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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원할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by 머신러너

육아휴직한 남자가 되어 처음으로 어린이집 등원한 때가 생각납니다. 등원이란 단어는 꽤 묵직한 것들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등원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자질구래한 것들과 그것이 뭉치면 꽤 묵직해진다는 사실은, 해보아야만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를 미리 알려드리자면 이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등원할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등원은 남의 일이었던 직장인, 이 남자는 고요한 새벽 5시 50분에 문 밖을 나섭니다. 걸어서 10분 거리 정거장에서 통근버스 타기까지 온전히 혼자만의 생각과 시간 속에 잠길 수 있습니다. 더 깊은 고요함으로 빠져들고 싶으면 문명을 조금 활용하면 됩니다. 에어팟 콩나물 줄기 부분을 꾹 누르면 노이즈캔슬링으로 고요함에 적막함까지 더해 더욱 깊은 심해까지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더 가면 버스에서 몇 분 만에 수면에 빠지시도 합니다.

몸과 어깨도 가벼워서 5시 45분에 일어나도 5분 만에 집을 나서는 게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남자에게 하루 정도 안 씻는 것쯤이야 뭐 대수겠거니. 알람에 눈 뜨자마자 5시 45분임을 확인하면, 옷만 입고 가방만 챙겨서 나가는 데 5분도 채 걸리지 않습니다. 5분도 길고 3분도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침부터 100미터 달리기 하면 지각도 안 하고 건강도 지킬 수 있습니다. 혼자였고 몸과 어깨가 한없이 가벼웠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두 원을 등원시켜야 하는 지금은 꿈도 못 꿀 일입니다. 아침은 보통 두 가지 상황으로 전개됩니다. 밤늦게까지 '쓰기'하느라 늦잠 자면 두 원으로부터 강제 기상되던지, 아니면 두원보다 일찍 일어나면 최대한 등원 준비를 서두르는 시나리오입니다. 만약, 두 원이 깨울 때까지 늦잠 잤다면. 그날 등원은 보나 마나 '큰원'이나 '작은원' 둘 중 하나는 울면서 등원할 게 뻔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연신, "시간 없어"와 함께 뒤에 이어지는 말은 다음이 붙습니다:

"+빨리 해"

"+빨리 먹어"

"+빨리 입어"

"+빨리 양치해"

"+빨리 신어"

"+빨리 나와"

"+빨리 가자"

하나하나로 나눠서 보면 한 없이 보잘것없는 일들입니다. 이불을 개고, 기저귀 갈고, 씻기고, 옷 입히고, 식기와 물병 챙기는 일들 말입니다. 여기에, 본인은 귀찮아서 먹지도 않았던 아침도 아이들을 위해 준비해야 합니다. 누룽지로 때우다시피 하는 게 조금은 미안하지만 나도 살려면 누룽지로 타협했습니다. 이렇게 등원시키면 이상하게 한 가지씩 꼭 빠뜨립니다. 뒤늦게 키즈노트에 숙제 검사 결과로 통보받습니다. 하도 빠뜨려서, 이제는 아마도 담임 선생님이 "아빠라서 그런가 보다."하고 넘기시는 것 같습니다. 실은 키즈 노트도 잘 안 봐서 선생님은 등·하원마다 꼭 육성으로 말씀하시는데, 그럼에도 까먹습니다.

처음 몇 번은 강박적으로 "이제 잘 챙겨야지"라고 생각했지만, 아침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서 이제는 그냥 놔 버렸습니다. 먹이거나 입히거나 양치시키거나 씻기거나 챙기는 게 뭐 그리 어렵겠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모두를 뭉치면 엄청나게 묵직한 '등원 종합 세트'가 됩니다. 이것은 기본 옵션이고 여기에 돌발 변수가 더해지면 등원 난이도는 하루의 절반 이상의 에너지를 써야 할 만큼 높아집니다. 어제 입은 빨래통에 있는 옷을 다시 입겠다는 어처구니없는 실랑이라던지 아침부터 쭈그려 앉아서 종이 접기를 해줘야 하는 신세가 되기도 합니다. 육아휴직을 계획 중이신 남자분들 등원을 우습게 보셨다면 정말 '큰 코' 뿐만 아니라 '큰 멘탈'까지 다칠 수 있으니 마음 단단히 먹길 바랍니다.

등원시키고 나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 여파는 적어도 1시간에서 2시간까지 남아 있어서 누워서 가만히 있거나 무얼 하더라도 집중력을 발휘하긴 힘들 것입니다. 한 가지 팁이라면 매우 기계적이고 뇌를 크게 쓰지 않아도 되는 일을 그 시간에 하는 게 좋습니다. 집안일이라면, 빨래 개기나 설거지이고 일이라면 단순 업무를 배치하면 좋습니다. 6개월 등원하면서 얻은 노하우라면 노하우입니다.


등원 길에 나서면 다른 부모님과 아이의 등원 모습이 보입니다. 어떤 아이는 바닥에 드러누워 있기도 하고 어떤 아이는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속옷만 입은 상태로 울먹이면서 등원길에 나선 아이도 보입니다. 예상컨데, 출근 복장의 아빠인 것으로 봐서는 등원은 시켜야겠고 출근도 해야 하니까 먼저 속옷 바람으로 옷만 챙겨서 나온 것 같습니다. 가면서 입히려는 초고난도 등원을 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모두의 등원에는 그만한 고군분투가 있는 것이죠. 등원했을 때, 비로소 보이고 느낄 수 있는 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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