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첫째 주 - 피테르 브뤼헬 <추락하는 이카루스가 있는 풍경>
매양 똑같은 일상이라고 투덜대는 이 순간에도 창 밖 벚나무는 온 힘을 다해 봄을 피우려 합니다. 찰나의 봄을 느끼네요. 평범한 일상 중 '순간'에 목소리를 입힌 화가, 피테르 브뢰헬의 <추락하는 이카루스가 있는 풍경, 1560>을 가져옵니다.
피테르 브뢰헬(Pieter Brueghel. 1525~1569 추정)은 16세기 북유럽 회화의 중심지인 플랑드르 지방에서 활약했던 최고의 화가입니다. ‘최고’라는 수식어 뒤에 ‘농민화가’라고 해야겠네요. 그는 장엄한 역사화나 종교화가 대부분이었던 당시의 미술에 농민, 장애인, 걸인 등 사회 하층민이거나 소외된 사람을 소재로 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단순히 기록적인 풍속화로서의 의미만이 아니라 평범한 이들을 그림 전면에 내세워 풍자와 해학, 익살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고통이든 슬픔이든 잘 익히고 삭아낸 것이 가지는 깊은 풍미가 살아있습니다.
그림을 볼까요? 그림의 소재인 '이카루스'는 신화 속 인물입니다. 이카루스의 아버지는 그리스 최고의 건축가 다이달로스(Daedalos)지요.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의 직계 후손이니 다이달로스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났을지 미루어 짐작할 만합니다. 다이달로스는 재능이 뛰어난 만큼 시기심도 컸습니다. 물고기 뼈를 보고 톱을 발명했다는 그의 조카 페르딕스를 아크로폴리스 꼭대기에서 밀어 뜨립니다. 아테네 여신이 떨어지는 페르딕스를 가엽게 여겨 자고새(Perdrix)로 만들었다고 하지요. 높은 곳에서 떨어졌던 트라우마로 자고새는 절대 높게 날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만한 다이달로스에게 미노스 왕의 쌀쌀한 목소리가 전해집니다. 반인반수(半人半獸)로 식인(食人)을 했던 아들 미노타우로스를 가둘 미궁(迷宮)을 지으라는 명이 떨어진 거지요. 그는 아무도 빠져나올 수 없는 미궁 라비린토스를 설계했습니다. 하지만 어두움은 닮는 것일까요? 미궁의 비밀을 유지하려는 미노스 왕은 그를 아들 이카루스와 함께 가둬 버립니다.
다이달로스는 아들만큼은 미궁에서 벗어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스 최고의 발명가답게 밀랍으로 새의 깃털을 붙인 날개를 만들어 아들과 함께 미궁을 탈출합니다. 아들 이카루스는 태양의 열이나 바다의 습기를 피하라는 아버지의 주의를 잊고 높이 높이 태양 가까이 올라갑니다. 밀랍으로 붙인 날개는 뜨거운 태양열에 그만 녹아내립니다. 이카루스는 바다로 추락하고 말지요. 그래서 후대 사람들은 ‘이카루스의 날개’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이상(理想)의 상징으로 삼습니다.
그런데 가만 보세요. 브뢰헬의 그림에는 이카루스가 보이지 않습니다. 주인공은 어디에 있을까요? 오히려 그림 앞부분에 한가롭게 밭을 가는 농부가 시선을 잡아 끕니다. 제목이 아니라면 이카루스는 어디에도 없는 듯 보입니다. 제가 힌트를 드릴까요? 그림 오른쪽 아래를 보세요. 자세히 보면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다리가 보입니다. 그가 이카루스지요.
밭을 가는 농부는 이상(理想)이 추락하는 ‘첨벙’ 소리를 듣지 못한 듯합니다. 농부 아래쪽에 있는 양치기는 한낮의 정적을 깨는 소리에 잠시 하늘을 올려다볼 뿐이고 바닷가에 앉은 남자는 낚시를 하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화면 한복판에는 얌전한 수평선과 몇 척의 배를 품은 바다가 끝없이, 평온히 펼쳐져 있습니다. 작열하는 태양은 이카루스의 날개를 삼키고도 시치미를 뚝 떼고 있네요. 브뢰헬은 왜 화면 귀퉁이에 이카루스의 다리만을 보여주었을까요?
브뢰헬은 우리의 평범한 일상(日常)이 위대한 이상만큼이나 의미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농사를 짓고, 배를 띄워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는 매일매일의 소중함 말입니다. 일상이라는 시간에는 영양분이 있어 고통스러울 때조차 힘이 나게 하거든요. 그래서 벚나무는 바람에 지지 않고 벚꽃을 피우고, 인간은 어제를 디딤돌로 자신의 역사를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