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

김홍도 <서당> 외

by 안노라

엄마, 삐졌어. 무슨 딸이 이리 비싸? 얼굴을 볼 수가 없네. 중간고사에, 축제에, 기념일에, 가뜩이나 바쁜 5월인 건 알지만 어쩌면 오늘 올 수도 있다고 했잖아. 엄만 느루 얼굴을 카톡 프사로 본다구. 카톡 프사에 예쁜 셀피(selfie)가 많던데 완전 연예인이더구먼. 느루 모습도 예쁘지만 바닷가 낯선 풍광도 근사하고 오밀조밀한 카페도 궁금하더라. 하지만 엄만 이게 뭐야! 나, 엄마 안 할래. 이제 전화 와도 안 받을 끄야. 느루가 불러도 대답 안 할끄야. 그리고 용돈도 안 줄끄야. 치사하다고? 그럼 빨리 집에 오던지.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이 고3 담임선생님 찾아뵌다고 한 날이구나. 내 정신 좀 봐. 정말 고마운 선생님이라 엄마도 찾아뵙고 싶다. 느루 고3 때, 그 선생님 아니었으면 정말 힘들었을 거야. 엄마가 한참 투병 중일 때라 느루가 맘 편히 진로에 대해 의논하지도 못했을 텐데 다행히 선생님이 엄마 역할을 해 주셨지.



원서 접수 직전, 진로 상담 갔던 날 생각난다. 담임 선생님은 항암 부작용으로 눈, 코, 입 구별이 안될 정도로 퉁퉁 부은 엄마의 얼굴을 보며, 느루는 노력하는 아이라고, 끈기 있는 아이라고 하셨지. 시간이 많지 않고 어머님 병환으로 마음도 힘들겠지만 아이가 끝내 지치지 않을 것을 믿고 대학을 지원해 보자고 하셨어. 넌 원하는 심리학과에 지원했고 합격했어. 선생님이 끊임없이 널 믿고 독려해 주시지 않았다면 대학 합격이 힘들었을 거야. 며칠 있으면 스승의 날인데 딱 생각나는 그림이 있구나.


너, 이 그림 본 적 있니?



서당 김홍도.png 김홍도 <서당>



이 그림이야말로 누구나 보았고 어디에도 있으나 흘낏 지나쳐버리는 우리 그림이지. 그림의 고전이라고 할까? 고전의 조건을 아니? 책장에 꽂혀 있으되, 누구도 끝까지 읽은 이는 없는 책이야. 물론 우스갯소리지만 아무래도 고전이라는 육중한 무게는 완독이 쉽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하지. 그건 그림에도 적용돼. 명화의 자격은 누구나 보았으되, 아무도 세세히 들여다보지 않는 그림이니까. 오늘 엄마랑 이 그림 살펴볼까?



한 학동이 훈장님에게 종아리를 아프게 맞았나 봐. 숙제를 다하지 못한 걸까? 아님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한 걸까? 아이는 한 손으로 댓님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어. 아이는 억울한 듯, 창피한 듯, 몸을 웅크렸네. 그 와중에 왼쪽의 아이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는 터지는 웃음을 참고 있어. 마치 "아프지?"하고 놀리는 것 같아. 왼쪽 줄은 행여나 훈장님이 다음번에 부르실까 염려되는지 열심히 외우는 모습이야. 오른쪽을 볼까? 일찍 장가를 간, 갓 쓴 학동이 있구나. 얼굴이 환한 걸 보니 훈장님의 질문에 너끈히 대답할 기세야. 아래 아이는 무척 총기 있어 보여. 가르마가 단정하고 자세도 흠잡을 데 없어. 그다음 아이는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해. 어라, 그다음 학생은 무척 주눅이 들은걸. 잔뜩 겁먹은 표정이야. 앞에 계신 훈장님은 학동들의 얼굴만 보아도 누굴 시켜야 할지 아실 듯 해.



회초리를 든 훈장님은 아이의 모습이 우스운 지 근엄한 표정 반, 미소 반이시구나. 꾸중은 하셨으되 울고 있는 아이를 보니 귀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한 모양이야. 게다가 화가는 대각선 구도에 관람자의 상상 공간을 확보하듯 널찍하게 앞 쪽을 열어 두었어. 시선은 웃음을 담은 훈장에게서 울음을 훔치는 아이에게로, 그리고 좌 우로 앉아있는 여러 학동들의 소란과 들뜸으로 옮겨가지. 그림 전체에서 '까르르' 웃음소리가 굴러다녀. 눈으로 보지 않고 온 몸으로 느낀다는 명화의 조건을 확인하게 해 주는 그림이야.





느루도 단박에 누구 그림인지 알지? 대한민국 교육부 공식 지정 화가 김홍도(金弘道, 1745~1806?)의 <서당>이라는 작품이야. 김홍도는 영조 21년(1745)에 태어났어. 졸년은 환갑은 넘겼다 추측하지만 확인되지 않았지. 그의 화력(畵力)은 29세의 나이에 영조의 어진화사(御眞畵寫)를 담당할 정도였지만, 그의 눈은 평민들의 소박하고 단출한 삶에 자주 머물렀어. 그의 <속화첩>에는 우리가 익히 아는 <씨름>, <우물가>, <새참>, <집짓기> 등 부드럽고 따뜻한 눈으로 서민의 시간을 바라보는 그의 애틋한 시선이 녹아있지.



이 그림을 보니 엄마의 중학 시절이 생각나는구나. 신학기가 되자 영어 선생님이 다음 수업에 영시를 한 편씩 적어오라고 숙제를 내셨지. 원래 숙제란 당일이 되어야 생각나는 법이잖아. 이틀 뒤 점심시간, 학교 도서관은 60여 명의 친구들이 죄다 영시를 찾아 한 편씩 베끼느라 아수라장이었어. 익숙지도 않은 영어라 당연히 모두들 아주 짧고 간단한 시를 옮겨 적었단다. 그런데 숙제 검사를 하던 선생님이 갑자기 엄마 이름을 부르셨지. 상징적 의미가 깊은 시를 적어 왔다고 하시면서 낭송해 보라고 하셨어. 영어로 읽으며 얼마나 떨리던지... 실은 짧은 시는 이미 다른 친구들이 적어버려서 어쩔 수 없이 조금 긴 시를 옮겼었거든. 어쨌든 선생님의 칭찬이 계기가 되어 이후 시집을 많이 읽게 되었지. 하지만 일 년 동안의 영시 암기는 괴로운 일이었구나.



느루도 김홍도의 작품은 많이 알고 있을 거야. 그중 엄마가 가장 애정 하는 그림이 있단다. 어린 시절, 바다가 보이는 안산에 머물렀다는 그가 사람들의 고단한 삶을 보며 남긴 작품이야. 이 그림은 마치 기억을 담고 있는 USB 같아. 단숨에 엄마의 그때, 그 추억 속으로 돌아가게 하거든. 그림을 소개하기 전에 이 그림에 연관된 엄마의 얘기 하나 얘기해 줄게.



엄마도 엄마를 믿어 주시고 진로를 안내해 주시던 고마운 은사님이 계시단다. 동아리 지도교수님이셨어. 어렵게 학교를 다니던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지. "네게 동생이 없다면 나중에라도 학업을 계속할 걸 믿어 의심치 않는다. 넌 똑똑하고 착하고 성실한 아이니까. 하지만 막상 동생들 돌보다 보면 공부를 계속하기가 쉽지 않아. 그러니 눈 질끈 감고 지금 독일로 가거라." 졸업을 앞둔 엄마는 교수님의 말씀으로 깊은 고민에 빠졌지. 그리고 스물셋, 나침반 없는 겨울여행이 시작되었어.





겨울이었고 소리는 입 밖에 나가자마자 얼어버려 어떤 언어도 상대에게 닿지 못할 만큼 추웠어. 기차를 타고 순천에 내린 뒤 다시 배를 탔지. 강철 두드리는 망치 소리를 내며 공기를 팽팽하게 당기는 혹독한 겨울바람도 바다를 전부 얼릴 수는 없었나 봐. 먼바다에서 용왕님이 몸을 뒤척이며 물 너울을 만들고 있는 소리가 들렸으니까. 파도는 쉴 새 없이 뱃전에 와 부딪쳤고 곱은 엄마 손엔 섬을 소개하는 잡지가 들려 있었어. 정신지체 장애인들이 모여 사는 섬이라는 기사였지.



낡고 때가 낀 목선을 타고 작은 섬으로 향했어. 바다엔 노을이 엎어져 있었지. 통통배는 너울에 뒤뚱거리는데, 30여분을 가자 석양 속에 가물거리는 섬과 하늘과 바다를 잇는 검고 가파른 장대들이 보였어. 장대 사이사이로 잔치 손님을 맞는 어머니의 앞치마처럼 검고 넓고 고른 주름이 섬 앞에 펼쳐져 있었지. 그때 김 양식장을 처음 보았어. 검게 반짝이는 해초 위에 바다와 바람의 무늬가 물들어 있더라. 김은 장대 사이로 김 포자가 붙은 발을 걸어 물이 들 때 키우는 거야. 물이 나고 갯벌이 드러나면 바람이 뜀박질을 해 가며 말려 놓지. 그렇게 바다와 바람은 도톰하고 고소하고 깊은 맛이 나는 김을 만들어. 배에서 내리자 모든 소리를 지워버린 듯 고요했구나. 하늘은 도화지에 붉은 물감을 쏟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어린아이 같았고 그걸 바라보는 난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어. 지금도 왜 그랬는지 알 수가 없어. 너무나 아름다워 서였을까? 아마도.



커다란 개가 노을을 향해 짖고 엄마에게 달려와서는 꼬리를 흔들었단다. 섬에 살던 분들은 추위에 얼어 터진 손으로 매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김 양식장을 돌보고 있었어. 얼굴에 허연 각질과 빗물이 고일만큼 주름이 깊었지. 이가 서너 개 밖에 남지 않았는데 엄마 손을 잡고 크게 웃었어. 그분들의 손은 차고 딱딱해서 발을 잡는 것 같았어. 소리가 얼어버려 다행이었지. 그러지 않았다면 누군가 엄마의 울음소리를 들었을 테니까. 사나흘을 그분들과 함께 보냈단다. 그 시간은 날 새롭게 일으켜 세웠어. 섬을 나오면서 방황으로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된다고 결심했어. 내게 주어진 책임에서 도망가지 않으리라 다짐도 했지. 그때 비로소 엄마는 교수님이 여러 번 권유했던 독일 유학을 포기했단다. 대신 다음에 꼭 학업을 계속하리라고 약속했지.


엄마 얘기가 길어졌구나. 이제 그림을 보여줄게.



김홍도 <고기잡이>



지금 '생선'이라고 하면 짭조름한 고등어, 구수한 명태 등 바닷고기를 떠 올리지만 조선시대 생선은 주로 민물고기였단다. 먼바다로 그물질을 나가기엔 어선이 발달하지 못했거든. 뭍에서 가까운 내만 어업이 주를 이루었어. 먹거리는 바다와 강이 만나는 곳의 생선인 연어, 숭어, 조기, 청어 등이 많았고 생선을 잡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소금에 절여 젓갈을 만드기도 했어.



느루야, 조수간만의 차를 이용해 얕은 바다에 말장을 둘러 박아 만든 울짱이 보이지? 말장은 나무를 가늘게 다듬어 깎아서 만든 나무 말뚝이고 울짱은 밀물 때 들어온 고기가 썰물 때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든 설비야. 어부들은 말장을 날개 형으로 펼치고 울짱 한쪽에는 통발을 달거나 그물을 걸었어. 이윽고 밀물과 썰물을 지나 울짱에 물고기가 많이 들어온 걸 확인하면 울짱 안으로 들어가 물고기를 떠서 배에 저장했단다. 김처럼 드나듦을 조절해 먹거리를 만드는 구조지. 옛사람들의 오랜 고기잡이 방식이었어.



자세히 보면 울짱 안에 있던 두 명의 어부가 소쿠리에 담은 생선을 바깥쪽 배에 있는 어부에게 건네주고 있어. 배에는 커다란 항아리가 있지. 생선을 담는 항아리겠지? 게다가 앞 쪽의 배 안에는 항아리뿐만 아니라 두 개의 작은 솥단지도 보여. 배 안에서 음식을 조리해 먹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살펴보면 낯설고도 흥미로운 광경이야. 맨 앞의 움막을 친 배에는 어부들이 통발을 수리하며 쉬고 있네. 그림 오른쪽 위 편, 갈매기들이 울짱 주위 하늘에 포물선을 그리고 있어. 까치밥을 남겨두는 것처럼 갈매기들을 위해 몇 마리의 생선을 남겨 두었나 봐. 갈매기들의 날갯짓 소리, 어부들의 웃음소리가 화면 밖까지 명랑하게 쏟아지는구나. 아름답지?



느루야, 서민들의 고된 삶 속에 깃든 여유와 서정(抒情)을 노래한 김홍도에게도 느루와 엄마처럼 그를 조선 최고의 화가로 만든 훌륭한 스승님이 계셨단다. 김홍도가 이 분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의 재능과 기량이 그토록 드러날 수 있었을까?



표암 강세황 <자화상, 1782>



김홍도가 안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때, 마침 그 동네에 문인이자 화가로 이름 높은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 1713~1791)이 살고 있었지. 그분은 대대로 명문가였는데 맏형 강세윤이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유배를 가게 되고,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노론의 협량한 정치에 환멸을 느껴 32살 즈음 처가가 있는 안산으로 내려와 계셨어. 그는 조선 사대부의 교양인 시(詩), 서(書), 화(畵)에 뛰어난 문인화가이자 당대 최고의 예술평론가이기도 했어. 당시의 그림엔 그림과 함께 제화(題畵)를 올리는데 사람들이 좋은 그림을 구하게 되면 그에게 와서 그림 품평뿐 아니라 제화를 써 달라는 문의가 끊이지 않았다는구나.



느루야, 표암은 무척 마음이 너그럽고 품성이 부드러우셨던 것 같아. 신분에 대한 차별 없이 누구에게든 글을 가르쳐 주셨다고 해. 표암은 단박에 어린 김홍도의 중인이라는 신분보다 탁월한 천재성을 알아보셨어. 김홍도를 제자 삼고 그림과 글을 가르쳤지. 후에 제자인 김홍도를 '무소불능(無所不能)의 신필(神筆)이라고 극찬하며 그의 재능을 아끼고 키우는데 마음을 다하셨구나. 김홍도를 도화서 화원으로 추천한 분도 표암이라고 해.



더 감동적인 일은 김홍도가 영조의 어진을 그린 포상으로 관직을 받아 사포서(司圃署)라는 곳에 있을 때, 표암이 그곳의 상사(上司)인 별제(別提) 직을 제수받아 함께 근무하게 된 거야. 이때 표암은 지위를 염두에 두지 않고 김홍도를 제자이자 벗으로서 의견을 나누고 진정으로 단원을 응원했구나. 1786년 강세황이 김홍도에게 써 준 ‘단원기(檀園記)’라는 글에 두 사람의 한결같고 맑은 우정이 담겨 있어. 신분의 차이뿐 아니라 나이 차이가 많은 스승과 제자 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강세황은 김홍도를 '예술계의 참된 친구'라고 말했단다.


“나와 김홍도의 사귐은 앞뒤로 세 번 변했다. 시작은 그가 어려서 내 문하에 드나들 때로 그의 재능을 칭찬하기도 하고 그림 그리는 비결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중간은 같은 관청에서 아침저녁으로 서로 마주했다. 마지막은 함께 예술계에 있으며 참된 친구의 느낌이 있었다.”



느루야, 스승과 제자 사이였던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에서 직장의 상하관계로, 또 마지막엔 예술의 벗으로 지냈지. 우리의 역사에 이런 아름다운 관계가 있음은 황홀한 축복이야. 표암은 18세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예술가이자 예술평론가, 또 위대한 교육자로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스승이란다. '참된 스승은 친구가 될 수 있어야 하고 진정한 친구에게선 스승의 모습이 있다.'는 말의 울림은 넓고 깊구나.



김홍도 <송하맹호도>



느루야, 김홍도와 표암이 서로의 벗이 되어 호랑이는 단원이, 소나무는 표암이 그렸다는 합작도, <송하맹호도>를 보여줄게. 엄만 이 그림을 보면 나도 모르게 움칫 어깨를 뒤로 빼게 돼. 호랑이의 형형한 눈빛이 속된 표현으로 "눈 깔아." 하는 것 같잖아. 우러러보기만 할 뿐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위엄과 전설의 뼈대에 덧입힌 근육의 파워가 동시에 시선을 압도하지. 우아하고 유연하게 흐르는 등줄기, 집중과 탄력을 보여주는 빽빽한 털, 맹수의 왕이라는 자부심의 높이까지 치솟은 꼬리, 헛되고 잡스러운 기운을 누르는 앞발, 자신이 위대한 영물임을 증명하는 빙심(氷心 : 맑고 깨끗한 마음)의 눈!



게다가 저 털을 보렴. '알브레히트 뒤러의 산토끼'가 부끄러워 그만 토끼장 속으로 들어가고, 결혼식을 올리던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는 서둘러 결혼식을 끝내고 피로연을 열었을 것 같지 않니? 돋보기를 들이대고 그린 듯한 유럽의 사실주의가 무색할 만큼 수천 번 수만 번의 붓질을 통해 터럭 하나하나를 살려 낸 단원의 공력은 그야말로 예술에 대한 지극한 헌신이 아닌가 싶어.



느루야, 큰 덕을 지닌 대인(大人), 선비의 자기 개혁을 뜻하는 호변(虎變)의 상징인 호랑이가 돌아 나온 소나무 위 가지도 보자. 옛 사림들은 추운 겨울, 산천이 허허롭고 적막할 때 홀로 푸른 소나무를 보며 역경에도 꿋꿋한 선비의 모습을 오버랩시키곤 했지. 그래서 옛 그림엔 소나무와 호랑이를 함께 그린 작품이 많아.



험준한 바위틈에 뻗은 굳세면서도 고아한 소나무의 풍취가 느껴지지. 노송의 거칠고 굵은 둥치가 겸손히 누었고 그 아래 잔가지들이 뻗었구나. 화면이 뒤둥그러지지 않도록 가지를 오른쪽으로 길게 빼 무게와 여백을 분산시켰어. 역시 숙련된 대가의 솜씨답지. 표암의 노련함은 소나무 굵은 둥치 한가운데의 긴 자국에도 나타나. 이건 호랑이가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기 위해 소나무를 북북 긁은 자국이라고 하는구나. 우리 옛 그림의 스승인 오주석 님이 밝히셨단다. 또 이 소나무를 이인문(李寅文, 1745~ ?)이 그렸다는 주장도 있어. 학자들의 근거 있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엄만 왠지 표암과 단원이 그렸다는 쪽으로 결론이 났으면 좋겠어. 이제는 사라지고 있는 사제간의 정(情)을, 예술인들의 고매한 교류를 잃고 싶지 않은 마음 탓일까?



김홍도 자화상.jpg 김홍도 <자화상, 18세기>



느루야, 선생님께 잘 다녀오렴. 오랜만일 텐데 피자라도 사 들고 가면 좋겠네. 그리고 보니 우린 부자다. 그치? 김홍도처럼 스승의 날에 뵙고 싶은 은사(恩師)가 있으니까. 우리가 어엿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손을 잡아 주신 분이 있다는 게 인생의 얼마나 큰 재산이니! 엄마의 잊지 못할 시 한 편을 들려주고 편지를 끝내마. 이 시 덕분에 교수님께 한 '다음에 꼭 학업을 계속하리라.'던 약속을 지킬 수 있었어.



네가 교환학생으로 유럽 갔을 때, 엄만 다시 공부를 시작했지. 아주 늦은 나이였는데 말이야. 시험을 치르고 면접을 보러 가는 아침엔 떨려서 이가 딱딱 마주치더라. 겨울이었고 바람이 불어 엄마의 짧은 머리가 벌초하지 않은 봉분처럼 제멋대로 곤두섰지. 긴 대기시간이 지나 교수님들 앞에 앉았어. 손으로 허벅지를 꽉 눌렀단다. 엄마보다 10년은 젊어 보이는 교수님이 물으셨어.


"영어가 좀 부족하네요. 원서로 공부해야 하는 과목이 있습니다."


그때, 뭐라고 말해야 했을까? 엄마는 중학교 영어 선생님 앞에서 덜덜 떨면서 낭송했던 시를 암송했단다.



Stopping by Woods on a Snowy Evening 눈 내리는 밤 숲가에 멈춰 서서


Whose Woods these are I think I know 이게 누구의 숲인지 알 것 같다

His house is in the village, though; 하기야 그의 집은 마을에 있지만

He will not see me stopping here 눈 덮인 그의 숲을 보느라고

To watch his woods fill up with snow 내가 여기 멈춰서 있는 걸 그는 모를 것이다.


My little horse must think it queer 내 조랑말은 농가 하나 안 보이는 곳에

To stop without a farmhouse near 일 년 중 가장 어두운 밤

Between the woods and frozen lake 숲과 얼어붙은 호수 사이에

The darkest evening of the year 이렇게 멈춰서 있는 걸 이상히 여길 것이다.


He gives his harness bells a shake 무슨 착오라도 일으킨 게 아니냐는 듯

To ask if there is some mistake. 말은 목방울을 흔들어 본다.

The only other sound's the sweep 방울 소리 외에는 솔솔 부는 바람과

Of easy wind and downy flake. 솜처럼 부드럽게 눈 내리는 소리뿐


The woods are lovely, dark and deep. 숲은 어둡고 깊고 아름답다.

But I have promises to keep, 그러나 나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잠자기 전에 몇십 리를 더 가야 한다.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잠자기 전에 몇십 리를 더 가야 한다.


by Robert Frost 로버트 프로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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