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스스 눈을 뜨니 귀가에 들리는 정적과 공기는 아직도 어둡다. 발 밑으로 보이는 닫힌 문틈이 살짝 떠 있다. 그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바깥의 복도 전등빛을 보니 아직 이른 아침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낯선 알코올향과 익숙하지 않은 방향제향이 오묘히 섞인 냄새에 이질감이 들었다. 이쯤이면 넉넉지 않은 보조의자에 몸을 누이는 것이 익숙할 것도 같은데, 내 몸의 굴곡과 의자의 딱딱한 재질이 맞혀지질 않아서 여전히 불편하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닌가 보다. 그저 다른 방법이 없는 이 상황을 인정하고 감수하며 이제 이런 날도 끝이 보이는 것에 안도하며 지내는 것이 옳은 것 같다. 오늘이 이런 상황과 이 불편함이 용서가 되는 마지막 날이니 나를 너그럽게 만든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줬다기보다는 내가 무던하고 너그러워진 것으로 무마시키고 싶다. 무엇이 됐든 한숨 돌리는 하루의 시작이다. 눈을 떠도 다시 감아도 시야에 들어오는 주변은 무색하다. 다시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뜨나 마나 한 눈을 뜨고 몸을 돌려서 길게 펼친 보조의자에 똑바로 누웠다. 하얗던 천장을 올려다보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오늘이.. 닷새. 펼친 보조의자 위에 반듯이 누워 엉덩이 옆에 끼워둔 손가락으로 잠시 샘을 해본다. 내가 병원에서 잔 지 사흘, 하루는 동생이 잤다.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신 후 나는 할 수 있는 한 병원에서 자며 아버지를 돌봐 드릴 것을 마음먹었다. 이번에는 아버지께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나는 알고 있다. 아버지와 단둘이서 같이 자며 소소히 돌봐드릴 기회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이왕이면 이런 장소가 아닌 살랑이는 계절에 휴양이 되는 곳이었으면 더없이 좋으련만.. 아버지가 퇴원하시면 내가 시간을 내서 큰일을 벌여보려고 계획 중이다. 그러기에 앞서 편찮으신 아버지께 최선을 다해 불편함 없이 병실생활을 하실 수 있게 도움을 드리고 싶었다. 이렇게 갑작스레 병을 얻은 이유를 알고 있으니 더욱 죄송하고 송구스럽다. 다만 나의 며칠간에 간병이 건강회복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길 바랄 뿐이다. 닷새 전 세면도구와 갈아입을 옷들 그리고 내가 먹을 간단한 요깃거리와 아버지께 드릴 간식들을 캐리어에 챙겨서 넣어 들고서 출근을 했다. 그러고는 오후근무가 끝나는 밤 11시에 퇴근을 하자마자 근무지 지하에 탈의실로 급히 달려가서 근무복을 갈아입고 캐리어를 들고 버스정거장으로 부랴부랴 향했다. 그런데, 캐리어 바퀴소리가 이렇게 크게 들리는지 낮에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출근하던 낮에는 요란한 도로 위의 자동차소리와 오고 가는 여러 사람들의 말소리에 묻혀서 캐리어의 바퀴소리가 신경 쓰일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거리의 사람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고요한 밤이 되니 나의 캐리어 바퀴 소리만 도드라져 많지 않은 주변사람들의 시선을 한꺼번에 받았다. 그러나, 얼마 남지 않은 버스 도착 시간을 행여나 놓칠세라 그들의 시선을 알아차렸지만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심장이 터질 듯이 캐리어바퀴소리와 함께 뛰듯이 걷다가 또 뛰기를 반복했다. 내가 빠르게 뛰면 캐리어바퀴 소리도 크고 빠르게 허공을 뒤 흔들고, 내가 다시 천천히 걸으면 캐리어도 잠시 한숨을 돌리는 것같이 조금 잠잠해졌다. 이 상황이 몇 번 반복되니 마치 내가 일부러 즐기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대인배같이 느껴졌다. 다시 캐리어를 들며 끌며 뛰다 보니 몇 년 전에 길에서 넘어져서 다쳤던 오른쪽 무릎이 나에게 잊고 있던 그날을 설마 잊었냐는 듯 통증으로 신호를 보냈다. 제발 그날의 고통을 생각해 달라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코앞에 닥친 버스 시간이 통증을 느끼고 천천히 걸을 여유를 주지 않았다. 오히려 이 와중에 오래되어 낡은 캐리어에 바퀴라도 빠지면 낭패인데 하며, 수시로 바퀴 쪽을 바라보며 더욱 속 도를 내어 뛰었다. 설사 바퀴가 빠진데도 다른 조치는 없다. 그냥 들고뛰는 방법밖에는 없다. 버스정거장 앞에 건널목에 와서야 쌓여서 터질 것 같은 한 보따리의 숨을 몰아서 쉬었다. 그리고, 그제야 무릎이 보내는 신호를 알아차릴 여유가 잠시 생겼다. 욱신 욱신 아픈 오른쪽 다리를 들어 허공에 둥글둥글하게 휘저으며 잠시 통증을 달랬다.
'나도 네가 아파서 힘들어하는 것을 알고 있어. 하지만, 지금은 잠시만 참아줄래?'라고 되네이며 참아본다. 이윽고, 저 멀리 깜깜한 공기 속에서 버스 한 대가 밝은 실내등 불빛으로 존재를 드러내며 정거장 쪽으로 유유히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나의 다급한 마음이 절정에 이르렀다. 신호가 빨리 초록색으로 바뀌기를 발을 동동구르며 초조히 기다렸다. 1초가 10분처럼 느껴졌다. 뛸 준비를 한 나는 100m를 10초 안에 돌파할 것만 같은 마음을 먹었다. 멀리서 버스가 서서히 가까이 오자 내 앞에 신호등도 이와 맞춘 것처럼 순식간에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나는 몇 명 안되는 주변사람들에 귀를 따갑게 하는 캐리어의 바퀴소리를 도로에 뿌리며 내달렸다. 등뒤에서 그들이 미간을 찌푸리는 시선들이 찬 겨울밤의 공기를 타고 느껴졌다. 기어코 버스에 올라탔다. 드문 드문 앉아있는 승객들의 의자 사이를 지나서 넓게 비어있는 의자에 앉았다. 나는 참았던 숨을 몰아서 내쉬며 머릿속으로 행여나 버스를 놓치면 어쩌나 하고 염려하고 있던 이 상황이 성공했음에 비로소 안도했다. 만약, 이 버스를 놓쳤다면 고민할 여지도 없이 택시를 타야만 했다. 지하철이 있긴 하지만 자정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라 환승을 하며 위태로운 모험을 하는 것보다는 그 편이 나으리라 생각했다. 그제야 따뜻한 버스 안에 공기가 이불속처럼 느껴졌고 등을 기대고 앉은 의자도 넓고 편안함에 안도했다. 다리도 마저 힘을 풀고 어두운 창밖을 응시했다. 잠시 후 잊고 있던 오른쪽 무릎의 통증이 느껴져서 그제야 오른손으로 천천히 만져주며 달래 주었다. 그러면서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병원에 도착하면 해야 할 것들을 되짚어보는 도중에 아침부터 지금까지 아버지를 돌보던 남동생한테 문자가 왔다. '오고 있지? 도착하기 5분 전에 톡 하면 정거장으로 나갈게'. 오랜만이다. 누군가가 이렇게 마중을 나와준다는 것이. 더군다나 남동생이 마중을 나오니, 알 수 없는 기분 좋은 묘함이 느껴졌다. 지금까지는 어느 장소에서 누군가를 만나게 되면 주로 차를 타고 바로 이동을 했었는데 이렇게 전화로 연락을 해서 시간을 잡고 또 그 시간에 맞추느라 시계를 보며 기다리다 만나서 같이 걸어 간다니 어릴 적 생각이 문득 났다. 다들 바쁘게 움직이고 하루가 다르게 어제 것이 오늘은 변화되어 바로 습득해야만 되는 요즘의 생활 패턴에 비하니, 마치 모든 것들이 잠시 멈춰져 있고 나만 그 시간들을 거꾸로 올라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나와 동생이 어렸을 적에도 서로 마중이나 배웅을 나간 기억이 없던 것 같다. 같이 갔다 같이 오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하긴 그 일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오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기억 속에 있을까 싶어 헛웃음이 나왔다. 아버지가 입원 중인 것은 마음이 아프지만, 동생과의 이런 경험은 추억 속에 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젊었던 시절 두 살 터울에 남동생은 군대를 제대하고 본인의 갈 길을 모색하던 차였고 나는 졸업 후 첫 직장에서 하루하루가 어리숙하고 미숙한 사회인으로 모든 것들이 낯선 첫 경험들의 연속인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매일을 '오늘은 또 무슨 사고를 치려나 '하고 나 자신도 못 미더운 떨리는 출근길을 나서곤 했다. 그러다, 집에 돌아오면 동생은 늘 보는 얼굴, 그 자리에 변함없이 있는 존재로 여겨졌다. 지금도 친정에 가면 굳이 애쓰지 않아도 볼 수 있는 무덤덤하며 편한 흔한 남매사이다. 동생은 아직 결혼을 안 했고, 장남은 아니지만 실질적으로 부모님을 모시고 있다. 그래서인지 친정집의 묵직한 대들보 같은 존재로 느껴진다. 그래서, 부모님의 일로 상의해야 일이 있는 경우 동생과 우선 연락을 하고 추후 결정을 내린다. 그렇게 각자의 삶 속에서 나이 들어가다 편찮으신 부모님으로 인해 서로의 생활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동안도 친정을 가거나 친지들의 행사가 있으면 연락을 주고받으며 지내긴 했지만, 이번처럼 둘만이 긴밀한 약속을 하며 이어져 지낸 적은 흔치 않았다. 아버지, 엄마가 80세 중반을 넘기시는 고령이 되셔서 편찮으신 일은 마음 아프고 힘도 들지만 평소 사이좋은 자매들이 부러웠던 나는, 요즘 그 부러워하던 자매는 없지만, 그 못지않게 남동생과 많은 이야기를 하며 형제애를 느끼고 있다. 어린 시절에 동생의 성격이 시간이 흘러 중년이 되니 자연스레 변화된 것도 느꼈다. 그때는 젊은 혈기로 공격적이고 자신감 가득했던 성격이었지만, 이제는 멀리서부터 기세를 안고 덤벼드는 세찬 파도의 물살과 거칠 것 없이 몰아치는 바람에 서로 부대 끼고 치이며 맥없이 깎이여 이리저리 뒹굴다 반질 반질하며 둥글둥글 해진 몽돌처럼 자연스럽고 모나지 않게 바뀐 것 같다. 새삼 동생이 느끼는 지금의 나도 그러하길 바라며 어떨지 궁금했다. 최근 서너 달 동안 동생과 함께 부모님과 관계된 여러 가지 일들로 하루가 멀다 하고 통화를 하다 보니 나의 가족들보다 더 많은 대화를 나눈 것 같다. 왠지 가슴 가득 뿌듯함이 가득 찼다. 동생과 대화하며 맺은 공감대가 자연스레 가슴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음이 느껴졌다. 어쩌면 나는 오래전부터 동생과 서로의 생각들을 공유하며 친밀한 관계를 갖고 싶었던 바람이 마음속에서 자라고 있었나 보다. 어렸던 그 시절 누나와 동생처럼 말이다. 조금 전까지만해도 흐르는 시간과 나의 속도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주라도 하듯 숨찬 순간을 지난 것과 달리 지금 상황과 대비하니 현실감이 없었다. 노곤한 몸을 버스의자에 기대어서 바라보는 차창 밖은 고요하고 차분하여 모든 것이 잠시 멈춘 것 같았다. 아까의 내가 지금의 내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나는 스르르 눈꺼풀이 내려와서 오른쪽 무릎 위에 얹힌 팔을 내려놓고 트렁크에게 자리를 양보하느라 모았던 두 다리도 편히 벌리고 의자에 머리를 기댔다. 잠시 후 '다음 정거장은 이화여대 후문입니다'라는 안내방송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드렁크와 가방을 챙겼다. 그새 깜박 잠든 것이 한참 동안 자고 일어난 것 같았다. 잠시 주변을 살피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런 와중에도 안내 방송을 듣고 잠에서 깬 내가 기특했다. 버스문쪽으로 향하다 어김없이 존재감을 드러내는 캐리어의 바퀴소리가 신경 쓰여서 살짝 들고서 버스에서 내렸다. 자정이 지난 시간이라 그런지 늘 학생들과 병원 방문객 그리고 외국인으로 붐비던 정거장과 거리가 눈에 띄게 한산했다. 나는 남동생이 이미 나와있을 것 같아서 잠시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저 멀리 횡단도보 건너편을 보니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주머니 속에 손을 꽂고 서 있는 작지 않은 남자 한 명이 서성이는 것이 보였다. 우둑커니 내 쪽을 향해서 서 있는 것이 동생임을 확신했다. 마침 동생도 어둠 끝에 서있는 내가 누나임을 알아차렸는지 먼저 머리 위로 손을 들어 흔들었다. 나도 웃으며 손을 살짝 흔들어 보였다. 순간 동생에게 참 오랜만에 해보는 손짓이란 생각에서 인지 쑥스럽고 어색해서 얼른 손을 내렸다. 지금껏 딸들이나 친구들에게는 이런 손짓을 해도 지금과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었는데 나의 이런 모습이 그동안 동생과의 관계를 대변하는 것 같아 씁쓸하고 도리어 미안했다. 동생에게 가는 이 순간의 별것 아닌 행동을 통해 누나이고 또, 가족인 내가 지금까지 내 앞에 것만 챙기느라 놓친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는 말이 머리를 스치 듯 지나갔다. 서서히 어둠 속에 묻혔던 동생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횡단보도 앞에 이르자 건너편의 동생도 내가 서 있는 횡단보도 쪽으로 걸어왔다. 동생이 다 다르자 '추운데 기다리느라 애썼어.'라는 머릿속 혼잣말을 보내고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바라봤다. 동생도 엷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건너편에 서 있는 나를 바라봤다. 순간 흩어지고 빛바랜 어린 날의 기억을 떠 올려본다. 동생과 나, 둘 다 어렸던 초등학교 저 학년쯤, 엄마 아버지가 일 하러 가시고 둘이서 밖에서 놀게 되면 나는 항상 동생 손을 잡고 다녔다. 혹여 고무줄바지가 흘러내려서 엉성하게 걸쳐 있을 때면 다시 옷매무새를 다정히 봐주고, 콧물이 흘러내려서 훌쩍일 때면 콧물을 닦아주며 두 살 터울이지만, 나는 엄마라도 된 듯 여러모로 동생을 챙겨 주었다. 아마 엄마가 집에 안 계신 날들이 대부분이니 내가 동생을 잘 돌봐야 된다는 누나로써 책임감이 무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지금도 어쩌다 아기들에 인형 같은 손가락을 볼라치면 어릴 적 동생의 새끼손가락이 너무 귀엽고 보드운 느낌이 좋아서 계속 만지작거렸던 기억이 떠오른다. 동생과 나 사이의 빨간 신호등의 숫자가 '32'를 보이며 줄어들기 시작했다. 나는 1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건너편에 서 있는 남동생의 모습을 정면으로 슬그머니 자세히 봤다. 이 상황을 앞세워 자연스럽게 거침없이 쳐다보았다. '동생도 이제 50대 중반의 제 나이같이 보이는 구나'. 이마도 많이 넓어지고 머리카락도 줄고 어깨에도 살집이 붙고 처져서 두리뭉실하며 무엇보다 배가 상당했다. 풍채에서 전반적으로 다부져 보이는 것이 줄어들고 둥글함이 느껴졌다. 사람은 그대로인데 두 모습이 교차했다. 그러면서 나 또한 동생과 불과 두 살 차이밖에 안 나니 별수 있으랴 하며 인정했다. 안간힘을 써도 세월은 말없이 사람을 바꾸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공허함이 몰려왔다. 어릴 적에 '누나, 누나' 하면서 귀찮을 만큼 나를 쫓아다니던 코흘리개 동생이었는데 말이다. 그러면서 오늘 입원하신 아버지께 가는 이유와 그 병원의 건너편 횡단보도 앞에서 누나를 마중 나와 서 있는 동생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인간은 시간의 흐름과 비례하여 나이 들어 늙으며 자신도 잊고 있는 사이에 생의 끝을 향하여 야금야금 다가가고 있다는 불변의 섭리를 다시 한번 깨달았다. 또한 인간은 흐르는 시간 앞에서 아무리 저항하며 애를 써봐도 속수무책으로 끌려가야만 하는 한낱 미물이란 생각도 들었다. 저항하려 아등바등해봐도 의미 없는 몸부림 일 뿐이다. 자연의 순리에 수긍하면서 또한 그것을 거스르지 않고 살고 싶은데 이 또한 어려운 건 아직까지도 나의 욕망을 꺾을 만큼의 어른이 못 된 탓으로 돌리고 싶다. 어린 시절 아이들과 재잘거리며 온 동네를 사방으로 다니며 빈틈없이 뛰어다니고 웃고 소리치며 놀았다. 그러다 엄마가 골목 귀퉁이에서 저녁밥을 먹으라고 부르면 그제야 어스름히 해가 기울고 저녁이 되어있음을 알았다. 동네를 뛰어놀던 그때의 시간만은 다른 때 보다 두 배는 빠르게 흐르는 것 같았다.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가 집안에 진동하는 구수하고 포근한 밥냄새에 그제야 허기를 느끼며 집이 주는 평안의 공기를 온몸으로 들이마셨다. 내가 들어오기 전부터 안방 가운데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던 둥그렇고 짙은 갈색 나무밥상에 할머니를 비롯해서 여섯 식구가 옹기종기 다닥다닥 앉았다. 고등어구이와 된장찌개 그리고 김치. 내세울 것 없는 반찬들이지만, 방금 지은 흰밥과 함께 먹으니 세상에 오직 이 밥상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단출한 밥상에 여섯 식구의 팔꿈치가 서로 닿으며 부대끼면서 먹던 그 시절 어느 저녁의 여섯 식구의 밥상이 그립다. 그때 우리 집 안방에 앉아 계시던 젊으셨던 엄마와 든든한 기운이 가득했던 아버지를 다시 보고 싶다.
뭐가 그리 바빴을까?
급하게 걸어오느라 주워 담지 못한 유년시절의 추억과 그리움들이 나의 봄, 여름, 가을, 겨울 속 구석구석에 흩어져 있음을 알았다.
어느새 초록색으로 바뀐 신호등을 보고 뛰듯 걸어서 동생이 기다리고 서 있는 건너편으로 다가갔다.
나를 보고 쓱 웃는 동생의 입가에서 반가움이 느껴졌다. 나는 근무를 끝내고 이 늦은 시간에 여기까지 오기의 과정을 투정하듯 늘어놓았다. 동생은 내게 저녁밥은 먹고 오는 거냐며 역시나 내 옆에서 요란스럽게 소리를 내는 캐리어를 대신 들어주며 말을 건넸다. 서늘하고 차가운 11월의 밤공기 속으로 나의 입김과 동생의 입김이 서로의 말소리를 타고 연기처럼 흩어졌다 이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