃그늘에 누워 길게 흘러가는 지상에서의 날들을 기억한다

햇볕이 좋은 날. 기억속의 그 동네

옥산서원과 양동 민속마을 가까운 곳에 외가가 있었다

사내아이 넷을 낳고 기르기에 힘이 부쳐서인지 가끔 어머니는 나와 작은 형을 외가에 맡겨두곤 하셨다

나는 울며불며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늘어져 어머니를 힘들게 만들었으나 어머니가 대구로 돌아가시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잠시도 쉬지 않고 동네를 돌아다녔다


외가가 있는 경북 포항시 기계면 현내리는 동네에서 진사댁이라 부르는 큰 외할아버지의 집 주변으로 형제들이 모여 사는 월성(月城) 이씨(李氏) 집성촌이었다

외가가 있는 곳에서 몇 걸음만 가면 멋진 소나무가 늘어선 서숲이 나왔고, 그 너머에 문중 소유의 도원 정사가 있었다 

도원 정사는 시인 이육사가 투옥과 모진 고문으로 망가진 몸을 추슬렀던 곳이라고 했다

수인번호 264(二六四)를 이육사(李陸史)라는 이름으로 바꿔 주신 분이 외할아버지라고 했고, 나는 육사가 다녔던 교남학교의 후신인 대륜 중고등학교를 나왔으니 아주 조금의 인연이 있다고 하겠다


나는 도원 정사 대청마루에 배를 깔고 누워 책을 읽으며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들을 보냈다

가끔 지나가는 동네 어르신들이 '니가 누고? 못골띠기 외손이가?'라고 물으시기도 했고, 배롱나무에 매달린 백일홍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깜박 잠이 들곤 했다



매주 월~ 금요일 그림과 글을 올리고 토, 일요일과 공휴일은 쉽니다

성실하게 주 5일 근무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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