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원하고 먹이고 씻기고 재우면 육퇴입니다. 이 짧은 한 문장으로 간신히 욱여넣었습니다. 아무튼 육퇴입니다. 모든 불들이 꺼져있고 집 안도 오랜만에 고요합니다. 이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건 반반입니다. 반은 아이들 재우다가 이 남자도 자버리기 때문입니다. 깨면 아침입니다. 보통 이틀에 한 번 꼴입니다. 아이들과 아내가 함께 잠들고 이 남자만 정신을 차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남자의 공간으로 갑니다.
보통 쓰리베이 아파트 구조에서 남자의 공간은 없습니다. 방이 세 개면 안방은 아내 것이고, 작은 두 방은 각각 두 아이들 방입니다. 남자는 거실 소파로 갑니다. 거실 소파라고 부르고 거실 침실입니다. 그러나 이 남자의 가족의 배려─아내의 허락─덕분에 안방 다음으로 큰 방을 얻었습니다. 큰원은 '연구실'이라고 작은 문패를 달아주었습니다. 맞습니다. 이곳은 이 남자의 연구실입니다. 중앙에는 이케아 무빙 데스크(1600x800)가 있습니다. 벽면에 붙이지 않고 중앙에 두었습니다. 벽면에 붙이면 수험생처럼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책만 봐야 할 것 같아서요. 아무 생각을 하기 위해 공간을 확보했습니다. 서서 노트북하면 또 다른 느낌적인 느낌이 좋습니다. 집중하기보다는 후다닥 끝내버리고 싶은 게 있을 때 유용합니다.
의자의 네 다리 중에서 앞의 두 다리는 바퀴이고 뒤는 두 다리입니다. 별것 아니지만 신박한 아이디어입니다. 처음 고안해 낸 사람은 대단한 인사이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요타의 프리우스 하이브리드에 머금 가는 하이브리드 의자입니다. 목받침이 있는 의자는 공간을 너무 차지하는 느낌이라 패스입니다.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은 심플한 등받이가 마음에 듭니다.
한쪽 벽에는 높이가 다른 두 책장이 있습니다. 이 남자의 유일한 짐은 이곳이고 보물 1호이기도 합니다. 꿈이 있다면, 삼면을 모두 책장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높이는 2층까지 높여서 사다리를 타야만 높이 있는 책을 꺼내볼 수 있는 크기 말입니다. 언젠가는 이 작은 두 책장의 크기가 그렇게 커지리라 꿈꿔봅니다. 아직까지는 이 남자의 생각을 채우는 데 충분한 공간입니다. 따로 구분해서 책을 모아두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자주 보는 책들은 옹기종기 모여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책들은 여닫지가 있는 아래쪽에 잠들고 있습니다.
마지막 공간의 완성은 화이트보드 칠판입니다. 자석도 붙습니다! 이것은 특히 심혈을 기울여서 특수 제작(?)했습니다. 크기부터 심오한 수학적 감각을 발휘했는데, 가로와 세로 2750x1180입니다. 두에 0을 빼면, 둘 사이는 서로소(互素) 관계입니다. 둘은 나누어 떨어지지 않습니다. 서로 간섭하지 않고 독립적입니다. 황금비도 그렇습니다. 나누어 떨어지지 않고, 1.61803398..... 무한히 뒤에 숫자가 붙습니다.
칠판의 맛은 쓴 것보다 지우기에 있습니다.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나 염두에 둘 것을 칠판에 크게 적어두고 마무리되고 전체를 슥슥 지울 때 쾌감은 얼마나 속 시원한지 모릅니다. 다시 깨끗해진 칠판은 무엇이든 채울 수 있을 만큼 넓고 깨끗한 흰색입니다. 중간에 아이들이 지워도 크게 개의치 않습니다. "지워질 때가 됐다"보나하고 다시 쓰면 됩니다. 칠판 앞에서 강박은 가장 쓸모없는 고집입니다. 칠판은 지우라고 있습니다.
사실 칠판은 쓴다기보다 그린다는 표현이 잘 어울립니다. 이 남자에게 '쓴다'는 디지털 노팅에 타이핑하는 작업이고, '그린다'는 종이에 팬이나 칠판에 보드마카로 쓰거나 그리는 행위입니다. 그릴 때는 구상하는 것처럼 작업의 시작을 알립니다. 쓸 때는 그 구상을 실현해 내고, 작업의 마무리를 의미합니다. 바깥은 항상 밤이라서 계절의 변화를 느끼기는 어렵지만, 눈이 올 때는 참 예쁩니다. 올 겨울도 밤에 예쁜 눈을 자주 볼 수 있길 바라봅니다.
모든 동물은 자신의 영역을 지킵니다. 지나가는 강아지도 재 구역이라고 눈물만큼 쉬를 하여 영역 표시를 하고 자유로운 새도 나무 위 좁은 공간에 둥지를 틉니다. 직장에서도 승진할수록 좋은 자리로 옮깁니다. 임원이 되면 방으로 갑니다. 아마도 집보다 그곳을 더 좋아 라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남자에겐 공간이 필요하니까요. 자동차만 타면 절대 끼어들기를 용남 하지 않는 분은 자기 공간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뭐 다 제 망상이고 상상입니다만. 그런 분들에겐 맞대응보다는 위로를 보내야 합니다.
이 남자는 감사하게도 자신만의 에고스페이스를 얻었습니다. 아내의 컨펌과 두 원이 한 방을 써준 덕입니다. 다시 한번 가족에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