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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얻다 1 - 스카

by 머신러너

공간과 시간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이 글귀를 쓰고 있는 이 남자도 어떤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읽고 있는 당신도 그 어떤 공간에 있을 것입니다. 두 발을 간신히 붙이고 있는 비좁은 지하철이거나 시원하게 공간이 탁 트인 해변가일 수도 있습니다. 국내이거나 해외일 수도 있겠죠. 현재도 공간에 있지만, 과거도 공간에 있습니다. 과거의 기억은 모조리 장소입니다. 어제는 큰원과 하원하고 알라딘 중고서점에 들렀습니다. 대다수 알라딘 서점은 지하에 있습니다. 지하 계단 → 세로 방향 모니터로 된 검색대 → D12 위에서 두 번째 칸 → 잠깐 앉아서 책을 본 책상 → 계산대 → 다시 지하 계단.

어쩌면, 삶이란 구체적인 공간에서 경험들의 시간 순서일 수 있습니다. 공간과 시간 빼면 남는 게 없습니다. 육아휴직하면 가장 먼저 공간이 바뀝니다. 공간이 바뀌면 경험이 바뀝니다. 그렇게 바뀐 경험들의 시간 순서는 내 삶이 됩니다.


큰원과 작은원은 다른 어린이집에 다닙니다. 한 명씩 어린이집에 등원시키고 나면, 이 남자는 '스카'로 갑니다. 스터디 카페의 줄임말입니다. 카페(cafe)는 카페(caffe)─커피─파는 장소인데, 공부하는 곳도 카페가 되었습니다. 이것뿐이겠습니까. 아이들도 놀이터가 아니라 키즈 카페에 갑니다. 라면을 먹으러 분식점이 아니라 라면 카페에 가고 심지어, 강아지도 대문 앞이 아니라 애견 카페에 갑니다.

그래도 스터디 카페는 양반입니다. 스터디 카페(cafe)에 카페(caffe)─커피─가 있고 무료입니다. 그 대신 시간제입니다. 한 시간에 1,300원 꼴인데, 50시간을 끊으면 1,250원으로 단가를 낮출 수 있습니다. '스카'에 다니다 보면 자유석이 지정석이 됩니다. 선호하는 자리가 생기고 그 옆이나 앞은 항상 같은 사람입니다. 자리가 남아도 그 자리는 남겨줍니다. 이곳만의 동지애입니다. 처음에는 조용히 주변에 아무도 없기를 바라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항상 출근 도장 찍는 사람이 그 자리에 없으면 조금 허전합니다. 스카에서 외로움을 느낄 줄은 몰랐습니다.

스카 사람들은 대부분 수험생이거나 공시생입니다. 간혹, 이 남자 같은 중년도 있습니다. 소수라는 의미입니다. 흘깃 그 중년의 자리에 있는 책을 보면, 시험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말은, 이 남자는 소수 중에서도 소수입니다. 자격증 시험처럼 문제를 풀러 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백팩에 챙겨 온 책들도 시험서나 문제집이 아닙니다. 읽고 싶은 책들입니다. 책 종류도 중구난방입니다. 필이 꽂히는 대로 챙겨 와서 읽습니다. 읽다가 좋은 문구를 발견하면 옮겨 적고 그 옆에 내 생각을 메모합니다. 이렇게 단순 반복입니다. 단순 반복한다고 해서 지루한 건 아닙니다. 시간이 얼마나 빠르게 지나는지 모릅니다.


등원시키고 자리에 앉으면 10시입니다. 책상에는 50분 타이머 버튼이 있는데, 50분이 지나면 스탠드 불이 꺼집니다. 이렇게 스탠드를 켰다, 꺼지기를 세 번 반복하면 벌써 1시입니다. 점심은 스킵하거나 시쳇말로 대충 때웁니다. 30분 점심 먹고 나면 30분은 케일라 필리핀 선생님과 프리톡 시간입니다. 가족을 제외한 '사람'과 거의 유일한 대화다운 대화입니다. 부러진 영어 실력이지만 굳어 있던 입을 열기에는 충분합니다. 그리고 기분도 한결 나아지는데, 내 안에 있는 속 마음을 여과 없이 전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한국말이 아닌 말과 멀리 있는 선생님에게 내 속마음을 보여주게 됩니다. 케일라 선생님의 능력인지, 환경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마음도 후련하고 정리도 됩니다. 다시 '스카'로 돌아가서 자리에 앉아 두 번 스탠드 불이 꺼지면 아이들 하원할 시간입니다.


육아휴직하고 새로운 공간을 얻었습니다. 그곳에서 새로운 경험을 조립합니다. 화려하지도, 요란하지 않고 거대하지도 않습니다. 그 반대입니다. 단조롭고 고요하고 좁은 공간이 '스카'입니다. 그곳에서 소박한 배움을 채웁니다. 육아휴직으로 잠시 멈췄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무엇보다, 잘 자라고 있는 아이들과 언제나 나를 믿어주는 아내에게 감사합니다. 직장 생활과 다르게 흐르는 시간은 다양한 생각을 허락합니다. 배울수록 나에 대한 믿음이 생깁니다. 흥미롭게도 배울수록 겸손을 배웁니다. 사회에서 미웠던 사람에 대해 용서를 배우고, 이는 남을 용서할 수 있는 용기의 원천입니다. 아프지 않고 이곳까지 올 수 있었던 신체, 나머지, 직감, 표상, 알아차림, 삶에 자세로서의 카르마까지. 이 모든 것은 공간이 바뀌어서 할 수 있는 이 남자의 생각과 감각 그리고 느낌의 시간 나열입니다. 아! 하원할 시간입니다.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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