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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양육자의 조건

by 머신러너

엄마 품에서 보낸 열 달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엄마뿐입니다.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서부터 대부분의 시간을 엄마와 보냅니다. 엄마의 출산 휴가 1년 동안 주 양육자는 엄마입니다. 이 남자의 아내가 복직하고 남자 육아휴직을 시작하게 되면 완장을 건네받습니다. 주 양육자로서 완장을 차면 몇 가지 바뀌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몇 가지는 이러합니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를 받습니다. 지역 번호가 있는 번호입니다.

"작은원 아버님~"


어린이집입니다. 처음 어린이집 선생님의 전화를 받는 순간, 이 남자는 자신이 주 양육자임을 알게 됩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선생님의 말은 잘 들어오지 않고 잠시 멍한 상태로 통화가 끝납니다. 전화의 상당수는 빠트린 준비물이거나 키즈노트의 투약의뢰서 작성입니다. 가을철부터 아이는 감기를 달고 삽니다. 그러면 가방 안에 시럽 약을 담아서 바로 먹일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혹시 흘릴 수도 있으니 지퍼팩에 담는 센스는 기본이고요. 처음에는 약봉지 통째로 보냈습니다.(지금 돌이켜보면 아마도 선생님이 많이 당황했을 것 같네요.)

키즈노트로 가서 투약의뢰서를 써야 합니다. 이게 있어야 선생님이 아이에게 약을 먹일 수 있습니다. 하나의 보건 시스템입니다. 12시 근방으로 어린이집 전화가 오면 거의 여지없이 투약의뢰서입니다. 상습범이 되고서야 깨우쳤습니다. 등원하자마자 전화가 걸려온다면 모두 단체복을 입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나 수저통, 물통처럼 생명에 지장이 있을 의식주 중에 하나인 경우입니다.

그렇지 않고 느닷없는 전화는 대게 아이가 열이나 거나 아픈 경우입니다. 가까운 곳에 있으면 문제없겠지만, 혹여나 멀리 나와 있다면 사태는 심각합니다. 주 양육자가 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들입니다. 공감한다면 자신은 주 양육자입니다. 그렇지 않고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 않으면 주 양육자가 아닙니다. 육아휴직을 계획하는 맞벌이 남자라면 곧 알게 될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건망증이 심한 지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를 챙기면 다른 하나는 빠트립니다. 잊지 않으려고 문 앞에 두어도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문 앞에 것을 챙겼으면 다른 하는 또 빠트리게 되어 있습니다.


아파서 병원에 가면 의사 선생님은 아이의 증상을 부모에게 묻습니다. 이때, 아내는 이 남자를 바라봅니다. 그 순간 자신이 아이를 보고, 느끼고, 관찰한 것들을 시간 순서대로 읊습니다. 아이와 가장 긴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것들입니다. 주 양육자가 된 것입니다. 미묘한 변화도 캐치할 수 있습니다. 콧물이 나는지, 콧물 색깔은 어떤지, 목소리가 쉬었는지, 목아 아파서 먹는 것이 덜한지, 밤에 잠은 잘 잤는지와 같은 것들이요.

몇 번 같은 병원에 같은 의사 선생님을 찾아가면, 의사 선생님은 엄마가 아니라 이 남자를 바라보고 대답을 기다립니다. 벙어리가 된 듯이 있었던 직장 생활 당시와 달라진 것들입니다. 직장 생활하던 당시의 비즈니스 관계, 동료, 상사, 구내식당, 구내매점은 어린이집 선생님, 동네 주민, 병원 의사 선생님, 어린이집 주변 편의점, 아이스크림 가게로 바뀌었습니다. 공간이 바뀌면 만나는 사람이 바뀝니다. 만나는 사람이 바뀌면 흐르는 시간도 다르게 흐르는 기분입니다. 아인슈타인이 이런 말을 했던가요?

"무거운 물체가 있으면 그 주변의 시공간이 휘어지고, 다른 물체들은 그 휘어진 길을 따라 움직인다"


물리 개념은 차치하고, 내가 있는 공간과 시간이 왜 휘어지는지는 몰라도 앞만 보고 직선으로만 갔던 그 길이 휘어진 것은 맞습니다. 직장 생활자에서 육아휴직을 하고 주 양육자가 되면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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