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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노라 Sep 10. 2020

몸은 상처를 기억한다

너, 이 그림 본 적 있니? 35 에드바르트 뭉크 (1)

  비가 계속 오네. 비 오는 날엔 막걸리에 부침개, 아님 소주에 삼겹살이지. 느루야, 오늘 서둘러 일찍 와. 저녁에 삼겹살에 술 한 잔 하자. 냉동실에 있던 고기도 미리 꺼내 놓았어. 고추도 썰어 놓고 마늘도 까 놓았지. 오이는 이따 먹기 직전에 썰면 될 거야. 삼겹살에는 구수한 된장국이 제격이지. 약방에 감초 마냥 어떤 국이든 무를 넣어주면 시원해. 무 넣은 쌀뜨물에 된장 풀어 휘휘 젓고는 호박과 양파를 한소끔 끓인 다음 우렁을 넣었어. 맑고 담백한 맛이 우러나라고 말이야. 삼겹살의 느끼한 맛을 깔끔하게 잡아주겠지. 그러고 보니 야채를 씻지 않았구나. 상추 몸값이 서울 아파트값처럼 뛰어 상추는 조금 사고 깻잎 한 통을 사 왔어. 쌉쌀한 깻잎 향은 기분을 상쾌하게 하잖아. 식탁에 앉아 빨간 나일론 끈에 묶여 두줄로 나란히 누워있는 깻잎의 끈을 푸는데 깜짝 놀랐어. 


  끈 자국 따라 빙 둘러 검게 물렀더라. 다른 부분은 멀쩡한데 끈이 닿은 곳은 검게 변했어. 꽉 조이지 않고 낱장으로 돌아다니지 않도록 살짝 묶음 표시만 준 것이었는데도 말이야. 아팠던 모양이지. 조심스레 씻는데 어떤 건 그 선을 따라 찢어져 버리더라고. 문득 생명은 가장 약한 곳이 가장 먼저 병들고, 그 약한 곳은 상처 때문에 생기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살면서 우리에겐 크고 작은 상처가 나지. 그리고 어떤 건 마음에, 어떤 건 몸에 남아 깊은 흉터를 남기기도 해. 엄마가 직장 다닐 때 말이야, 잔뜩 스트레스를 받는 날이 있어. 그러면 퇴근길, 차 안에서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노랠 불렀어. 그러면서 "괜찮아, 별 거 아니야. 해결할 수 있고 이 또한 지나갈 거야."하고 스스로 다독였단다. 실제로 아파트 현관문을 열 때쯤 되면 회사 일은 기억나지 않았어. 방긋거리는 느루와 오빠를 보면 금방 잊혔지. 그런데 그런 작은 상처들을 몸은 잊지 않고 기억했나 봐. 엄마가 병이 났던 걸 보면. 


  트라우마와 같은 자신의 상처를 복기(復記)하며 평생 캔버스 위에 기록했던 화가가 떠오르는구나. 그는 삶의 절규를 고국 노르웨이의 피요르드 해안에 털어놓았지. 해안의 돌멩이들이 들었던 그의 고백을 들어볼래? 너, 이 그림 본 적 있니?


에드바르트 뭉크 <멜랑콜리, 1894>

  

  해변가에 턱을 괴고 앉아 있는 남자가 있네. 단순한 이 그림은 보자마자 우리를 의식과 무의식 사이로 데려가지. 마치 이승과 저승의 경계인 망각의 강에 카론의 배가 떠 있는 것처럼. 우린 배 삯으로 내주어야 할 무엇도 준비하지 못한 채, 그림 속 남자처럼 골똘히 생각에 잠기게 돼. 안으로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지. 그는 검정 옷을 입고 있구나. 해안과 먼 곳의 사물들도 검은색이야. 검정은 재에서 얻어지는 색이지. 모든 것이 타고난 뒤,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난 뒤, 마지막으로 남는 색이야. 그래서 형체가 없는 관념의 색이며 존재의 근원에 닿아 있는 색이지. 학자들은 먹(墨)으로만 그리는 수묵화가 채색화보다 더 정신적인 걸 드러내는 이유는 검은색, 바로 그 색 때문이라고 하지. 


  어둠이 짙게 내려 겉과 속의 경계가 없는 저 무량한 공간에서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피요르드의 깊은 심해 속으로 생각의 닻을 내리고 있는 것일까? 울렁이는 수평선을 보며 끊어진 말들을 잇고 있는 걸까? 이 그림을 그린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1863~1944)는 <멜랑콜리, 1894>라고 이름 지었단다. 뭉크는 유명한 화가이고 그의 내로라하는 작품들이 많지만 엄만 늘 이 그림에 끌렸어. 자기 내면이 볶닥이는 사람이 심리학을 연구하고, 구겨진 시간을 보낸 사람이 구구절절 푸는 문학을 한다던가? 소란을 힘들어하는 엄마는 호젓이 홀로 있는 이 멜랑콜리한 그림이 참 좋았구나. 우울이라고 해야 하나, 애수(哀愁)라고 해야 하나. 하염없는 무의식의 세계를 그린 듯한 이 그림은 '생(生)'에 상처 받은 뭉크의 속살이자 '사(死)'에 반항하는 뭉크의 일격이지. 또한 일생 그를 따라다니는 죽음과 질병과 고독을 예술의 원동력으로 삼은 그의 자화상이기도 해. 


  죽음이 늘 곁에 머물렀던 뭉크의 상처에 대해 말해볼까? 뭉크는 노르웨이 뢰텐이란 빈민가에서 태어났어. 태어날 때부터 병약했지. 류머티즘을 앓았고 기관지가 약했어. 흔한 말로 늘 골골댔지. 뭉크에겐 누나 소피와 세 명의 동생, 군의관이셨던 아버지, 다정한 어머니가 계셨어. 그런데 뭉크가 다섯 살 때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돌아가시고, 아버지의 극단적인 우울증이 시작됐지. 자상하게 동화책을 읽어 주다가도 순간 제어하지 못하는 분노와 광기를 드러내곤 하셨어. 무자비한 벌과 애끓는 기도가 오갔지. 비바람이 쳤다 맑게 개었다하는 날씨처럼 매일 아침, 예측할 수 없는 아버지의 눈치를 봐야 했어. 어린 형제들이 얼마나 불안했겠니. 가뜩이나 소심한 뭉크에게 누나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지. 그런데 누나 소피마저 뭉크가 열네 살 때 결핵으로 일어나지 못해.


(왼) 에르바르트 뭉크 <병든 아이, 1885~86> / (오) 에드바르트 뭉크 <병실에서의 죽음, 1895>


  뭉크는 "죽음"에 대한 그림을 많이 그렸어. 그에게 있어 죽음이란 친구처럼 가까운 것이었지. 열세 살, 피를 토하던 크리스마스 이브, 그는 신께 낫기를 간구했지. 그는 병을 털고 일어났고 결핵은 누나에게 옮겨갔어. 왼쪽의 <병든 아이>란 그림은 누나 소피의 죽음을 그리고 있어. 가파른 마음처럼 배경과 색은 모두 거칠게 표현되었어. 침대 곁 여인의 어깨가 울고 있구나. 슬픔이 어깨를 타고 흐르네. 어머님 돌아가신 후 집안 살림을 맡아주시던 이모 카렌이겠지. 그런데 침대에 앉아 있는 소피를 봐. 너무나 담담한 얼굴이지 않니? 마치 난 괜찮다는 듯, 아무런 미련도 갖지 않은 듯, 죽음이 두렵지 않은 듯 편안해 보여. 뭉크의 기억 속 누나는 저리도 온화하고 의젓했나 봐.


  오른쪽 그림은 <병실에서의 죽음>이야. 이 그림 또한 누나 소피의 죽음을 그렸어. 두 손을 모으고, 머리를 숙이고 애도(哀悼)하고 있어. 뭉크의 슬픔은 땅이 패이 듯 쏟아지는 소나기가 아니라 슬며시 옷깃을 적시는 이슬비야. 그는 엉엉 소리 내지 않아. 감정이 범람하지 않도록 둑을 쌓고 조금씩 흘려보내지.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의자에 앉았을까? 갈색 등받이 의자에 앉은 누나는 이제 그 창백한 얼굴을 보이지 않네. 그런데 이상하지. 소피는 오래 전, 열 다섯 소녀로 죽었는데 아버지도 이모도 동생 라우라와 잉게르도 유년이 아닌 성인의 모습이야. 


  뭉크는 누나의 죽음을 잊을 수 없었던 것 같아. 그는 그때의 기억을 다시 복습하고 다시 복습했어. 오랜 시간이 지나도 열넷의 뭉크가 되어 누나의 죽음을 기억한 거지. 트라우마란 '죽음의 각인'이라고 하더라고. 온몸이 죽음을 느낄 때, 그건 잊히지 않고 무한 반복한다는 거야. 가끔, 아니 빈번히 두렵고 무서운 소식들이 뉴스 헤드라인에 걸려. 직접적인 일이 아님에도 소름이 돋아. 포악하고 잔인한 일들에 숨이 막혀. 듣기만 하는 데도 이리 처참한데 당면하면 얼마나 떨릴까를 생각하면 상상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어 지지. 어머니의 죽음과 누나의 죽음에 이어 1889년 겨울, 아버지가 돌아가셔. 아버지는 그에게 동생들과 이모 외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어. 그는 가장이 되었지. 


에드바르트 뭉크 <칼 요한 거리의 봄날 저녁, 1892>


  느루야, 오고 있니? 뭉크의 그림을 보다 보니 네가 엄마 곁에 있으면 좋겠구나. 아직도 비는 그치지 않고 유리창 밖, 놀이터엔 주인 잃은 신발 한 짝이 그네를 타고 있구나. 엄만 마음이 스산해 술 한 잔 채웠단다. 이런 날은 친구와 목적 없는 수다를 떨어야 해. 댕댕이가 시무룩하지 않은지, 요즘 핫한 노래는 무언지, 새로운 조리법을 알게 되었는지 하는 시시콜콜하고 소소한 얘기들 말이야. 그런 이야기 속에 스미는 따뜻한 위로가 있지. 아, 느루야, 사랑이나 우정이 시작될 때, 신호가 뭔지 아니? 궁금하지. 엄만 밀당을 못하니 바로 알려줄게. 용건 없이 전화하는 거야. 상대가 네게 "그냥 전화했어."라고 말하면 그 상대방이 너에게 호감이 있는 거야. 어떻게 아느냐고? 용건을 가진 통화는 누구나 하지만 용건 없는 통화는 아무에게나 할 수 없단다. 그건 내 시간을 너랑 나누고 싶단 말이고 날 받아주겠니 하는 뜻이거든. 


  뭉크에게는 함께 시간을 나누고 싶은 사람이 없었던가 봐. 아니면 나누기가 두려웠었나 봐. <칼 요한 거리의 봄날 저녁, 1892>을 봐. 화면 오른쪽, 홀로 걸어가는 남자가 그야. 그는 실크 햍을 쓰고 사람들을 지나쳐 거리를 걷고 있어. 그의 주위엔 아무도 없지. 맞은편 제각각 사연 있는 사람들의 얼굴은 모두 야위고 앙상하고 판에 박은 듯 똑같아. 웃음도 없고 생기도 없어. 그가 타인을 바라보는 시각은 이토록 절망적이야. 무의식 저 깊은 곳에 있는 그의 상처는 소염제나 진통제, 연고 정도로는 어림없었어. 그는 서둘러 세포 구석구석 빈틈없이 밝히는 수술용 전등 아래, 솟구치는 피를 지혈대로 묶고 상한 뼈와 근육과 장기를 수술해야 했어. 하지만 그러지 못했지. 부러지고 찢긴 육체적 손상은 금세 드러나지만 심리적 파열은 보이지 않으니까. 그는 꼽추처럼 존재의 무게를 등에 얹고 엄살 없이 홀로 묵묵히 걸었어. 


  그는 "나는 인류의 가장 큰 두려움인 병약함과 정신병을 물려받았다."라고 했어. 그는 불안정했지. 더불어 뭉크의 여동생 라우라가 정신병 진단을 받았어. 그의 불행한 가족사는 이것이 끝이 아니야. 그의 남동생 안드레아스는 결혼 후 몇 개월 만에 죽고 말았지. 그는 이 모든 것을 그렸어. 외면하고 싶고 덮어두고 싶었던 광란, 음습, 절망, 부패, 낭자한 피, 고통, 냉소, 타락, 어둠, 죽음, 소외, 고독 등을 윤리나 관습과의 타협 없이 그렸어. 색은 단순하고 강렬했고 형태는 베를린 미술협회의 평가처럼 생선죽처럼 문드러졌지. 사람들은 뭉크의 그림에서 '세기말의 어둠과 광기'라는 전류에 감전됐어. 불쾌한 경험이었지. 평가는 잔인하리만큼 냉혹했어. 그에겐 심리적 CPR이 필요했어. 먼지가 바람에 날리듯, 그는 1890년 프랑스로 떠났단다. 


(왼) 에드바르트 뭉크 <별이 빛나는 밤, 1922~24> / (오) 빈센트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에, 1889>


  프랑스에서 레옹 보나의 아틀리에에 들어간 뭉크는 인상주의를 접하게 돼. 폴 고갱과 툴루즈 로트렉의 작품에 탄복하고 일본의 우키요에에 새로운 눈을 뜨게 되지. 오슬로에 있는 미술학교에서의 수업이 회화교육의 전부였던 뭉크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어. 또 무엇보다 반 고흐의 매력에 빠졌지. 뭉크와 반 고흐는 공통점이 많아. 우울증을 갖고 불안과 우울을 화제(畵題)로 다루었던 점도, 권총 사고가 있었던 것도, 인간 내면의 충동을 표현하려고 했던 표현주의적인 회화 의지도 공통분모라고 할 수 있지. 뭉크는 반 고흐에 대한 존경을 담아 1922년 <별이 빛나는 밤>이라는 작품을 완성해.

                  

  달빛이 반사돼 눈이 푸르고 하얗게 빛나고 있어. 제 얼굴을 비추는 백설 위에 별들이 찬란하네. 멀리 보이는 마을은 동화 속에 있는 공간처럼 노란 등이 화사하구나. 먹을 것을 찾아 나선 여우조차도 저 마을에선 잠시 배고픈 걸 잊을 것 같아. 이 그림은 오슬로 근처의 화실에서 바라본 밤의 정경을 그렸는데 뭉크의 그림에선 드물게 옹송거리는 숲과 길이 둥그렇게 자리 잡았어. 시간이 거듭 지나 뭉크의 마음에도 평화가 찾아온 걸까? 얼마간은 그랬을지도 모르지. 아마 그도 자신을 응시하며 평화를 구했을 테니까. 하지만 의심과 긴장은 해소되지 않았어. 눈 위에 서 있는 저 기다란 그림자를 봐. 자신의 긴 그림자를 안고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참으로 멀리 있잖아. 반 고흐의 물결치는 별이 그의 폭발하는 마음이었다면, 뭉크의 밤은 아직도 숙면에 들지 못하고 깨어있는 불면의 기록이지. 


  그는 1890년부터 10여 년동안 파리와 베를린을 오가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해. 아까 보여주었던 <멜랑콜리>처럼 앞선 더듬이로 시대의 우울을 직감했지. 그는 개인의 발견으로 대변되는 근대정신이 얼마나 깨지기 쉬운 것인지를 보여 주었단다. 그의 그림은 <파손 주의>라고 커다랗게 써 붙인 후 근대 인간의 해마에 배달되는 택배 상자였어.

 

에드바르트 뭉크 <생명의 춤, 1899~90>


   이 그림은 뭉크의 <생명의 춤, 1899~90>이라는 작품이야. 여럿의 남녀 무리가 모여 풀밭 위에 춤을 추고 있어. 높이 수평선이 보이고 바다 위엔 진공관 같은 달빛이 서 있어. 빈혈에 걸린 파랗고 노란 밤이야.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은 한 팔로 남자의 목을 감싸고 풍성한 드레스 자락으로 남자의 발등을 덮었지만 검은 옷의 남자는 무표정하게 서 있어. 소통과 공감이 없는 포즈야. 오른쪽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은 이 흥겨운 자리에서 소외된 듯 귀퉁이에 머물러 있지. 화사한 꽃 옆, 흰 드레스를 입은 여인은 누군가 나에게 춤을 신청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엿보여. 하지만 아무도 그녀를 거들떠보지 않아. 모여있되 대화는 없어. 느루야, 너는 재즈 댄스를 오래 했으니 금방 알 수 있을 거야. 이 그림 속 누구도 춤 추지 않는다는 걸. 


  강렬한 색의 대비와 대담한 구도에 비해 누구의 발도 땅을 딛지 않는 불안한 모습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외롭고 고독한 존재라는 걸 나타내고 있지. 생의 환희 뒤에는 고통과 소외가 기다리고 있다는 뭉크의 전언(傳言)일 거야. 이즈음 그는 예민한 신경과 절제 없는 음주로 불안과 심한 우울증을 보였거든. 무리 속에 들어가고 싶지만 또한 혼자 있고 싶은 양갈래의 마음, 사랑하고 싶지만 끊임없이 꽈리를 트는 의심으로 자신도 모르게 상대를 멀리하는 마음이 그를 괴롭혔어. 아이러니하게도 그럼 그럴수록 그의 그림은 사람들의 무의식 속으로 파고들었지. 존재가 갖고 있는 불안을 그의 삶 전체가 전전긍긍하며 껴안았어.


  이후 깊은 내면을 드러내는 그의 회화는 노르웨이 표현주의의 서곡이었고, 그는 노르웨이 근대회화의 지휘자가 되었지. 마지막으로 이 그림 보여줄게. 누구나 아는 그림이야.

  "나는 두 명의 친구와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막 석양 무렵이었는데,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파란 피오르드와 마을 위로 불과 피의 혀가 너울거리며 돌아다녔다. 친구들은 무심히 걸었지만 나는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 죽을 것만 같은 공포가 느껴졌다. 그때 자연을 관통하는 강력한 비명이 들려왔다."

 

에드바르트 뭉크 <절규, 1893>


  느루야, 문명 속에 사는 인간은 언제나 신경증에 시달릴 수밖에 없대. 왜냐하면 문명은 본능에 대한 억압에서 시작하기 때문이지. 도구를 사용하고 불을 이용해 자연의 위험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게 된 인간은 거꾸로 자신들이 만든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본능을 통제해야 한다는 거야. 문명이 제한하는 성욕은 그 에너지를 다른 무언가로 바꾸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자유를 억압당한 인간은 예민하고 강박적인 성향이 강해진다는 것이지. 프로이트의 분석이야. 뭉크의 <절규, 1893>는 그런 강박적인 현대를 상징하는 아이콘과 같은 작품이지. 


  수없이 영화로 포스터로 확대 재생산된 이 그림은 설명하지 않을게. 설명이 필요 없거든. 보면 통렬하게 다가오는 공통의 감정이 있으니까. 지진계의 바늘마냥 섬세한 촉수를 갖고 애면글면 살았던 뭉크는 81세의 나이로 사망해. 그의 몸은 시대의 우울을 견뎠지. 그리고 그의 작품을 통해 죽음의 트라우마를 기록했어. 현대인의 불안과 고독을 그렸던 그는 '죽음'이나 '공포' 못지않게 '여인'과 '사랑'에 대한 간구와 증오가 드러나는 작품도 많이 그렸단다. 그건 느루가 도착하면 얘기해 줄게. 그의 사랑이야기도 빼놓지 않고. 


  깻잎도 다 씻어 놓았어. 이제 느루만 도착하면 되는데. 어, 이게 뭐야? 톡이 와 있네. 통계 분석 오류가 생겨 못 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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