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용기를 잃다

by 머신러너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용기를 잃어갑니다. 다른 누군가에게, "아이를 낳으세요.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음에 죄의식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지나고 나서는 희극일지 몰라도 현재를 살고 있는 이 남자에겐 꽤나 큰 고통이자 도전입니다.

육아휴직을 계획하고 계신 남자분들은 마음 단단히 먹으셔야 할 겁니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누적으로 쌓여서 주기적으로 시험받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아침 일찍 출근해서 저녁 늦게 퇴근하는 일반 직장인의 삶으로는 절대 알 수 없습니다. 직장 생활도 만만치 않죠. 이해합니다. 그러나, 직장 생활과 육아휴직을 모두 해본 입장에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 관계로 고민하고 상사 눈피보고 실적으로 압박받는 일만큼이나 남자의 육아는 직장 생활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시련입니다.

“내게 이런 후진 모습이 있었나?”, 처음 맞닥뜨리는 새로운 자신의 모습에 놀라지 않길 바랍니다. 통제 불가능한 아이들의 떼쓰기와 울음소리에, 불현듯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르게, 잠시 연기가 되어 이 두통과 소음으로부터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다고 생각한 모습이 그중 하나입니다. 누구도 날 찾지 않고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 연기 속엔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을 테죠.

아이들 키우면서 당연히 이런 소음과 난장판이 처음은 아닙니다. 아이를 키우는 집에서는 일상이고 늘 있는 일이죠. 그러나 이게 쌓이고 쌓입니다. 이 남자에겐 피로가 누적되어 쌓이고 몸과 마음이 지치면서 느끼는 무력감은 살면서 처음 겪는 ‘여정’입니다.—순간이 아니라 여정이란 표현이 맞는 것 같습니다.—루틴은 사라져서 운동도 멈추니 다리에 힘도 풀리는 것도 한 몫한 것 같습니다. 육체가 정신을 지배한 것일까요.

모든 연결을 끊고 잠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책임감이나 부모다움과 같은 도덕적 잣대를 내려놓고 그저 어디론가 홀연히 떠나고 싶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충만했던 용기는 서서히 줄어서 바닥이 보입니다. 부모답지 못한 모습에 스스로도 부끄럽지만 말이죠.


남자에게 육아는 본인이 짐작한 것에 몇 곱절을 더하고 거기에 좀 더 힘들 수 있으니 각오해야 할 겁니다. 하고 싶은 것, 배우고 싶은 것, 즐기고 싶은 것을 모두 내려놓아야 합니다. 처음엔 모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로 버티지만 그 용기는 쓸수록 달아서 채울 때까진 시간이 필요합니다. 용기가 바닥이 될 때,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모습에 놀라지 않길 바랍니다. 그 모습은 남자답지 않고 멋지지 않으며 남편답지 않고 아빠답지 않으니까요.

이런 용기 잃은 모습의 발현은 사람마다 제각각이겠죠. 이 남자는 '침묵'입니다. 눈을 감고 두 손으로 머리와 얼굴을 감싸서 잠시 소심한 도피를 시도합니다. 고작 자신을 감쌀 수 있는 최대한을 두 손으로 가리는 게 고작입니다. 그리고 다시 아이들을 챙기고 목욕시키고 로션 바르고 옷 갈아입히고 재웁니다. 현실은 현실이니까요.


작은 창작을 해보겠다는 용기는 아마도 방학이 끝나야 채워질 것 같습니다. 네, 지금은 아이들 방학입니다.

keyword
이전 11화월요병 대신 주말병을 얻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