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 <거장의 시선>을 다녀와서 1(풍경화 1)
보면 곧 그것의 가치가 드러나는 것에는 '명징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옛 로마시대처럼 금화나 은화가 가치의 무게를 계량했을 때를 생각해 보세요. 거래하는 품목의 몫으로 내미는 금화의 반짝거림만으로도 이미 그 대상이 빛날테니까요. 지금의 지폐로는 상상할 수 없는 화려한 배짱입니다. 아무래도 현대의 지폐는 쫌 나약하지요. 거래하는 한쪽이, 내민 지폐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면 상대도 빛이 바랠 수밖에 없으니까요.
'명화'는 어떤가요? 금화처럼 보는 즉시 반짝거릴까요? 아니면 지폐처럼 상호 간의 약속이 지켜져 그걸 확신하는 이에게만 아우라를 내뿜는 것일까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기획한 <거장의 시선>을 다녀왔습니다. 영국 내셔널 갤러리의 명화 52점이 바로크풍의 액자 속에서 친절하게 관람객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16,17세기의 작품들이 보여 반가웠네요. 내셔널 갤러리의 대표작은 오지 못했지만 한 점 한 점이 귀했습니다. 라파엘로나 렘브란트, 벨라스케스, 반 다이크, 고야, 반 고흐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거장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겐 덜 익숙한 풍속화의 대가 얀 스테인, 바로크 고전의 모범 니콜라 푸생, 볼로냐 화파의 대표 귀도 레니, 16세기 네덜란드 종교화를 엿볼 수 있는 퀸텐 마시스의 작품들이 쟁쟁하게 어깨를 겨루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행복했습니다.
오늘은 먼저 풍경화를 소개해 볼까 합니다. 풍경화가 시대별로 여러 작품이 있었거든요. 평소 설명이 쉽지 않은 장르인 '풍경화'를 "이때닷!"하고 풀어놓으렵니다. 자칫 흥미로워하지 않는 분야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좌표를 알려주는 고답적(高踏的)인 영역이기도 하지요. '풍경'이란 장소만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우리의 내밀한 곳에서 개별적 의미가 있는, 언젠가는 가고 싶은 그리운 지향점을 일컫는 말입니다. 지금 21세기는 풍경화를 잃어버린 시대라고 합니다. 우리가 가진 풍경이란 고작 외국에 나가서 맥도널드 간판을 보며 익숙해하거나, 기하학적으로 늘어선 아파트 숲을 보며 안도감을 느끼는 옹졸한 것이 되어버려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 어떤 작품으로 시작할까요. 풍경 자체가 목적인 회화란 어떤 모습일까요? 16세기에 이르러서야 인물이 아닌 배경이 주인공이 되어 캔버스 전면에 등장합니다.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1480년 이전~1538년)의 <인도교가 있는 풍경, 1518~20년 경>은 초기 풍경화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멀리 높은 산이 보입니다. 화면 오른쪽엔 험준한 바위가 거친 형세를 이루고 있는 걸 보니 깊은 계곡이네요. 계곡 아래엔 강이 흐를 테지요. 강을 가로질러 세운 나무는 산속 요새를 잇는 인도교입니다. 인도교는 요새와 닿아있지 않습니다. 옛 성(城)이나 요새는 여러 위험으로부터 안전을 위해 성 안에서 다리를 내었습니다. 우리는 요새로 들어가진 못하겠네요.
동양의 원근법에서는 이 작품처럼 아래에서 위를 쳐다보는 구도를 고원법이라고 합니다. 자연의 웅장함이나 위압감을 나타내기에 적당하지요. 그림의 구도는 전체적으로 아래에서 위를 쳐다보게 되어 수직선을 강조했습니다. 길게 쭉 뻗은 다리, 화면 중앙을 타고 위로 시선을 끌어올리는 거대한 나무, 양쪽의 요새와 바위, 다리 사이로 보이는 교회의 탑, 더 멀리 보이는 산, 모두가 수직 구도입니다.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단조롭지요.
하지만 '사람 없는 자연'만을 담은 회화 작품은 그 자체만으로 미술사에 큰 의미를 갖습니다. 르네상스 이전의 자연은 신의 말씀이거나 신의 자화상이었습니다. 풍경이 풍경이 아닌 서사(敍事)이거나, 신화 속 배경이었다는 말입니다. 조연이거나 엑스트라였지요. 드디어 16세기에 풍경은 주인공이 됩니다. 하지만 아직 일류배우가 되려면 아득합니다.
1658년 작품입니다. 이 시기에 장쾌한 바다 풍경을 그린 풍경화가 있다는 것의 의미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1492년을 시작으로, 강력한 권력들은 바다로 눈을 돌렸습니다. 무한히 펼쳐진 바다는 인간의 욕망을 더 멀리 더 빠르게 실어 날랐습니다.
1648년 네덜란드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했습니다. 낮은 저지대의 열악한 국토를 가진 어리고 위태로운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스페인이라는 강대국을 상대로 으르렁거릴 정도의 배포가 있었던 나라였던만큼 정신도 야무졌습니다. 가톨릭을 거부하고 개인의 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개신교를 받아들였습니다. 당시 개신교는 직업은 신이 주신 소명이므로 직업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이 곧 믿음의 실천이라는 장 칼뱅의 가르침을 따랐습니다. 17세기 네덜란드인들은 세계를 상대로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근면하고 성실한 주인이었습니다.
빌렘 판 더 펠더(1633~1707)는 그의 나라, 네덜란드의 배를 그렸습니다. 날개를 펼친 구름 뒤로 해가 숨었습니다. 파도가 세찹니다. 너울이 용의 비늘같이 날카롭네요. 대포를 장전한 군함 한 척이 바람과 파도를 버팅기고 있습니다. 돛대에 매달린 네덜란드 국기가 용맹해 보입니다. 주위의 작은 배들은 군함이 일으키는 파도에 흔들립니다. 화면 앞 쪽엔 카그(kaag, 바닥이 평평한 해안용 배)가 돛을 펼치고 있습니다. 속도를 늦추려나 봅니다. 이 돛대 꼭대기에도 깃발이 보이네요. 아마도 화가의 서명이 깃발에 쓰여 있는 것 같아요. 재치 있습니다.
빌렘 판 더 펠더의 아버지도 화가였습니다. 배를 정확하고 사실적으로 그려 부자(夫子)의 작품이 17세기 배를 고증하는 자료로도 쓰인다고 하니 그림이 갖는 기록의 역사를 엿봅니다. 이 화가 부자는 프랑스가 네덜란드를 침략하자 영국으로 갔습니다. 1674년부터 영국 찰스 2세의 궁정화가로 일합니다. 영국의 국교는 성공회입니다만 당시 가톨릭과 개신교의 갈등도 시나브로 불거졌습니다. 다만 현명한 영국은 배를 띄울 때, 종교를 묻지 않았습니다. 곧 바다의 패권은 영국이 가져옵니다.
17세기 이전에 나라 밖 여행은 쉽지 않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종교 갈등이 극심해 안전이 위협받았고 교통도 좋지 않았습니다. 귀족의 자제들은 주로 자국 내 명문 대학에서 2~3년 공부한 후, 가문의 영지나 재산을 관리했습니다. 1700년 경 즈음, 종교 갈등이 수그러 들었고 해외 무역을 통해 경제력이 향상되자 귀족들은 외부로 눈을 돌렸습니다. 국력이 커진 만큼 외교와 발달된 기술문명을 배울 필요가 생겼습니다. 또 신분에 걸맞은 상류계급의 예법과 문화를 익히고자 하는 욕구가 늘었지요. 점차 프랑스, 이탈리아와 같이 고전 문화유산이 찬란한 곳으로 자녀들을 유학 보냈습니다. 이것이 그랜드투어의 시작입니다.
베네치아의 화가 조반니 안토니오 카날(카날레토로 불림, 1697~1768)은 당시 발명된 카메라 옵스큐라를 이용해 베네치아의 모습을 꼼꼼히 드로잉 했습니다. 카메라 옵스쿠라는 상자 한쪽 면에 작은 구멍을 뚫어 빛을 통과시키면 반대쪽 벽면에 외부의 형태가 거꾸로 투사되어 나타나게 만든 기계 장치로 오늘날 '카메라'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카날레토가 카메라 옵스큐라를 이용해 세밀히 구성한 베네치아의 풍경은 그의 작업실에서 멋진 풍경화가 되었습니다. 마침 그랜드투어를 끝내고 돌아가는 귀족들의 기념품으로 더할 나위 없었지요. 17세기의 인간들도 인증샷을 각종 SNS에 올리는 21세기의 우리와 다를 바 없었나 봅니다.
카날레토는 베네치아의 대운하 카나레조 입구를 그린 이 작품의 구도와 형태를 자주 사용했습니다. 특히 영국에서 인기가 있어 공방에서 여러 점을 제작했습니다. 화면은 수평으로 펼쳐져 넓고 장대합니다. 하늘엔 연분홍 구름과 서늘한 푸른색이 섞여 옅은 일몰의 저녁을 보여줍니다. 중앙의 소실점에는 1580년에 지어진 폰테델레 굴리에(오벨리스크 다리)와 유대인들의 거주지역인 게토를 두었습니다. 왼쪽엔 정원에 둘러싸인 산 제레미아 교회가 있습니다. 높은 종탑은 13세기에 지어진 베네치아의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고 합니다. 근경의 옥빛 운하는 목마르면 한 바가지 떠 마셔도 좋을 만큼 맑아 보입니다. 수상건물들의 그림자와 여행객들의 여흥을 실은 곤돌라를 안고 운하의 하루가 저뭅니다.
회화에서의 풍경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아닙니다. 자연에 대해 시대가 요구하거나 화가가 해석하는 주관적인 견해입니다. 17,18세기의 풍경이론은 '숭고(Sublime)'와 '픽처레스크(Picturesque)'로 나뉩니다. 에드먼드 버크는 예술의 핵심은 '자연에 대한 공포에 가까운 숭고의 감정'이라고 규정함으로써 그간 합리, 이성, 균형과 같은 이상적인 미를 추구했던 고전주의와 결별합니다. 그의 '숭고'이론은 영국 낭만주의 풍경화의 이론적 토대를 이루었고, 낭만주의 풍경화의 꽃은 윌리엄 터너였습니다.
이제 윌리엄 터너의 작품과 카날레토의 작품을 비교해 보시겠어요?
이마를 살짝 찌푸려 눈을 가늘게 뜨고 그림의 중앙을 바라보세요. 우리나라의 가을 하늘을 보는 듯 시야는 점점 뒤로 물러나고 눈 맛이 시원해집니다. 어린 동자승이 싸리 빗자루에 구름을 찍어 한바탕 하늘을 쓸었을까요? 푸른 하늘엔 얇게 빗금 친 구름이 가득합니다.
크고 작은 건물들은 하늘의 뭉게구름처럼 물 위에 둥실 떠 있습니다. 제 그림자를 안은 배의 높은 돛대엔 도시를 건설한 강인한 로마 선원들의 노랫소리가 들립니다. 하늘과 바다와 선원들의 ‘강철로 만든 노래’를 그린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의 <마돈나 델라 살루테 현관에서 본 베네치아, 1835>입니다.
중세 천년 동안, 수도사들은 돌로 만든 고딕 성당 안에서 검은 잉크와 굳건한 신앙으로 땅과 인간의 일들을 꼼꼼히 필사했습니다. 가느다란 펜 끝에 옮겨진 이 세상은 건조하며 죄로 가득 찬 곳이었지요. 중세의 수도사들이 필사한 세계처럼 터너 이전의 화가들은 베네치아의 광활한 하늘과 바다를 딱딱하고 물리적인 사물로 캔버스에 복제했습니다.
하지만 터너는 달랐습니다. 그의 그림은 몽환적인 연무로 가득합니다. 그는 물을 잔뜩 먹인 캔버스 위에 수채 물감을 뚝뚝 떨어뜨려 캔버스에 자연의 말이 번지게 했습니다. 대기가 빛과 수증기에 의해 섞이고 스며 춤춥니다. 터너의 언어는 스피커를 두지 않아도 모든 사람의 가슴을 울렸습니다. 그 풍경화에서 사람들은 근대가 지향하는 ‘숭고함’을 읽었습니다. 그랑 투어의 인증샷에 불과했던 베네치아의 하늘과 바다는 터너에 의해 비로소 바다 자신의 웅혼하고 신비로운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터너는 일약 ‘숭고한 풍경’을 그릴 줄 아는 풍경화의 대가가 되었습니다.
윌리엄 터너는 베네치아를 구석구석 누빈 뒤, 베네치아의 풍경을 스케치 북에 싣고는 영국으로 돌아옵니다. 영국으로 돌아온 그의 캔버스에는 신화와 전설을 품은 베네치아의 배가 먼 미래의 땅으로 항해했지요.
오스카 와일드는 “터너 이전에는 런던에 안개가 없었다.”는 말로 숭고하고 낭만적인 자연을 그릴 줄 알았던 윌리엄 터너를 추앙했습니다.
이번 전시에 윌리엄 터너의 작품, 한 점이 있습니다.
'낭만'이라는 단어엔 총이나 칼이나 대포나 핵보다 무서운 것이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자연의 낭만을 그렸던 터너가 팔레트에서 색을 꺼낸 것이 아니라 '격렬함'을 붓에 찍었나 봅니다. 이 작품은 극심한 시선의 피로를 느낍니다. 보자마자 마음이 요동칩니다.
헤로는 비너스의 사제였습니다. 유럽과 아시아를 나누는 헬레스폰트 해협(지금의 다르다넬스 해협)의 도시 세스토스의 탑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맞은편 아시아 쪽에 살고 있는 레안드로스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녀와 사랑을 나누려고 밤마다 레안드로스는 바다를 건넜고, 헤로는 그의 바닷길을 등불을 들어 비추었습니다. 어느 폭풍우 치던 날, 등불이 꺼졌고 레안드로스는 바다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헤로도 탑에서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연인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듯 큐피드는 헤로가 들고 있던 등불과 횃불을 양손에 받아 들어 황망한 바다를 비춥니다. 하늘과 바다는 헤로와 레안드로스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으려는지 한 덩어리로 엉켜 있습니다. 오른쪽엔 바다 님프들이 파도와 물보라로 부서집니다.
하지만 터너는 두 연인을 테라스 아래 물가에 세워둠으로써 서사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푸르스름한 빛, 무거운 하늘, 날뛰는 바다와 아스라한 성벽, 이 모든 걸 둘러싸고 있는 대기(大氣)에게 줄거리를 이끌도록 했습니다. 변화하는 자연은 '숭고함'으로 다가옵니다. 연인들의 사랑은 숭고해졌습니다.
그럼 풍경이론의 한 축인 픽처레스크는 무엇일까요?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운 자연의 미를 픽처레스크라고 합니다. 윌리엄 길핀은 버크가 말한 '숭고'의 개념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도시와는 다른 표정으로서의 자연 풍경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국식 정원과 같이 인간과 가까운 풍속 속의 자연이라고 해야 할까요. 대표적인 화가가 끌로드 로랭과 존 커스터블입니다.
PS : 읽기도 힘드시지요. 제가 쓰기도 힘드네요. 팔이 너무 아파서 일단 여기까지 정리하고 픽처레스크부터 현대에 이르는 풍경화에 대해서는 곧이어 마무리 하겠습니다. 이리 끝내보기도 처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