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변하지 않는 세상의 규칙이 몇 가지 있습니다. 무게가 있는 물질 사이에는 언제나 중력이 작용하고 물은 100도씨에서 끓습니다. 빛의 속도는 초속 30만 킬로미터입니다. 왜 그러한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명백한 사실입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반감기가 그러합니다. 원리는 단순합니다. 변화가 반절되는 시간이 일정합니다. 커피를 마시면 몸속에 카페인이 100이 된다고 해봅시다. 100에서 50으로 줄어드는 시간이 한 시간이면, 50에서 25로 주는 시간도 한 시간입니다. 25에서 12.5로 줄어드는 시간 역시 1시간입니다. 선으로 이으면 직선이 아니라 곡선으로 줄어드는 꼴입니다. 직선적 선형은 부자연스럽고, 곡선적 비선형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 같습니다.
자연스러운 반감기의 원리는 지구의 나이가 45억 살이라는 것도 알아냅니다. 우라늄이 납 덩이로 변하는데 반감기는 45억 년이 걸립니다. 비트코인도 반감기가 있습니다. 4년마다 채굴할 수 있는 개수가 절반으로 줄어드는데, 자연을 모방한 것입니다. 우리 사람도 반감기가 있을 것입니다. 없다면, 그것은 오히려 부자연스럽겠지요.
어쩌면 사람의 첫 번째 반감기는 30년 즈음인 것 같습니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시점이 서른에서 마흔 즈음이니까, 얼추 그 정도쯤에서 반감기가 옵니다. 반감기에 우리의 에너지는 반으로 줄어듬을 느낍니다. 에너지는 수명으로 바꾸어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에너지 고갈, 수명의 줄어듬의 이유는 단순히 힘의 겨움이나 생물학적 노화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육아휴직 중인 남자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에너지가 반으로 줄어든 만큼, 수명이 반으로 줄어든 만큼 누군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희생할 수 있습니다. 결국, 사람의 반감기는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맞이하는 숙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 남자는 이제 누가 봐도 아저씨입니다. 그만큼 나이가 들었고 젊어 보이지도 않습니다. 주변의 아저씨들을 보아도, 누가 봐도 아저씨입니다. 그렇게 나이 듦은 그만큼 누군가를 사랑했다는 증거입니다. 아이를 낳고 기르지 않더라도 그렇습니다. 그 대상이 아내이면 반려자, 강아지면 반려견, 고양이면 반려묘 심지어 식물이면 반려식물까지도 모두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중에 으뜸은 역시나 자녀의 양육입니다.
그렇습니다. 육아하는 이 남자에게 첫 번째 반감기가 온 것입니다. 예전과 같지 않은 에너지 고갈, 좌절, 무력감, 소진, 한계, 공허, 피로 심지어 추위까지도. 100의 에너지가 50으로 반감되었기 때문에 느끼는 변화들일테죠. 그래도 괜찮습니다. 인생의 절반의 에너지는 잃고 나이도 들었지만 그만큼 아내와 두 원의 사랑으로 채웠으니까요.
이렇게 생각하면 다음 반감기는 두려움이 아니라 희망입니다. 다음 반감기까지 다른 사랑으로 또 채울 테니까요. 물론 아내와 두 원의 사랑의 크기보다 클 수는 없습니다. 50 다음은 25, 그다음은 12.5입니다. 한 참을 지내고 나서야 25만큼의 사랑을 또 배우게 될 것입니다. 무엇이든 좋습니다. 사람일 수도 있고, 사물일 수도 있고, 무형의 무엇일 수도 있습니다. 현재로서의 소망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배움이고 생각이고 연결이고 창작까지 모두를 아우르는 글쓰기였으면 좋겠습니다. 20년 전 통신사 광고 카피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처럼, 이 남자의 20년 후의 사랑이 여전히 그것일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현재로서는 글쓰기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글쓰기 덕분에 아내와 두원에게 사랑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글쓰기 덕분에 자신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어디로 사라지지 않고 활자로 영원히 남길 수 있어 더욱 강력할 것입니다. 큰원과 작은원이 자라서 이 글쓰기를 볼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