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루야, 시간이 늦었는데 친구는 잘 만나고 들어갔니? 우리 때는 남자와 여자는 연애 상대였지 친구가 되리라고는 생각 못했구나. 사회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아직 다양한 인간관계를 만들기엔 여러모로 부족해서였는지는 모르겠어. 그저 통상적으로 남녀의 관계가 한 발자국 진전될 때마다 '결혼'이라는 구체적인 그림을 그렸던 것 같아. 남자 친구라는 개념도 낯설었으니까. '오빠'거나 '애인'이거나 했어. 너무 촌스러운가? 21세기를 살아가는 너희들에겐 훨씬 폭넓은 인간관계가 존재하겠지. 정말 남자와 여자의 우정은 가능한 걸까? 흔히 사람들이 말하듯, 그저 섹스가 가능한지 아닌지의 여부였을까? 오십이 넘으면 인생의 여러 문제에 자신만의 답을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엄만 아직도 모르겠구나.
오늘 식탁 다리를 괴려고 쪼가리 장판을 찾다 편지 뭉치를 발견했어. 누렇게 변색되고 귀퉁이가 닳고 쥐오줌 냄새가 나는 편지 다발이 엄마 손에 툭 떨어지지 않겠니. 편지 봉투에 있는 이름을 한참 생각했단다. 엄마의 머리 속도 가끔씩 청소기로 청소해 줘야 할 것 같아. 먼지가 너무 끼었어. 찾던 장판은 제쳐두고 벽에 기대고 앉아 주섬주섬 뒤적여 보았단다. 말을 더듬듯 글도 더듬었더구나. 편지 속엔 운동복에 하이힐을 신은 물색없는 청춘이 길을 찾고 있었어.
갑자기 공원엘 나가고 싶었지. 텀블러에 커피를 담아 나가 보았단다. 물론 두툼한 겉옷도 걸치고 말이야. 공원엔 아무도 없었어. 짧은 파마머리에 운동화를 신고, 텀블러를 든 오십 대 엄마의 등 뒤에 찰랑거리는 긴 머리를 하나로 묶고 나풀나풀 수다를 떠는 스물둘의 엄마만 있었단다. 마음 가는 대로 걷다 보니 슬그머니 발 끝에서 오래되고 묵은 이 그림이 떠오르지 않겠니?
너, 이 그림 본 적 있니?
에두아르 마네 <제비꽃 장식을 한 베리트 모리조, 1872>
화면 밖을 응시하는 유난히 검고 그윽한 눈동자, 침착하고 반듯한 코, 뭔가 말하려는 입술, 우아한 얼굴 선과 기품 있는 자세. 살짝 흐트러진 머리카락, 검은 모자에 검은 옷이 약간 슬프게도 보이는구나. 제비꽃은 상(喪) 중임을 가리키지. 그녀의 아버님이 돌아가셨어. 아버님이 돌아가신 그녀에게 남은 계절은 가을 아니면 겨울. 그녀의 이름은 베리트 모리조란다.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1832~1883)가 그렸어.
인상파의 아버지라는 마네는 미술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밤을 빼앗는 인물이지. 그만큼 작품이 갖고 있는 파격과 의미가 남다른 화가야. 느루가 잘 아는 <풀밭 위의 점심식사>라든가, 한동안 우리나라를 시끄럽게 했던 <올랭피아>라든가, 철학가들의 눈을 반짝이게 했던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 같은 혁신적인 작품을 선보였지. 그는 작품마다 권총을 장전해 놓고, 구태의연하거나 부패가 진행되는 모든 것들을 쏴 버렸단다. 그리고 '근대의 자유로운 개인'을 마차에 매달고 달릴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달렸지. 하지만 정작 그가 총을 쏘아 지킨 건, '가문의 명예', '집안의 위엄'이었고, 달려가 멈춘 곳은 고독하고 외로웠던 자신의 내면이 아니었을까! 그의 몇 작품과 베르트 모리조와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구나.
에두아르 마네가 그 유명한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발표한 건 1863년이었어. 당시 전통적인 살롱전에서 낙선한 화가들이 모여 <낙선전>을 열었을 때 출품했단다. 이 작품은 사람 손이 닿을 수 없는 높은 곳에 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고 해. 그림을 본 신사들이 불쾌해 지팡이로 치려고 했기 때문이지. 그럼 마네의 이 그림은 왜 그토록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을까?
에드와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식사>, 1863
가운데 옷을 벗고 화면 밖을 쳐다보는 여인이 보이지? 빅토린 뫼랑이야. 올랭피아의 모델이기도 하지. 전통적으로 서양화에서 누드는 아담과 이브 같은 성경 속 인물이거나 아프로디테와 같은 신화 속 여신만이 가능했어. 그런데 옆 집 사는 여자를 누드로 캔버스에 옮긴 거지. 그것도 환락가에서 술을 따르는 옆 집 여자를. 그녀는 파리의 고급 콜 걸이었다고 해. 당시 파리에서는 매춘이 성행했어. 파리의 신사들은 낮에는 품위와 명예를 귀히 여겼지만 밤에는 자유로워지고 싶어 했지. 이 그림을 본 신사들은 자신의 치부가 드러난 것 같은 부끄러움을 느꼈고 전시장에서 당황했단다. 옆에 있는 두 신사는 마네의 동생 외젠 마네와 처남 퍼디난 린호프인데 둘 다 옷을 입고 있잖아.
그런데 꼭 그 점만이 불쾌했을까? 이 그림을 자세히 봐. 납작하지 않니? 질서 있는 회화의 좌표인 원근법은 무시하고, 색은 빛에 의해 얼룩덜룩해. 뒤편엔 조각배가 있고 제 철과는 상관없이 아무거나 마구 담은 과일바구니는 관찰에 근거한 정확성조차 보이지 않아. 관람자와 비평가 모두에게서 기본도 없는 데다 퇴폐적이고 저속하다는 혹평이 쏟아졌지. 오직 문학가 에밀 졸라만이 그를 옹호했어. 어둡고 음울한 위선을 진보적 색채로 고발했다고 말이야. 마네는 회화 기법에 있어서 전통에 저항했고, 회화 내용에 있어서 근대의 개인에게 자유를 선물했지.
마네는 고전 대가들의 작품을 연구해 자신만의 회화양식을 발견하려고 노력했어. 특히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스를 존경했어. 그는 전통적 양식으로부터 회화의 골조를 익히면서도 당대의 현실에서 소재를 찾는 혁신적 감각의 소유자였지.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옛 거장,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1480~1534)의 <파리스의 심판>이라는 그림에서 모티브를 얻었단다.
(왼)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 <파리스의 심판> / (오) <파리스의 심판> 중 오른쪽 하단 부분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당시의 엘리트, 부르주아 신사들의 위선과 도덕적 타락을 비아냥대었다는 평이 많아. 온전히 엄마의 생각이지만 아마 그런 시각을 가졌던 이유가 사회적 위신과 체면을 중요시했던 가족과 자신에 대한 혐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어. 마네의 아버지 오귀스트 마네는 프랑스의 법관이었어. 마네의 어머니는 스웨덴 왕태자 칼 14세의 대녀였고 외할아버지 외제니 데지레 푸르니에는 외교관이었지. 한마디로 존경심 없어도 머리는 조아려야 하는 집안이었단다.
이 그림을 발표했던 1863년, 마네는 아이가 있었던 수잔 렌호프와 결혼해. 그녀는 마네의 아버지 오귀스트 마네의 숨겨진 애인이었다고 해. 그게 사실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소문은 곰팡이처럼 퍼졌단다. 1862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수잔과 그의 아들이 남았어. 체면과 명예가 중요한 가치였던 시대에 가문이 더럽고 추잡한 추문에 휩싸일 지경이 되어서였을까? 마네는 자신보다 열한 살 연상이자 아들이 있는 수잔과 결혼해. 그리고 어쩌면 자신의 동생이어야 할 아이를 아들로 삼지. 그래서인지 이런 그림이 남아있어.
에드가 드가 < 에두아르 마네 부부, 1868>
에드가 드가가 그린 그림이야. 원래는 수잔 마네가 피아노를 치고 있는 모습이라고 하는데 이유는 모르지만 수잔의 얼굴은 잘려 있어. 아내의 등 뒤, 소파에 기댄 에두아르는 무심히 앉아있구나. 사진처럼 단면을 잡아내어 전체를 설명하는 드가 특유의 예리함에서 싸늘한 냉소가 느껴지지. 이 그림으로 봐서는 다정한 부부는 아니었던 것 같아.
마네와 베르트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사 작업을 하던 중 만나게 돼. 베르트는 아름답고 예술적 재능이 뛰어나고 의지도 강한 여인이었지. 남부럽지 않은 가문과 재력도 있었단다. 베르트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결혼하지 않고 자신의 예술세계를 갖고 싶어 했고 몰입했지. 둘은 곧 친밀한 관계가 되었어. 섬세한 그들이기에 지진계의 바늘처럼 작은 진동에도 예민하게 떨리는 감정의 진폭을 함께 느꼈을 테니까. 마네의 거듭된 요청으로 베르트는 그의 모델이 되어주었어. 우리가 익히 아는 작품 <발코니>에서도 베르트 특유의 지적이고 차분한 분위기를 내뿜는 그녀를 만날 수 있지. 마네는 매혹적인 그녀를 여러 번 화폭에 담아.
에두아르 마네 <발코니, 1868>
난간에 팔을 걸치고 먼 곳을 바라보는 그녀를 보렴. 아름답고 귀족적 우아함이 있지. 그녀의 입술은 주로 닫혀 있었지만 눈은 쉴 새 없이 많은 말을 했다고 하는구나. 초록색 양산을 들고 머리에 꽃 장식 모자를 쓴 여인이 아내 수잔이야. 바이올린 연주자 '파니 클라우스'라는 말이 있기도 해. 가운데 있는 정장 신사는 화가인 앙트완 기르메, 뒤 어둠 속에 있는 청년이 아들로 전해진 레옹 코에라야. 작품 속의 네 인물은 각기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어. 모여있되 소통하지 않지. 카페에서 한 테이블에 앉아 각자 톡을 하고 있다고나 할까? 그들은 각자 고독했던 것 같아.
"에두아르가 유부남이 아니었다면 베르트와 에두아르가 결혼했을 거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라고 말할 정도로 둘은 가까웠고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어. 하지만 마네는 결혼한 상태였고 사회적 돌파구를 찾아야 했어. 베르트는 마네를 떠나보낼 수 없었고 에두아르는 그녀를 어떻게든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지. 그래서 동생 외젠 마네와의 결혼을 권하게 돼.
베르트 모리조 <부지발에서 딸과 함께 있는 외젠 마네, 1881>
외젠 마네와 베르트 모리조는 결혼했어. 이제 에두아르 마네와는 넓은 의미의 가족이 되었어. 해자(垓字)가 깊은, 가족이라는 성벽(城壁) 안으로 도피한 둘은 예술적 호흡을 함께 하지. 미술사라는 책에서 마네는 보람 줄로 표시돼지. 결코 그냥 페이지를 넘길 수 없는 화가란다. 그런 화가에게 영향을 받은 베르트는 결혼 이후 작품세계의 큰 변화를 겪어. 인상파 주제였던 빛의 떨림은 더 완숙해지고 구도와 색감도 훨씬 다양해지지. 마네와 베르트는 서로의 성장을 돕는 지지자였고, 뜨거운 예술적 교감을 나누는 동료였으며,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뮤즈이자 고독한 삶을 지탱하는 흔들리지 않는 지표였지. 또 남편 외젠은 헌신적으로 그녀의 작업을 지지해 주었단다. 외젠의 지극한 조력과 마네의 자극으로 그녀는 자신의 세계에 몰입할 수 있었어. 그와 그녀의 감정이 사랑이었든, 우정이었든 그들은 더 성장했고 더 깊어졌지.
에두아르 마네와 베르트 모리조의 우정 이야기는 흔히 막장 드라마에 비유되곤 해. 하지만 타인이란 그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쉽게 평가할 수 없는 대상이지. 게다가 엄만 둔한 신경을 가져 애당초 시비(是非)를 가릴 생각은 없구나. 그저 안타까울 뿐이지. 1883년 마네는 매독으로 왼쪽 다리를 절단하게 되고 고통 속에 세상을 떠난단다. 그를 보내고 힘겨웠던 그녀는 외젠과 에두아르와 자신이 함께 묻힐 가족 묘역을 준비해. 외젠 마네는 1892년에 그녀를 떠났어. 그에 대해 평생 죄책감과 미안함에 시달렸다는 베르트는 불과 3년 뒤, 총총히 그의 뒤를 따르지. 세 사람은 나란히 묻혔구나. 이제 모든 사랑은 지상에서 사라졌어. 흰 눈이 온 세상을 덮듯, 그들을 휘몰아쳤던 감정과 풍문과 소요도 시간 앞에서 자취 없지. 오로지 그와 그녀가 남긴 작품들만이 우리에게 남아 그들을 추억하게 할 뿐이란다.
에두아르 마네 <휴식 중인 베르트 모리조, 1870>
어느새, 공원 한 바퀴를 다 돌았구나. 살짝 땀이 나네. 엄마가 물었던 "남자와 여자의 우정은 가능할까?"라는 질문에 대해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이십 대의 젊은 생각이 궁금하구나. 엄마가 의자에 앉아 30년 전의 얘기를 해줄게. 우리 땐 펜팔이 유행이었는데, 일 년 남짓 편지를 주고받았던 청년, 그래 이름 모를 청년이라고 해 두자. 연합 학생회 일로 인쇄소에서 부딪쳤지. 처음엔 자기 학교 학보에 띠를 둘러 내게 보낸 것으로 시작됐어. 우린 같은 책을 읽었고, 심야 라디오의 같은 프로그램을 들었어. 오가는 편지엔 침을 튀기고, 주먹을 불끈 쥔 서로가 들어있었지. 펜이 칼이었다면 둘 다 회복할 수 없을 만큼 심한 부상을 입고도 '내 적수는 너야.' 하는 둘 사이에 특별한 연대가 있었던 것 같아. 편지가 도착하기도 전에 또 다른 이슈로 거의 매일 편지를 썼구나. 사랑이었는지 우정이었는지는 구별할 수 없었지만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했지. 어쩌면 우정이나 사랑에 대한 환상이 있었는지도 몰라. 알맹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법이니까.
그런데 연합 학생회 회지가 발간되던 날 뒤풀이에 그는 동아리 후배와 같은 티를 입고 팔짱을 끼고 나타났단다. 동시에 나의 편지는 끝났어. 내가 왜 배신감을 느꼈을까? 어쩌면 그때, 내가 나의 감정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던 게 아니었나 싶구나. 어느 쪽으로든 엄만 비겁했단다.
느루야, 만일 엄마가 다시 스물둘이 된다면 "남자와 여자는 친구가 될 수 있다."에 걸어보겠다. 도망가지 말고, 예측하지 말고, 남자든 여자든, 사랑이든 우정이든 부딪쳐 보겠다고 말이야. 너도 그래 보겠니?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각자의 삶에서 어떤 경험을 건지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지. 또 자신이 내린 대답만이 삶의 중심임을 안단다. 가장 나쁜 건 엄마처럼 "모르겠다."는 말이지. 그건 상처가 두려워 온전히 부딪쳐 보지 않은 자의 변명일 테니까. 집에 도착하면 마네의 작품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해 주고 싶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