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이가 잠든 밤 10시. 세상에서 가장 고요한 밤이고 거룩한 밤입니다. 집 안의 모든 조명은 꺼져있고, 단 하나 주방의 옅은 등만이 외롭게 식탁을 비추고 있습니다. 집안의 공기조차도 차분해진 지금은 '육퇴'할 시간입니다.
육아휴직 중에 맞이하는 육퇴와 평소처럼 퇴근하고 잠깐 놀아주다가 재우고 맞이하는 육퇴는 너무나도 다른 것입니다. 오히려 퇴근하고 잠깐 두어 시간 아이들과 놀아주고 육퇴하면 책상에 앉는 의지를 용케 발휘했습니다.
그러나 육아휴직 상태에서 맞이하는 육퇴는 이전과는 좀 다른 패턴입니다. 생산적인 일을 하기 위해 책상에 앉지 않고 자꾸만 식탁 의자에 앉는 자신을 발견하는 패턴입니다. 그리고 앞에 보이는 냉장고의 냉장실에 있는 맥주 한 병을 냉동실로 잠깐 이사시킵니다. 만약에 냉동실에 있는 맥주병을 깜빡하고 잠들어버리면, 다음 날 처참한 상태의 맥주병을 발견하곤 합니다. 병마개는 열려 있고 얼어버린 맥주는 바깥으로 새어 나온 상태죠.
순간적으로,
"액체 맥주 분자들이 자유롭게 오밀조밀 움직이고 있다가 냉동실에서 어는점 이하가 되어 고체 맥주는 육각형 결정구조로 규칙적으로 배열되었구나. 그래서 맥주병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맥주 고체의 부피가 커지면서 가장 약한 병뚜껑을 높은 압력으로 밀어서 열고 이렇게 흘러내렸군."
이라고 과학적으로(?) 이 상황을 머릿속에서 그려봅니다. 과학적으로는 그렇다 치고 우선 냉장고 청소를 해야 합니다. 이때 느끼는 자괴감은, 소중한 맥주를 날린 것도 아깝고 어젯밤 맥주도 즐기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입니다. 그렇게 소중한 육퇴 시간이 그냥 흘러갔으니 말이죠. 다시 아침은 육아로 시작되니까요.
요즘 들어 술에 대한 작은 취향 하나가 생겼습니다. 주종(酒種)은 그대로 맥주입니다. 아직도 쓴 소주를 왜 마시는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평생 이해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주종은 그대로지만 ‘캔'맥주에서 '병'맥주로 작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육퇴하고 한 잔 하는 맥주의 소중함에 '디테일'이 생겼다고나 할까요. 맥주를 음미하기 전부터 즐길 수 있는 건 캔맥주보다 유리병에 담긴 병맥주가 몇 수는 위입니다. 게다가 빈 병은 편의점에 가져가면 100원 보너스까지.
병맥주눈 먼저 손맛이 있습니다. 와인을 좀 즐겨볼까 해서 산 코르크 오프너 뒤에 병따개 기능은 예상치 못한 작은 행운입니다. 나름대로 고급스러운 와인 오프너 뒤로 맥주 병마개를 따는 그 손맛으로 육퇴 후 이 남자의 성스러운 의식은 시작됩니다.
적당히 냉동실에서 찬 기운을 머금은 유리병 속 맥주는 '칙'과 '펑' 중간쯤에 해당하는 세련된 효과음으로 귀를 시원하게 합니다. 그러고 나서 바로 이어지는 '쇼'는 눈도 즐겁게 합니다. 유리병 안에서 차갑게 얼듯말듯한 냉기가 갑작스럽게 압력이 떨어지면서 병 속에 입구부터 맥주까지 손가락 한마디 사이에 안개가 생기는 작은 쇼가 펼쳐집니다. 다시 과학을 소환하면, 병뚜껑이 열리는 순간 그 속에 압력이 갑자기 떨어지면서 병 바깥공기가 병 안의 차가운 기체와 만나게 됩니다. 온도가 낮아질수록—기체는 액체로 액체는 고체로 변하니까—병 바깥쪽에 있던 기체가 액체가 되는, 액화 현상으로 짧은 쇼는 막을 내립니다. 냉동실에 잠깐 넣어두었기 때문에 가능한 쇼입니다.
이제 맥주를 따를 차례입니다. 수채화풍 꽃이 그려진 포트메리온 흰색 커피잔에 따라 마시는 게 나만의 의식이라면 의식입니다. 손가락 넣을 손잡이도 있어서 놓칠 염려도 덜고 아름다운 꽃구경은 덤입니다. 투명 유리잔이 정석인 건 알지만, 집에서만 즐길 수 있는 포트메리오 커피잔에 맥주를 한 번 즐겨보시길. 커피를 음미한다고 표현하듯이 맥주도 음미할 수 있습니다.
맥주를 따를 때, 잊어서는 안 되는 현상은 '병목현상'입니다. 맥주를 따를 때, 병목에서 울려 퍼지는 '골골골' 소리는 왠지 모르게 중독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맥주병을 고를 땐, 맥주의 맛도 중요하지만 맥주병의 모양도 유심히 살펴야 합니다. 골과 마루가 어우러져 있는 맥주병을 골라야지, 심심한 '민'자 모양 맥주병을 고르면 맥주의 오르골 소리는 포기해야 하니까요.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첫 잔에서만 이 오르골 소리를 즐길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웰컴 오르골'과 같은 거죠. 두 병을 마신 적은 아직까지 한 번도 없으니까, 하루에 딱 한 번 들을 수 있으니 귀 기울여야 합니다.
흰색 커피잔에 따르고 나면 육퇴 후 나만의 맥주 의식의 8할은 다 한 것입니다. 냉동실로 병맥주를 이사시키고 손맛보고 시원한 병뚜껑 열리는 소리 듣고 안개쇼 보고 오르골 소리까지 들었으면 8할은 끝났습니다. 탄산의 목 속 청량감과 살짝 오른 취기는 2할이 고작입니다.
본업을 상기시켜 보면, 시뮬레이션도 시뮬레이션을 위한 준비 과정에 해당하는 모델링이 전체 과정의 8할입니다. 데이터 분석에서도 데이터 분석을 위한 데이터 전처리가 8할이고 글쓰기도 글쓰기를 위해 머릿속에서 구상이 8할입니다. 구상과 주제만 잡히면 실제 '쓰기'는 고작 2할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육아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미리 인생을 산 부모님과 여러 어르신, 지도 교수님 그리고, 본인들의 경험과 지혜를 아낌없이 남겨 주시는 브런치안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이러합니다. 두 원(큰원과 작은원)과 함께 있는 지금이, 전체 생애를 봤을 때 짧지만 애착 관계의 8할 그 이상을 담당할 것입니다. 감히 9할 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말 그대로 지금은 결정적 시기라는 점입니다.
지금이 아이들에게 이 남자와 이 남자의 아내가 각자 아빠와 엄마로서 가장 사랑을 쏟아야 할 때입니다. 지금이 아니면 쌓을 수 없고 지금만큼 두 원이 나를 필요로 하는 시기도 없겠지요. 지금은 부모를 졸졸졸 따라다니지만, 이 남자가 부모를 떠난 것처럼 훗날 그들도 나름대로의 길을 찾아 우리 곁을 떠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 "후회 없이 주었노라" 미련 없이 떠나보낼 수 있길 바라봅니다. 이런 훗날을 상상하며 오늘도 포트메리온에 한 잔 기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병은 아파서 얻은 병이 아니라 술에 대한 개인적 애호로써의 병입니다. 물론 과음하면 술병도 얻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