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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홉 Apr 23. 2022

지금 당고개행은  

단편소설 4


“지금 당고개, 당고개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오늘도 4호선 열차에 피곤한 몸을 던졌다. 출구가 열리고, 몇몇 사람들이 빠져나갔다가 곧바로 채워졌다. 옆 사람과 팔이 닿지 않으려고 교묘하게 안간힘을 쓰면서 들어갔다. 통통한 솜으로 채워진 패딩 덕에 작은 내 몸이 두 배로 커 보였다. 재빨리 남은 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운이 꽤 좋았다. 비어있던 좌석들은 저마다의 엉덩이로 채워졌다. 빳빳한 양복을 차려입은 회사원의 엉덩이, 요즘 유행하는 통이 넉넉한 와이드핏의 청바지를 입은 학생의 엉덩이, 부드러운 재질의 유연한 임부복을 입은 젊은 산모까지. 개중에는 자리에 앉지 못해 환승역까지 하염없이 기다리는 신세도 있었다. 


8시부터 9시까지. 출근 시간에 타는 전철은 잔인한 세계였다. 눈치 빠른 승객이 먼저 자리를 차지한다- 그건 모두가 동의하는 암묵적인 룰이자 경쟁이니까. 어제의 실패가 치욕스러워 오늘은 기필코 앉겠다고 다짐했는데, 정말로 작은 운이 트였던 건지 좌석 맨 끝자리를 사수할 수 있었다. 이 공간에는 엄연히 계급이 있다. 서서 가는 사람은 하층민, 그다음은 좌석 아무 곳에 앉은 사람, 상류층은 좌석의 맨 끝을 차지한 나 같은 행운아. 

계급이라고 해봤자 도착하는 역까지만 유효하지만, 때로는 오늘처럼 일시적인 승리에 취하는 날도 있었다. 그건 몇 번이고 가방을 뒤적거리며 부산을 떨거나, 빨간 전광판을 수시로 들여다보는 것. 물론 내릴 역이 한참 멀었는데도 말이다. 그런 묘한 속임수를 반복하면, 내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오매불망 곁눈질을 해댄 40대 중년 남자가 어느새 다른 곳으로 사라져 버리는 걸 볼 수 있었다.  


출근 시간의 열차는 번잡스럽다가도 금세 평온해졌다. 모두 작은 기기에 영혼이 붙잡혀서, 다른 곳에 정신을 두지 않았다. 아까처럼 이기적이고 추잡한 장난질을 해대도 주변은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심지어 당사자까지도. 


사당역, 사당역입니다-

다시 주변이 소란해졌다. 문이 열리자 빠른 발들이 겹겹이 안으로 밀려왔다. 맨 오른쪽 끝에 앉아 팔을 걸치고 눈알을 굴렸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 흥미는 빠르게 식었고, 다시 핸드폰으로 머리를 처박았다. 


“아휴... 시끄러워”  


미세한 혼잣말이 바닥을 타고 내 귀까지 선명하게 들려왔다. 건너편에 앉은 한 아주머니의 불만 섞인 볼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의 뾰로통한 시선 끝에는 짙은 청록과 유광 빛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새 냄새나는 패딩을 입은 청년이 서 있었다. 그의 목에는 동전 지갑이 걸려있었고, 전철 위쪽에 붙은 노선도를 보며 큰소리로 역을 하나하나 읊고 있었다. 


사당역! 사당역!...

서울역! 서울역!...  


연신 삿대질을 해가며 몇 번씩 같은 역을 소리치자 평화롭던 공간이 불순물이 뒤섞인 소음으로 가득 찼다. 두 번씩 큰소리로 반복하는 입은 여전히 눈치 없이 이어졌고, 안 그래도 일상에 지친 현대인의 심기를 마구 찔렀다.  


“학생. 조용히 좀 해” 

“민폐다 진짜..” 


어떤 이들은 정중한 듯 부탁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눈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못 볼 꼴을 본 듯 쳐다보다가 서둘러 다음 칸으로 사라졌다. 사실 그런 사람들은 드물었고 대부분은 모른 척했다.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무료한 시간을 버티기 위해 애쓸 뿐이다. 그의 존재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청년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나 역시 그런 소란쯤이야 무던히 넘기는 사람이었다. 지하철을 한두 번 타본 것도 아니고, 이런 작은 잡음은 금세 사그라들기 마련이니깐. 비록 초입에 서서 내릴 준비를 하는 사람이나, 이 열차에 최초로 탑승하는 이들에겐 그 청년이 ‘짐 덩어리’가 될지라도 말이다. 나는 열차의 상급자. 맨 끝에 자리를 차지한 행운아이기에, 넓은 아량을 베풀어 그를 나쁘게 보지 않았다. 조용하고 무해하게. ‘저런 사람쯤이야...’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뜨니 벌써 혜화역에 도착했다. 무심결에 청년이 서 있던 입구를 바라봤다. 그는 여전히 칙칙한 패딩 속에 커다란 몸을 숨기고 뻔하고 지루하게 노선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큰 소리로 떠들지 않았다. 두 손으로 핸드폰을 떠받듯이 들고, 건너편의 음성을 얌전히 경청하는 듯 보였다.  


조용해져서 좋네. 

아차. 나도 모르게 음침한 감정을 뱉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정말로 그 청년이 싫지 않았다. 다만 그 ‘소음’ 자체가 영 거슬려서 집중력이 흩어졌을 뿐이었다. 청년은 핸드폰을 귀에 대고 뭐라고 중얼중얼했다. 하도 작게 말해서 아무리 들으려 해도 들을 수 없었다. 그의 낮은 음성이 미세한 먼지처럼 바닥에 후드득 흩어졌다. 열차를 탄 승객들은 그를 보지 않고 듣지 않았다.


“우리 아들, 장하다. 이제 엄마 아빠 없어도 안 무섭지?” 


“네” 


“그래, 앞으로도 그렇게 지하철 타면 되는 거야, 별거 아니야.” 


“네, 네 지하철 좋아요. 안 무서워” 


“취업 축하해 아들”  


드디어 내리는 청년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이내 스마트폰으로 몸을 돌렸다.   




*

청년은 혜화역에 내려 개찰구를 지난다. 튼튼한 두 발로 계단을 오르고, 몇 차례의 신호를 기다린다. 큰길을 지나 건너편 골목 안으로 들어간다. ‘이음’이라고 적힌 간판이 보인다. 2층 계단을 오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땀방울이 똑-하고 문 앞에 떨어진다. 문고리를 빙빙 돌리니 사무실이 보인다. 눈에 보이는 곳곳엔, 만들다만 팔찌가 가지런히 꼬여있고, 벽 쪽에는 ‘장애인이 만드는 특별한 액세서리’라고 적힌 현수막이 크게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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