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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홉 Apr 05. 2022

나, 트로트가수, 마트

동네 마트 사장님과 친해지는 이야기


  

작년 8월, 경기도에서 남해로 전입신고를 마치고 동네를 둘러봤다. 내가 사는 곳은 남면의 작은 마을이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시골 마을보단 좀 더 번화가 느낌이랄까. 우체국, 경찰서, 면사무소, 하나로마트, 농협 등 있는 건 있고 없는 건 없는 조용한 마을이다.  


마을엔 사랑방 같은 곳이 있다. 어르신들이 버스를 타기 위해 모이는 ‘중앙할인마트점’. 매표소이자 쉼터, 때로는 주민들의 사랑방, 그리고 마트.  뚜벅이인 나는 매번 마트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마트 주인 분과 자주 대면하게 되었다. (한쪽으로 묶은 뒷머리와 빨간 상의는 사장님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처음엔 버스 시간도 모르는 어리벙벙한 젊은 여자를 신기하게 보셨던 것 같다. ‘버스 안 오나요?.. 지나갔다고요?’ 이걸 몇 번이나 반복했으니 그럴 만도. (시골 버스는 진짜 어렵다. 시간표를 보는 것도 그렇지만 시간을 딱딱 지키지 않아 놓치는 일이 많다.)


버스에 적응을 할 무렵, 동네에서 문화행사를 여러 번 열게 되었다. (문화 기획자로 일했던 경험 덕분에 이곳에서도 비슷한 일을 할 수 있었다.) 당연히 마트 사장님에게도 전단지를 돌리며 열심히 홍보했었다. 그러면서 안면을 틔우고, 말을 몇 점 건네고.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사장님께 먼저 말을 걸었지, 선뜻 나에게 다가오진 않으셨다.


행사가 다 끝나고,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를 담아서 아카이빙 북을 만들었다. 그때 마트 사장님에게 다가가 짧은 인터뷰를 요청했다. 사장님은 22년 동안 이곳에서 일하셨고, 개인 사정으로 딱 두 번 쉰 것을 제외하고는 문을 안 연적이 없다고 한다. 22년 근속이라니. 나에게는 엄청난 숫자임이 틀림없다. 바쁘고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문화생활을 누릴 수 없었고, 요새는 부쩍 줄어든 손님 탓에 물건도 잘 안 팔려서 어렵다는 말씀을 들었다.


아카이빙 북의 소재로 시작했던 인터뷰가 끝나자, 어떤 책임 의식 같은 게 느껴졌다. 사회학자 기시 마사히코가 쓴 <망고와 수류탄>에 나오는 생활사 구술대화들이 스쳐 갔다. “개인을 통해 사회를 생각하고 사회를 통해 개인을 이해한다. 우리는 바란 적도 없는데 특정 시대 특정 장소에 태어나, 미리 정해진 협소한 조건 안에서 조금 더 나은 삶을 위해 필사적으로 살아간다”라는 대목이 떠오르는 이야기였다.


개개인의 삶은 이토록 치열하구나. 사장님도 책임감을 안고 여기까지 오셨구나. 듣는 입장에서 그의 삶을 온전히 알 순 없지만, 공감과 작은 위로를 건네며 인터뷰를 계속 이어 갔다. 좋아하는 문화예술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문득 사장님이 트로트가수 정동원의 팬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다음날 일 때문에 본가에 가기 위해 마트 앞을 들렸다. 어제의 인터뷰 덕분에 사장님에 대한 친밀감이 한층 더 상승한 상태였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인사하는 나를 웃으며 받아주셨지만, 뭔가 부족한 기분이 들었다.  


묘한 아쉬움을 안고 다시 남해 터미널로 향했다. 7시간이 걸려 본가에 도착했다. 연말 시즌이라서 청년센터에서 성과공유회가 있는 날이었다. 남해에 내려오기 전에 청년센터에서 독서모임, 다육이 만들기 등 다양한 소모임에 참여한 적이 있었기에 성과공유회가 궁금했다. 프리마켓, 무료나눔, 걱정인형 만들기, 공연 등 다양한 행사가 준비되어 있어 무척 설렜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무료나눔’ 간판대가 보였다. 열몇 개의 똑같은 앨범이 테이블 위에 전시되어 있었다. 평소라면 별 관심 없이 지나쳤을 앨범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그건, 마트 사장님이 좋아하시던 트로트가수 정동원 앨범이었다. 머릿속에 반짝하고 불이 켜지는 기분이었다. 앨범 하나를 들어 가방에 넣었다. 같이 간 친구가 의아해하며 ‘너 이 가수 팬이었어?’라고 물었고, 나는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팬이야.’ 하며 웃었다.


우연히 이 마을에 오게 됐지만, 누군가와 교류 없이 혼자서만 머물고 싶진 않았다. 마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소한 것에도 애정을 주고, 주민들과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동네 고샅길, 가끔 만나는 검은색과 흰색 고양이, 식당 위에서 짖어대는 흰 강아지, 지나가는 어르신들, 자주 가는 마트 사장님까지.  


사실 그들과 친해지고 싶었던 거창한 이유는 없다. 그냥 내가 사람한테 관심이 많은 편이었고, 친밀한 말을 건네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동네에서 새롭게 친해지고 싶은 것들이 생겼고, 그런 애정 덕분에 이 마을에서 머무는 게 즐거워졌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친해지고 싶은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는 건 어쩌면 나한텐 당연한 일이다.


일주일 뒤 다시 남해로 향했다. 동네에 도착했을 땐 땅거미가 내린 지 한참 지난밤이었다.

건너편에 아직도 불 켜진 중앙할인마트가 보였다.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문을 열었고, 사장님께 인사를 드렸다. 안녕하세요! 잘 계셨어요? 안부와 동시에 가방에서 앨범을 꺼냈다.


“사장님 정동원 좋아한다고 해서요. 생각나서 받아왔어요!”


사장님은 눈을 똥그랗게 뜨며 앨범과 나를 번갈아서 쳐다보셨다. 고맙다는 말에 묘한 뿌듯함을 느끼며 서둘러 마트를 나왔다.


뒤를 돌아보자 마트 유리창에 사장님의 모습이 비쳤다. 앨범을 연신 만지작거리며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 그가 보였다.



다음날 읍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다시 마트  정류장으로 향했다. 사장님은 나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었다.



“어디 가니?”  


“하하. 읍이요!”  


“잘 다녀와!”  



그날로 말미암아 사장님과 나의 관계가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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