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가 아냐, 넌 미래를 살 거야

너, 이 그림 본 적 있니? 7 파블로 피카소 (1)

by 안노라

간 밤, 잠을 못 잤구나. 너무 피곤하네. 엄만 지금 빨랫줄에 널린 빨래 같아. 어제 네가 논문도, 교수님의 조언도, 친구와의 대화도 잘 풀리지 않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지. 목소리도 지쳐 있더라. 그런 네가 이른 아침까지 통화가 되지 않으니 안절부절못했단다. 혹시 상황이 더 나빠졌나 하고 말이야. 어떤 이유에서건 딸의 연락두절은 엄마들에겐 재앙이지. 핸드폰에 뜬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를 보고 깜짝 놀랐지? 다 큰 널 간섭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세상이 험악해져 잘 들어갔나 하고 전화했어. 느루야, 서둘러 전화 주어서 고맙다. 여전히 지친 목소리였고, 아직도 고민이 해결되지 않은 듯했지만 네 목소리를 들으니 안심은 되는구나. 자식이 크면 어디까지가 '간섭'이고 어디까지가 '보호'일지 때론 모호할 때가 있단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사랑의 거리와 무게가 있겠지. 고래(古來)로 '내리사랑'이라는 말도 있으니 아무래도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 더 무거울 거야. 부모에겐 '사랑'이라는 저울에 '책임'이라는 무게 추가 하나 더 얹혀 있기도 하니까. 마음을 가라앉히고 찬찬히 어제를 되돌아 본다. 무엇이 엄마를 그리도 불안하게 했을까? 아마도 부모와 떨어져 있는 네가, 만나고 접하는 사람들을 '정확히 보고 있을까'하는 우려, '거친 세상에 상처입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겠지. 어쩌면 사람에 대한, 세상에 대한 너의 안목이 아직 어리고 미숙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지도 몰라.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고 생각하는 엄마가 딸의 인간관계에 갖는 지나친 노파심이었을 거야. 세상과 사람에 대한 안목을 생각하니 피카소에 대한 얘길 해 줘야겠구나.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피카소는 뛰어난 예술적 지형만큼이나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거든.

너, 이 그림 본 적 있니?


파블로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 1907>

교과서에 빠지지 않는 이 그림은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1973)의 <아비뇽의 처녀들, 1907>이란 작품이야. 그가 우울했던 청색시대를 지나 장밋빛 시대로 들어온 이후 제작했지. 이 그림이 갖고 있는 미술사적 의미는 조금 이따 설명해 줄게. 먼저 당시 스페인에서 파리로 왔던 피카소의 이십 대를 들여다보자. 그는 스페인 '말라가' 출신이야. 지중해와 맞닿아 있는 말라가는 지금도 휴양도시로 유명해. 밤이 되면 요정들이 날아와 별을 뿌려 준다고 하지. 팅커벨처럼 날 수 있게 말이야. 2002년 월드컵 당시, 국민의 영웅이었던 히딩크 감독이 국가대표 축구선수들의 사기를 높이려 이 곳으로 전지훈련을 간 적도 있었어. 축구선수들이 잠든 동안, 요정들이 선수들의 다리에 별을 뿌렸던 것 같아. 그때 펄펄 날았지, 아마?


피카소는 어렸을 적 이미, 회화에 뛰어난 기량을 보였어. 일찌감치 아들의 재능을 알아본 아버지가 빠듯한 살림에도 그를 바르셀로나의 왕립 아카데미에 보냈을 정도야. 그는 남들이 한 달 걸린다는 상급반 입학시험을 하루 만에 끝냈다지. 하지만 독창적이고 자유분방했던 피카소에게 학교 수업은 똑같이 네모난 식빵을 굽는 빵틀 같았나 봐. 그는 몹시 지루해했어. 천재에게 평범을 바라는 건 나이아가라 폭포에게 시냇물처럼 흐르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니까. 그러다 보니 아들이 학교를 마치고 사회에서 성공한 화가가 되길 꿈꾸던 아버지와의 갈등은 피할 수 없었지. 오븐에서 도망친 진저브래드 마냥 아버지에게서 독립한 그는 혼자 여러 도시를 방황했어. 스무 살 되던 1901년부터 4년 동안 바르셀로나 빈민가를 헤매기도 하고 파리를 서너 번씩 오가기도 하지. 이때, 친구 카사헤마스가 자살했어. 우울하고 낙담한 나날이 이어졌지. 이때를 '청색시대'라고 해. 아래 그림 <늙은 기타리스트>에서 보듯 청색시대의 그림은 거의 푸른 톤이고 야윈 선과 심약한 형태, 어두운 우울이 느껴지지. 시인 아폴리네르는 이때를 "눈물에 흥건히 젖은 예술"이라고 했단다.


하지만 천성적으로 에너지가 많고 인생을 시큰둥하게 보내는 데 소질 없던 그는 가방에 간단한 화구를 챙겨 들고 파리에 정착하게 돼. 아직은 인정받지 못한 재능과 무분별한 열정만이 가진 전부였지. 그는 나중 예술가들의 아지트가 된 바토 라부아르(Le Bateau Lavoir, 빨래 배)라는 낡고 더러운 건물에 세 들어. 건물이 센 강에 정박해 빨래를 하던 배와 닮았다는 뜻으로 이렇게 불렀대. 마땅한 단어가 없어 주로 '세탁선'이라고 번역하는데 어색하지? 이 시기의 그림을 간단히 설명해 줄게.

(왼) 파블로 피카소 <늙은 기타리스트, 1903> 청색시대 / (오) 파블로 피카소 <머리를 땋는 여인, 1906> 장밋빛 시대


당시 세탁선엔 가난한 시인과 화가들이 몰려들었어. 우리로 치자면 옛 신촌 기차역 주변에 지방에서 올라온 홍대 미대 학생들이 모여 살았던 것처럼 말이야. 너도 알고 있는 아마데오 모딜리아니나 조르주 브라크, 앙리 마티스 등도 이 세탁선에 살았어. 세탁선은 피카소 예술의 자궁과 같지. 이때 만난 조르주 브라크와의 교류가 없었다면 피카소의 큐비즘이 탄생하거나 성장하지 않았을지 모르니까. 큐비즘의 시작이 조르주 브라크였는지, 피카소였는지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가 조금씩 다르니 그 부분은 학자들에게 맡기자. 우린 이곳에서 그의 첫사랑이자 첫 번째 연인 페르낭드 올리비에(Femande Olivier, 1881~1966)를 만나볼까? 사랑과 기침은 숨길 수 없는 법,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만난 그의 캔버스에 이끼 낀 푸른색이 가고 발그레한 장밋빛이 드리워져.


폭우가 쏟아지던 여름 오후, 비를 맞고 있는 새끼 고양이를 품에 안고 아틀리에로 가던 피카소가 세탁선을 향해 달려오는 한 여인을 보았다지. 숨을 헐떡이는 그녀의 가슴에 가만히 새끼 고양이를 안겨주었대. 뻐꾸기로 변한 제우스가 빗 속에 헤라의 품에 뛰어든 것처럼, 쓸쓸하고 외로웠던 피카소는 페르낭드의 삶에 뛰어들었지. 페르낭드는 피카소의 모델이 되어 주었고 둘은 뜨겁게 사랑해. 1904년부터 2년 여의 장밋빛 시대의 그림인 <머리를 땋는 여인>을 봐. 통통하고 육감적인 그녀의 생명력 넘치는 누드는 불안, 초조, 고독과 싸우던 피카소에게 포근한 안정감과 자기 예술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했어.


아, 그리고 이 그림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페르낭드를 모델로 했는데도 그녀의 얼굴은 이베리아 조각 느낌인 각지고 단순한 윤곽선과 흑갈색의 어두운 피부로 표현되었다는 거야. 스페인과 파리를 오가던 피카소는 이미 이때부터 토속 미술에 관심을 가졌다고 볼 수 있어.


반항기 가득한 눈과 변혁을 꿈꾸는 심장, 허름한 옷차림의 청년들이 모이던 세탁선에 시인이자 미술평론가였던 기욤 아폴리네르가 드나들었어. 그는 피카소의 친구였거든. 마침 세탁선에 같이 세들어 살던 조르주 브라크와 왕립 아카데미에서 동문수학했던 마리 로랑생도 브라크의 초대로 세탁선을 드나들게 돼. 브라크와 가까웠던 피카소는 아폴리네르에게 마리를 소개하지. 당시 미술평론으로 맹활약하던 그는 그녀의 재능과 아름다움을 이렇게 노래했어. "마리 로랑생의 예술은 우리 시대의 명예다." 달달하지? 사랑하면 눈에 콩깍지가 씌는 법이니까!"


마리 로랑생 <예술가들의 그룹>


이 그림은 <예술가들의 그룹>이라는 마리 로랑생의 작품이야. 왼쪽부터 개를 안고 있는 피카소, 마리 로랑생, 기욤 아폴리네르, 맨 오른쪽 꽃 모자를 쓴 여인은 피카소의 연인이었던 페르낭드 올리비에야. 싱싱한 사랑을 나누고 서로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되었던 그들의 모습에서 패기만만한 젊음이 느껴져. 그런데 왜 달라진 걸까? 피카소와 페르낭드도, 아폴리네르와 마리의 사랑도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해. 이별하는 연인들 누구나 그렇듯이 자존심을 긁는 사소한 트러블이 일어났고 돌이킬 수 없는 커다란 사건이 뒤를 잇지.


마침 루브르 박물관에 '모나리자 도난사건'이 있었어. 당시 루브르는 현대적인 경비 시설을 갖추지 못했고, 예술품에 대한 관념이 지금과 같지 않아서 우수한 조각이나 회화 작품들이 체계적으로 관리되지 않았대. 피카소는 아폴리네르의 조수 피에레에게 이베리아 석상 2점을 구입했는데 이것은 피에레가 루브르에서 훔쳐온 것이었지. 모나리자 도난 사건이 발생하자 영문도 몰랐던 피카소와 아폴리네르가 용의자로 지목되었어. 경찰의 심문에 아폴리네르는 피카소를 두둔하는 발언을 했지만 피카소는 아폴리네르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잡아뗐단다. 진짜 절도범이 붙잡혀 둘은 풀려 났어. 하지만 이 일로 둘의 우정도 끝났고, 아폴리네르를 절도범으로 오해했던 마리와의 사랑도 끝났지. 아폴리네르의 유명한 <미라보 다리>라는 시는 마리 로랑생과 이별하고 난 뒤 쓰여졌어. 신뢰라는 뜨겁고 지속적인 온도 없이는 사랑이나 우정이 제아무리 화산처럼 분출한다 해도 금세 식어버린 용암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리지.


피카소는 삶의 위기가 닥치자 우정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데워진 관계 속에서 슬며시 몸을 움직여 성공을 향해 나갔어. 페르낭드와도 각자의 외도와 서로에 대한 미성숙한 처신으로 헤어지게 돼. 결국 '예술가 그룹'은 산산조각 났지. 미안함 때문이었을까? 나중 1차 세계대전에 종군했던 아폴리네르가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했을 때, 피카소는 작품을 팔아 그의 묘비를 세워주었단다. "무게 없는 인생을 나는 얼마나 자주 손으로 달아보았던가." 친구는 돌아오지 않았고 묘비명만 남았구나.


'예술가 그룹'은 깨졌지만 열정이 넘치던 이 시기에 입체파를 세상에 알린 <아비뇽의 처녀들>이 탄생해. 물감 살 돈이 없을 만큼 가난에 끄달리면서도 끊임없이 그림을 그렸던 피카소의 집념이 만든 걸작이지.



<아비뇽의 처녀들>은 서양미술의 전통에서 한참 벗어난 그림이야. 이 그림을 처음 친구들에게 보여줬을 때, 피카소에게 무한히 긍정적이었던 아폴리네르조차 비평을 아꼈을 정도니까. 서양미술에서 누드는 아름다워야 했고, 대상이 된 여인은 관자(觀者)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어. 왜냐하면 그동안 관자(觀者)의 대부분이 귀족 남성들이었거든. 그들은 화가에게 신화 속 여신이나 성경의 여인들을 빌려 왔어. 그리고는 자신들만의 공간에서 예술로 포장된 아름다운 여인의 신체를 감상했지. 하지만 피카소는 아름다움을 그리지 않았어. 오히려 그들의 턱 밑에 추하고 일그러진 형상을 바짝 들이대며 "인생이란 아름답고 선한 것만 있는 건 아니야."라고 말했지. 아니, "인간의 본성은 욕정에 넘치고, 이율배반적이며, 그리 고상하지 않아. 너도 알잖아."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피카소의 붓은 빗자루가 되어 위선의 실크 햍을 쓴 신사들과 코르셋으로 자연스러움을 조인 19세기의 여인들을 캔버스에서 쓸어버렸어. 그 자리에 바르셀로나의 유명한 사창가 아비뇽의 매춘부들을 올려놓았지. 그녀들은 치마를 들어 올리고 머리를 쓸어 넘기며 화면 밖, 관자(觀者)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지. "오늘 밤, 어때요?"라고 묻는 도발적이고 원시적인 거리의 여인들 말이야.


이제 그림을 조금 세세히 살펴보자. <아비뇽의 처녀들>은 크게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눠져 있어. 왼쪽의 세 여인은 하얀 피부를 갖고 있지만 오른쪽의 두 여인은 흑갈색의 피부와 아프리카 가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 일설로는 피카소가 성병을 치료 중이었는데 아프리카 가면에 액을 막는 신성한 힘이 있다고 믿어 그려 넣었다고 해. 그리고 오른쪽 하단의 여인은 몸은 뒷면이지만 얼굴은 앞면이지. 또 가장 왼쪽에 있는 여인의 눈을 봐. 몸은 옆면인데 정면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고 있지. 인물과는 다르게 화면 아래쪽에 있는 과일은 위에서 내려다본 시점이야. 이건 이집트 미술이 가지고 있는 '정면성의 원칙'과 '다시점'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어. 갑자기 '정면성의 원칙'과 '다시점'이 뭐냐고? 이집트의 그림을 잠깐 보여줄게.


(왼쪽 위, 아래) 이집트 벽화 <네바문의 정원> / (오른쪽 위) 이집트 벽화 중 세부


벽화에 그려진 <네바문의 정원>이라는 그림과 또 다른 벽화 속 인물이야. 이집트의 그림은 여러 시점을 한 화면에 담았어. 연못은 위에서 내려다본 시점으로, 연못 속에 있는 물고기와 오리는 옆에서 바라본 시점을 그렸지. 왜냐하면 형태를 가장 잘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야. 오리를 위에서 본다면 다리는 보이지 않을 테고 대부분의 물고기는 특징 없이 가늘고 길어질 테니까. 나무도 줄기와 형태를 볼 수 있도록 측면에서 그렸어. 방향과는 상관없이 말이야.


인물을 보면 얼굴은 측면으로, 눈동자는 정면으로, 몸통은 다시 정면으로, 다리는 측면으로 그렸어. 원근법도 단축법도 다 무시했어. 공간감도 없지. 눈에 보이는 대로가 아닌, 사물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시점으로 그렸어. 왜 이렇게 그렸을까? 이집트인들에게 있어 아름다움은 영원함이었거든. 이집트인들은 영혼의 존재와 영생을 믿었어. 내세에서 심판을 받고 이 땅에 다시 오려면 온전한 육체가 있어야 했지. 그런데 사람을 정면에서 보면 코의 높이도 드러나지 않고 발가락도 동그라미로 표현될 수밖에 없잖아. 그렇다고 측면으로 그리면 눈이 반쪽만 표현되고 팔은 하나여야 하잖아. 온전하지 않은 육체에 어떻게 온전한 영혼이 깃들 수 있겠니. 전체를 보는 다시점이 필요했던 이유지.


하지만 다시점이 표현한 사물이나 인간은 실제로 존재할 수가 없잖아. 그래서 중세와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사라졌어. 이 다시점이 근대 들어 세잔에 의해 부활하고 피카소에 이르러 완성되지. 세잔은 대상을 버리고 나누어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했어. 그의 캔버스에 원과 원기둥과 원뿔이 남았지. 세잔의 캔버스 앞에 피카소가 붓을 들었단다. 남과는 다른 자신만의 독창적인 회화를 구축하고 싶었던 피카소는 세잔의 뒤를 이어 깊이감이 있으면서도 입체의 여러 면을 어떻게 하나의 평면에 나타낼 수 있을까를 집요하고 날카롭게 파고들었지.


이즈음이었던 1908년 브라크는 살롱도톤에 원시적 큐비즘 형태를 사용한 <에스타크의 풍경>을 출품해. 실제로 살롱 도톤(Salon d'Automne)의 심사위원을 맡았던 앙리 마티스가 브라크가 출품한 <에스타크의 풍경>을 보고 "작은 입방체의 집합"이라고 말한 데서 '큐브(cube)'라는 말은 시작되었어. 이 작은 날갯짓은 큐비즘(cubism)이라는 거대한 현대미술의 폭풍을 일으켰지.


(왼) 조르주 브라크 <에스 타크의 풍경, 1908> / (오) 파블로 피카소 <칸바일러의 초상, 1910>


동시대의 예술가로서 둘은 크건 작건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을 거야. 브라크가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을 보고 자신의 스타일을 고민한 것처럼, 피카소는 브라크의 <에스타크의 풍경>을 보고 해체와 재조합에 대해 깊이 탐구하지. 구상에서 추상으로 넘어가는 열쇠를 자신의 작품에 접목하고 확대해. 피카소가 한 유명한 말이 있어. "유능한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 피카소는 면을 해부학자처럼 쪼개고 나누어 잘게 펼친 후 입체를 평면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현대회화의 시작'이라는 위대한 이름을 갖게 된 거야. 미술사에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고 장르를 개척한 거지.


현대미술이 같은 입체파지만 브라크보단 피카소에 주목하게 된 건 피카소가 이 입방체의 날개에 색을 입히고 초상화에 실험했기 때문이야. 그는 이집트인들처럼 영혼이나 내세에는 관심이 없었어. 관능적인 육체, 감각적 쾌락, 심미적인 취향에 주목했지. 마치 색종이를 접은 것 같이 화사한 삼각형의 젖가슴과 사각형의 팔, 원추형의 다리가 19세기에서 20세기를 가로질렀어. 그가 접은 인물들은 종이비행기처럼 사뿐히 파리의 미술계로 날아올랐어. 그의 종이비행기에 비평가들의 엔진이 장착되고 수집가들의 깃발이 펄럭였지.


그리고 그는 이제 자신이 선택한 여인들을 통해 비행기의 공중급유를 시작할 거야. 에바 구엘, 올가 코클로바, 마리 테레즈, 도라 마르, 프랑스와즈 질로, 자클린 로크 등 그가 영감을 얻고 그의 예술에 변곡점을 유도한 여인들이 있었단다. 그는 그녀들을 위성처럼 거느렸지. 경찰서에서 아폴리네르를 모른 척한 것처럼 피카소의 위대한 업적은 타인의 삶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기도 했어. 그건 다음에 또 얘기해 줄게.


"단순하게 줄여가는 과정은 결과물과는 달리 절대 단순하지 않다. " 파블로 피카소

엄마는 피카소가 초상화에 대입한 큐비즘처럼 피카소의 삶을 잘게 나누고 쪼개 보여 주었어. 그 속 어딘가에 그의 본질이 있겠지. 어떤 부분은 위대했고 어떤 부분은 초라했을 거야. 그중 네가 기억했으면 하는 게 있단다. 엄마가 너에게 하고 싶은 얘긴 오히려 지금부터야. 이 두 가지를 말해주고 싶구나.


피카소에겐 자신의 재능을 믿고 성장시키려고 했던 훌륭한 아버지가 계셨어. 비록 기존 관념대로 이끌긴 했지만 회화에 대한 기본을 알려주신 분이기도 했고 화가로서 선배였어. 하지만 피카소는 아버지의 뜻대로 하지 않았어. 다른 세상을 향해 달렸고, 조언을 무시했지. 어떻게 보면 몹시 불효자였다고 볼 수 있어. 아버진 안타깝고 속상했을 거야. 하지만 만일 아버지가 원하는 그림을 그렸다면 그는 현대미술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을 거야. 부모나 스승, 선배에게 조언을 구하고 귀 기울여 듣는 것과 이를 따르는 것은 별개의 문제야. 먼저 경험한 이의 충고는 진정성 있고 현실적이지만 과거를 기반으로 한 거야. 그렇지만 넌 미래를 살 거야. 그러니 넓게 듣고 깊게 생각한 후 결정한 거라면 스스로의 판단을 믿어.


청색시대와 장밋빛 시대를 지나는 동안, 피카소는 누굴 만났지? 무명 화가인 그를 끊임없이 격려하고 응원하며 긍정적인 평을 실어주었던 친구 아폴리네르가 있었지. 또 새로운 예술에 대한 실험에 도전적이었던 친구들, 조르주 브라크, 앙리 마티스, 이탈리아의 미래파 화가들인 움베르토 보초니와 지노 세베르니 등과도 교류했지. 그들은 새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전령이었어. 마차를 타고 가다가 문득 내려서는 "위험하긴 하지만 이제 기차를 탈 거야."라고 말하는 용감한 사나이들이었어. 새로운 시대의 속도를 받아들이고 기꺼이 그 흐름에 몸을 맡겼지. 피카소는 이들을 통해 배우기도 하고 위로를 받기도 했지만 때로 이용하고 질투했으며 치열하게 경쟁했어. 이 모든 친구들이 곁에 있었기에 현대미술의 시작인 피카소가 된 거야. 친구는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지. 널 응원하면서도 네게 자극이 되는 친구를 놓치지 마. 자신을 성장시키는 친구야말로 인생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이란다.


느루야, 너의 고민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한 마디 더 하자면, 너의 일을 다 공유할 수 없다는 걸 알아. 하지만 네가 힘들다면 핸드폰을 엎어 놓는 대신, 말해 주겠니? 피카소처럼 엄마나 교수님이나 친구들이나 주위 선배들과 부딪치고 흡수하고 느끼다 보면 현명한 네가 판단할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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