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노라 Oct 26. 2022

발은 화장을 못해

9월 둘째 주 - 미켈란젤로 카라바조 <동정녀 마리아의 죽음>

  신체에 등급이 있다면 분명 발은 꼴찌일 것입니다. 생각이라곤 없으니 지적(知的)이길 하나, 얼굴처럼 오밀조밀 드라마틱하길 하나, 팔이나 다리처럼 가늘고 호리호리해서 시원한 맛이 있길 하나, 그저 넙적한 데다 딱딱하기만 하지요. 게다가 항상 맨 땅을 디디고 있으니 금방 더러워지고 심하게는 꼬린내가 납니다. 발은 둔하고 품위 없어 보입니다. 형편없는 연기를 하는 사람을 보고 ‘발연기한다’라고 하니 이래저래 발은 별로 대접받지 못하는, 억울한 신체부위 입니다. 하지만 무서운 일이 생기면 얼굴은 웃어도 발가락은 오그라들지요. 발은 화장기 없는 민낯이라 숨기지 못합니다. 



  이번 주엔 은연중 자신의 속살을 드러낸 '발'로 우리에게 말을 건넨 화가를 소개합니다. 



미켈란젤로 카라바조 <동정녀 마리아의 죽음, 1605~06>



  미켈란젤로 메디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3~1610)가 그린 <동정녀 마리아의 죽음>입니다. 제목처럼 성모님의 죽음을 다룬 작품이지요. 주위에 둘러 서 있는 사도들은 아이처럼 두 눈을 가리며 울고 있습니다. 벗어진 머리와 덥수룩한 수염, 고된 땀 냄새가 풍기는 허름한 옷차림이 눈물보다 더 애잔합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일 테고, 이제 성모님도 돌아가셨으니 마음속으론 의지가지없는 고아가 된 듯 하겠지요.



  화면 앞 쪽, 단정하게 머리를 땋아 올린 마리아 막달레나의 슬픔은 저라도 가서 어깨를 안아주고 싶을 정도입니다. 가느다란 목덜미와 여린 귓불을 가진 그녀는 매일 아침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윗집 아가씨 같네요. 어린 그녀는 낡은 나무 의자에 앉아 울음을 삼킵니다. 아마도 뒷목과 등에 떨어진 빛과 슬픔의 무게가 그녀의 고개에 매달렸나 봅니다. 그녀의 고개는 한없이 숙여져 있습니다.



  그림 속, 슬퍼하는 사람들 가운데 붉은 옷을 입은 성모 마리아가 누워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합니다. 성모님이 붉은 옷을 입으신 것도 일반적이지 않지만 유난히 배가 불러있네요. 게다가 그녀의 발은 푸르뎅뎅하고 잔뜩 부풀어 올랐습니다. 


그림을 좀 더 자세히 볼까요?  


  마치 행려병자의 죽음 같습니다. 침상 밖으로 비어져 나온 푸석하고 퉁퉁 부은 성모님의 발은 이제 들것에 실려 마을 밖, 구덩이에 아무렇게나 매장되어도 하등 문제될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옆에 고개 숙인 사도의 발도 맨발이네요. 성모님의 발은 당신이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있음을, 그들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느 사람과 똑같이 삶과 죽음의 고통을 당했다고 말해줍니다.  



  그림을 주문했던 산타 마리아 델라 스칼라 교회의 신부들은 다들 화들짝 놀라고 까무러칠 듯이 분개했습니다. 성스럽고 아름다워야 할 성모님이 너무 상스럽고 비천하게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일설로는 당시 티베르강에 빠져 죽은, 임신한 창녀 메레트리치아를 모델로 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녀의 얼굴이 아무리 아름다웠다 한들 성모의 거룩함을 창녀의 얼굴로 드러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요. 



  카라바조는 성모님을 시장에서, 술집에서, 근처 빈민가에서 만나는 흔한 여인처럼 그렸습니다. 결국 그림은 교회 제단에 걸리지 못했지요. 이 그림은 나중 파울로 루벤스가 구입합니다. 루벤스는 나풀거리는 푸른 천으로 감싸인 자애로운 얼굴과 곱고 가녀린 발로 초승달을 딛고 하늘로 승천하는 성모님의 전통적인 '무염시태(無染始胎)'보다 카라바조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격렬하고도 생생한 감정표현에 압도당했습니다. 믿음을 활자로 암송했던 수도사들과 달리 탁월함을 볼 줄 아는 위대한 화가였던 루벤스는 죽음의 대상이 나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슬픔도 진하고 깊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요?


작가의 이전글 추석엔 까똑 하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