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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일 Jul 07. 2017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운동, 사랑, 공부

    처음 하는 일은 힘들다.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길을 찾지 못해 처음엔 누구나 갈팡질팡한다. 이러한 헤맴은 낯섦에서 낯익음으로 넘어서는 과정이다. 생소한 것이 익숙해지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 이 시간은 지난하고 험난하다. 이것은 당신에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처음은 누구에게나 힘들다. 

    어떤 처음이 그러냐고? 모든 처음이 그렇다. 금연이나 금주를 할 때 이런 괴로움을 느꼈겠지만, 반대로 처음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셨을 때에도 이런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기호품도 좋아하게 되기까지 처음에는 일종의 노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니 모든 처음은 괴롭다. 그렇다면 처음이 요구하는 괴로움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볼까.    


운동

    백두대간 팀을 따라 네 번째 산행을 했다. 그랬더니 베테랑들이 이제야 뭔가를 알려준다. 이렇게 더운 날에는 500리터 물을 네다섯 개 정도는 준비해야 한다. 물을 마실 때는 얼음물보다는 상온의 물을 마시고, 갈증이 나기 전에 미리 마시는 것이 좋다. 등산 초입에는 그냥 물보다는 이온음료를 마셔라. 스틱을 사용한다면, 평지를 걸을 때는 스키를 타듯이 몸을 끌어당겨 앞으로 나아가고 내리막길에서는 스틱에 체중을 실은 뒤 발을 내디뎌야 한다. 발을 디딜 때 앞발바닥부터 닿게 하면 무릎을 보호할 수 있다. 마치 하이힐을 신은 것처럼 그렇게 발을 딛는 것이 좋다. 오르막에서 빨리 가기는 어려우니 평지나 내리막에서 속도를 높이는 것이 효율적이다.

    수영을 배울 때도 그랬다. 처음에는 물에 떠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칭찬을 해주던 선생님은 이제 조금씩 주문의 수위를 높인다. 자유형 발차기를 할 때는 무릎이 아니라 허벅지를 사용해야 한다. 그렇다고 무릎을 뻣뻣하게 펴는 것이 아니라 굽혀주어야 한다. 발목도 마찬가지로 내려갈 때는 펴주고 올라올 때는 접어주어야 한다. 자연스럽게……. 마구잡이로 발을 차는 것이 아니라 세 박자씩 끊어서 차고, 그 박자에 맞춰 손을 저어주는 것이 좋다. 팔을 돌려 힘차게 물을 밀어내되 어깨에 힘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 왼쪽 팔을 돌릴 때는 왼쪽으로, 오른팔을 돌릴 땐 오른쪽으로 몸이 기울지는 것이 좋다. 자연스럽게…….

    이런 요구사항은 수없이 많은데 그것들을 단계별로 하나씩 하나씩 가르쳐준다. 하나가 익숙해지면 또 다른 요구사항이 생긴다. 처음엔 도대체 이게 뭐야, 어색하잖아, 라고 생각하지만 강습이 끝날 때쯤엔 할 만해진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익숙해지는 것이고,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아직 수영장 한 바퀴를 왕복할 수 있는 실력은 안 되지만, 이렇게 배우다보면 나도 할 수 있겠구나, 라는 믿음이 생긴다. 물론 오래 걸리겠지만 말이다. 

    산행이나 수영을 잘하게 되더라도 힘들긴 마찬가지라고 한다. 아시겠지만, 힘들 땐 힘들다. 운동은 이런 식이다. 그러니 저렇게 잘하는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지금 단계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좋다. 그래야 포기하지 않을 수 있고, 나중엔 그 힘듦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천왕봉으로 너울지는 능선들: 재작년에도 그랬지만 작년에도 문장대에 올랐다. 문장대에서 멀리 이어지는 산줄기를 바라보며, 나도 저 멀리까지 갈 수 있을까, 여기까지 오르는 것도 힘든데 천왕봉까지 가면 얼마나 힘들까를 생각했다. 그런데 올해, 문장대 지나 문수봉 지나 신선대 지나 비로봉 지나 천왕봉에 닿았다. 힘들지 않은 구간은 없었다. 그 힘듦을 딛고 올라서자 파도같이 굽이치는 산의 줄기들을 볼 수 있었다. 사진으로 아무리 담으려 해도 담을 수 없는, 누구의 것도 아닌 나만의 경치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힘든 것들은 그래서 가치가 있다.


사랑

    식당에서 엄마가 잠깐 화장실에 간 사이, 아빠가 옆에 있어도 우는 아기를 종종 보게 된다. 왜 아기들은 엄마에게 저토록 강한 집착을 보이는 걸까? 엄마가 젖도 주고, 잘 돌봐줘서 그러는 걸까. 해리 할로우(Harry Harlow)도 이것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새끼 원숭이를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할로우의 ‘애착실험’이다. 

    우선 새끼 원숭이를 어미와 격리시킨다. 다음으로 새끼 원숭이에게 두 개의 가짜 어미를 제공한다. 하나는 가슴에 우유병이 달려 있지만 철사로 만든 어미다. 다른 하나는 젖은 없지만 부드럽고 푹신한 헝겊으로 만든 어미다. 이것으로 실험 준비는 끝났다. 이제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새끼 원숭이는 ‘철사어미’와 ‘헝겊어미’ 중 어느 것에 더 애착을 느낄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죠?

    실험 전 할로우는, 새끼 원숭이가 젖을 주는 ‘철사어미’에게 애착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새끼 원숭이는 포근한 ‘헝겊어미’를 더 좋아했다. 배가 고프면 ‘철사어미’의 젖을 쫓기듯 빨고는 얼른 ‘헝겊어미’에게 달려갔다. 이 결과를 사람에게 그대로 적용한다면 거부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인간이나 원숭이는 생리적 차원에서 별반 다를 게 없다. 아기가 엄마를 따르는 것은 젖을 주기 때문도 아니고 또 자신을 친절하게 보살펴 주기 때문도 아니다. 아기는 포근하고 따뜻한 엄마의 감촉을 좋아하는 것이다. 사랑은 이런 육체적 접촉,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것이 할로우가 내린 결론이었다.

 

새끼원숭이는 헝겊어미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으려 한다. 오른쪽 사진의 원숭이는 더욱 강한 애착을 보이는데 헝겊어미에 붙어서 철사어미의 젖을 빨고 있다. *출처는 사진에 첨부되어 있는 것과 같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할로우는 새로운 상황을 접하게 된다. ‘헝겊어미’로부터 길러진 새끼 원숭이는 다른 원숭이들과 섞이지 못했고, 교미도 하려고 하지 않았다. 할로우는 깨닫게 된다. 사랑은 나에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사랑은 사회화의 과정이자 너와 내가 함께 만들어가는 노력의 산물이라는 것을 말이다. 

    ‘애착실험’에서 새끼 원숭이는 ‘헝겊어미’에게 하고 싶은 대로 행동했다. ‘헝겊어미’는 어차피 반응이 없으니까. 새끼 원숭이는 ‘헝겊어미’로부터 어떤 간섭도 금지도 구속도 경험하지 못했고, 나아가 어떤 칭찬도 긍정도 이해도 받지 못했다. 새끼 원숭이는 어떤 행동을 해야 하고, 또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배우지 못했다. 새끼 원숭이는 아무런 노력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헝겊어미’를 대했고, 어미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헝겁어미’에게 길러진 새끼 원숭이는, 다른 원숭이들이 보이는 다양한 반응 앞에서 당황했을 것이고, 결국 무리에 섞일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랑은 일방향이 아니라 양방향적인 서로의 노력 속에서 형성된다. 

    언젠가 바르트는 광기나 지나침과 같은 사랑의 정념을 상대에게 얼마나 보여줄 것인지, 혹은 얼마나 감출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사랑의 단상>>, 동문선, 71면). 사랑이란 대상을 사랑한다고 해서 내 사랑을 다 표현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무조건 숨겨야 하는 것도 아니다. 사랑은 작용도 아니고 반작용도 아니다. 사랑은 작용이면서 동시에 반작용이다. 사랑은 독백도 아니고 방백도 아니다. 사랑은 대화다. 처음에 불타올랐던 사랑이 식기 시작했다면 이제 노력해야 한다. 그런 노력하기를 포기한다면 불장난 같은 사랑만 되풀이 하게 될 것이다. 명심하라. 힘들지 않은 사랑은 없고 고독하지 않은 사랑은 없다.    


공부

삶은 고독하다. 사랑 역시 고독하다. 그러나 사랑은 그 고독을 둘이서 나눠 가질 수 있다. 그러니 사랑하라.

    공부 좀 했다는 사람들은 다양한 공부방법을 알려준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서 새벽에 공부해라, 충분히 잠을 자라, 공부하는 장소와 쉬는 장소를 구분하라, 자리에 앉으면 일어나고 싶어도 두 시간 이상은 참고 견뎌라, 앉아 있는 시간을 계속 늘려라, 스톱워치를 사용해서 공부시간을 체크하라. 하나의 문제집을 집중적으로 풀어라, 교재에는 메모를 하지 말고 따로 노트를 만들어라, 필기는 정성스럽게 하라, 등등. 

    이런 팁들은 그다지 유용하지 않을 수 있다. 공부에는 정해진 길이 없기 때문이다. 나에게 적합한 공부 방법을 찾는 것, 이것이 공부의 핵심이다. 사랑에는 특정한 방법이나 방향이 없다. 사랑은 언제나 개별적이고 특수하다. 왜냐하면 사랑은 너와 내가 함께 맞춰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에는 길이 없다. 그 길을 찾는 힘겨운 노력, 이것 역시 공부가 아닌가. 

    나에게 맞는 사랑의 방법을 찾는 것도 공부고, 나에게 맞는 운동방법을 찾는 것 또한 공부다. 그런 점에서 공부는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자 방식이다. 나에게 맞는 삶의 방법은 오직 나만이 찾아낼 수 있다. 삶이 고독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니 사랑하라. 물론 사랑은 고독하다. 그러나 사랑은 다른 것들과 달리 고독을 서로 나눠가질 수 있고 공유할 수 있다. 그러니 사랑하라.


*이 글은 <<경북매일>에 실은 글을 수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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