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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노라 Nov 02. 2020

가을, 오다

너 이 그림 본 적 있니? 41  잭슨 폴락

  자박자박 가을 오는 소리가 들려 거리에 나갔지. 봄에 세상 구경하러 떠났던 노오란 개나리가 이제 막 은행나무에 배낭을 내려놓았더라. 꼭 그 여행만큼 지친 누런 은행잎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어. 봄볕을 나눠 쬐며 개나리 옆에서 수줍던 진달래도 바람의 어깨에 올라 구경했던 세상 얘기를 단풍나무에게 전하고 있나 봐. 가 보지 못한 세상에 대한 설렘이었는지 단풍나무는 붉게 달아올랐어. 봄은 가을에게 들려줄 소식이 많은 듯했지.


  느루야, 엄마는 그 비밀스러운 얘기를 엿듣고 싶었구나. 아장거리던 봄이 어떻게 의젓한 가을이 되었는지. 누군가의 손을 잡고도 뒤뚱거렸던 걸음이 어떻게 홀로 성큼 걸을 수 있게 되었는지. 바람이 불자 낙엽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안고 이리저리 뒤둥댔지. 그건 시간을 온전히 살아낸 것들의 노래, 여린 자신 안에 단단한 생명을 채워본 것들의 춤이지. 엄만 추위가 스며드는 것도 잊고 한참을 바라보았단다. 마치 봄이 가을에 도착하기까지 뜨겁고 맹렬한 여름을 지나와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여름 소나기가 퍼부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때가 있었던 걸 기억했어. 힘겨운 순간을 바라보기만 한 게 아니라 그 순간의 일부가 된 것 같았던 시절! 주어진 선택지를 거부하고 다른 답을 찾아 헤매던 시절! 어김없이 가을이 왔구나!


  느루야, 깊어가는 가을, 모자를 눌러쓰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위, 낙엽 한 잎처럼 문득 이 그림이 떠 올랐어.

  너, 이 그림 본 적 있니?


잭슨 폴록 <Number 30. 가을의 리듬, 1950>


  이름 지을 만한 아무것도 없어. 선도 색도 명암도 원근도 형태도 없어. 카오스야. 무분별한 충동, 불안한 자의식, 내적 갈등, 관계의 긴장, 파괴적 욕망, 출구 없는 미로, 숨 막히는 질주, 인정에의 욕구, 잔혹한 상상력 그리고 도망. 이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가는 자가 보여. 그는 사면이 모두 열려 있는 저 그림 속에서 쉬지 않고 달리지만 어디에도 숨을 곳도, 닿을 곳도 없지. 그는 그저 스스로 길을 만들고 지우면서 그림 속을 헤매고 있어.


  담배를 물고 장화를 신고 헤매는 그는 잭슨 폴락(Jackson Pollock, 1912~1956)이야. 그의 뿌연 담배 연기에 그의 지독한 우울이 가려졌던 전성기, 1950년 작품이며 <가을의 리듬, 1950>이라고 해. 그림을 봐. '가을'하면 떠 오르는 낭만이나 사색은 찾아볼 수 없어. 그에겐 보드랍고 달달하고 우수에 찬 것은 아예 없었어. 기품이나 품위 같은 고급스러움은 더더욱 없었지. 우린 그의 작품을 보며 거칠고 날 것이 주는 비릿함에 고개를 돌리려고 하지만 눈을 못에다 걸어 놓은 듯 시선을 움직일 수 없어. 저 열린 공간 어디엔가 마음이 묶이지. 무의식에 숨어있던 어두움이 깨어나.


  느루야, 그는 미국 서부 아리조나주, 수박농장에서 일꾼으로 일하시던 부모님의 5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구나. 아리조나주는 대지 밑에 잠들었던 거인이 난데없이 기지개를 켰는지 쭉쭉 뻗은 산봉우리와 넓은 초원이 펼쳐진 곳이야. 사람보다 거대한 산맥과 곰, 들소, 양이 더 많은 곳이지. 그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단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이웃에 입양되었는데 양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자였거든. 그나마 여덟 살 때, 양아버지가 집을 떠나 버리지. 오갈 데 없는 그는 큰 형 찰스를 아버지처럼 여기며 이 도시, 저 도시로 흘러드는 떠돌이 삶을 살게 돼. 또 딱히 다른 재능이 보이지 않던 그였기에 형을 따라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어. 그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미술 고등학교에 입학도 해보지만 끈기, 노력, 공부에는 애당초 소질이 없었어. 그는 걸핏하면 친구와 싸웠고, 거리에 침을 뱉고 상스런 말로 선생님들을 놀라게 했지. 폴락은 한동안 혹독한 계절 속에 있었어.


잭슨 폴락 <서부로 가는 길, 1934~35> 초기 작품은 서부의 풍경과 어두운 색채, 약간의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표현한 구상화가였다.


  열여덟 살이 되던 1930년, 형을 따라 도착한 뉴욕에서 폴락은 전혀 새로운 경험과 부딪쳐. 아트 스튜던트 리그(Art Students League)에 등록해 5학기 동안 드로잉과 회화를 공부한 것도 커다란 경험이었지만, 그림을 가르쳐 주었던 스승 토마스 하트 벤튼의 아들을 돌보는 베이비 시터로 일하면서 그 가족과 가까워졌지. 이때 폴락은 비로소 '가정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걸 느껴.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알게 됐지. 어쩌면 다시는 가질 수 없을 것이라는 불안과 함께.


  이십 대 후반, 그는 형수와의 마찰과 가난, 폭음 등으로 심한 우울증에 빠졌어. 특히 언어로써 자신을 적절히 표현하지 못했던 그였기에 심리 상담을 받았고 그림으로 치유를 시도하기도 했지. 그는 그 고독한 순간순간에도 우울의 안개 너머로 "나 자신을 표현하고 싶다."는 내면의 소리를 들었지. 자학적인 성격과 충분치 못한 교육으로 회화에 대한 역량이 부족했던 잭슨 폴락이 이즈음, 나중 현대미술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었던 우연한 계기가 생긴단다. 놀랍지?


  멕시코의 벽화가인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의 조수로 일하던 중, 벽에 석회를 바르고 그것이 마르기 전에 그림을 그리는 프레스코화 작업을 보게 되었지. 그는 벽화 작업이 갖는 역동적인 몸짓에 반했어. 또 캔버스 위에 유화나 수채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전통적인 방법이 아닌 에나멜페인트, 래커, 모래, 유리, 각종 사물이 작품의 재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돼. 시케이로스가 페인트를 붓고 떨어뜨리는 과정을 보며 그는 새로운 예술 기법에 눈떴지. 하지만 아직 그의 시대는 아니었어. 1930년대는 경제 대 공황을 극복하기 위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이 시행되고 있었지. 그러므로 미국이 위대해지기까진 조금 시간이 필요했어. 그에게 시대가 준 역사적 책무는 예술사의 새로운 주자(走者)로서 성조기를 들고 뛰는 것이었거든. 정통 유럽의 예술가들 앞에서, 20세기 문화는 위대한 미국이 상속받았음을 알리는 것이었지.    


  당시 폴락은 생계가 어려운 화가들에게 일거리를 제공하는 공익 미술작품 프로젝트(WPA, Works Progress Administration)에 참여하면서 동료 화가인 윌렘 드 쿠닝, 마크 로스코 등을 만나. 이들과 함께 고개를 길게 빼고 변해가고 있는 현대 회화의 방향을 멀리까지 바라보았단다. 나중 마크 로스코는 색면 추상이라는 또 다른 길을 걸어.


잭슨 폴락 <속기술의 인물 형상, 1943>

  

  1943년 '젊은 작가들을 위한 봄 살롱' 전시회가 열렸어. 잭슨 폴락은 <속기술의 인물 형상, 1943>이라는 작품을 출품했단다. 마침 자문위원이었던 몬드리안은 폴락의 작품 속에서 강렬한 회화의 미래를 보았지. "미국 화가의 작품 중 가장 흥미롭군요." 이 한마디는 20세기의 강력한 미술 컬렉터이자 후원자인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1898~1979)의 귀를 사로잡았고 그녀의 후원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돼. 비로소 알이 껍질을 깨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는 첫 발자국이 되었구나.


  그리고 1947년 겨울, 폴락은 이젤 위에 있던 캔버스를 버리고 화면을 넓고 평평한 바닥에 깔아 놓았어. 내면이 이끄는 충동대로, 감각과 직관이 시키는 대로 그는 온몸으로 그림을 그렸어. 붓을 내 던지고 페인트통을 잡았지. 마치 신이 광대한 우주 한가운데 서서 "빛이 있으라."라고 말하듯 그는 펼쳐 놓은 화폭 위를 걸어 다니며 공업용 페인트를 흩뿌렸지. 이른바 드리핑(dripping) 기법의 창조주가 되었어.


잭슨 폴락의 작업 모습


  폴락의 손끝에서 색과 색이, 선과 선이 교차하며 상상을 뛰어넘는 황홀한 면(面)이 모습을 드러냈어. 페인트가 떨어지고 부딪치며 생성하는 새로운 세상은 그의 강렬한 실험과 호기심이 창조한 것이지. 직관과 몸의 언어가 잉태한 작품들은 그동안 실제로 존재한 것을 표현하던 회화가 이제 작가의 무의식을 표현하는 길로 들어서는 현대미술의 추상성, 즉 '추상 표현주의'의 시작을 알렸어.


  특히나 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 1909~1994)는 폴락의 그림을 현대미술이 쓴 반성문으로 보았어. 그는 회화의 정체성이 '평면성'에 있다고 보았거든. 회화는 본디 2차원적 평면에 구현하는 세계니까. 하지만 그동안 많은 화가들이 2차원의 캔버스에 3차원의 공간을 집어넣으려 애썼지. 하지만 폴락의 작품을 봐. 시작도 끝도 없고, 중심과 주변도 없고, 구성도, 원근도, 색깔도, 이야기도 없는 순수 추상! 공간감이 완벽하게 사라진 완전평면의 구현이었지. 이는 그간의 오류를 바로잡고, 작가의 상상력이 건설할 수 있는 완벽한 세상이었어.


  그뿐만 아니라 폴락은 액션페인팅이라는 미국적 언어로 새로운 미술사를 기록했어. 헤럴드 로젠버그(Harold Roserberg, 1906~1978)는 폴락의 화면 위에 물감을 떨어뜨리는 회화적 행위인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은 회화 제작의 과정과 행위만으로도 충분히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개념 미술의 장르를 열었다고 평가해. 폴락에겐 잭 더 드리퍼(Jack The Dripper)라는 별명이 붙었어. 이후로 화가들은 '과거'의 회화 개념과 기법을 낡은 외투처럼 벗어 버렸고 현대미술은 그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았지.


잭슨 폴록 <노랑, 회색, 1948>


  1947년 이후 그가 사망한 1956년까지 그는 현대미술의 중심이었어. 화가로서 드로잉 실력도 약했다던 그의 시대는 어떻게 온 것일까? 1,2차 세계대전 후, 힘에 부치는 전쟁을 수행했던 유럽은 가난하고 심약해졌어. 유럽의 심장은 졸아붙었지. 화가들은 기존의 회화 전통에 대항하는 다다이즘과 입체주의, 신조형주의, 구축 주의 등 아방가르드적 모더니즘을 이끌었지만 졸아붙은 심장으로는 찬란한 시대가 요구하는 에너지를 펌프질 하기 어려웠어. 유럽의 명성들은 서둘러 미국행 비행기를 탔어. 양차 대전이 끝난 미국이 세계의 패권을 거머쥐었거든. 권력은 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대량생산시스템과 절대적 자본에서 나오는 20세기였으니까. 물적 기반은 미국의 머리에 새 시대의 왕관을 씌우고도 남았지만 왕관에는 정통성과 권위가 필요했어.


  미국은 가장 미국다운 이미지를 원했어. 비행기에서 내렸던 탁월하고 창조적인 예술가들은 유럽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었지. 하지만 잭슨 폴락은 미국인이었어. 게다가 담배를 물고 성스럽게 여겨졌던 캔버스를 발로 밟으며 종횡무진 페인트를 뿌려 댔지. 미국의 개척정신과 남자다움의 문화적 요약본이라고 해야 할까? 콜렉터였던 페기 구겐하임과 클레먼트 그린버그는 회화의 평면성과 비 재현성을 구현한 그를 미국의 예술적 영웅으로 부상시켰지.


  하지만 문화를 자본으로 소비하는 세상의 노련한 요구와 따가운 시선을 막아줄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가 없었던가 봐. 그는 마흔 넷이라는 아쉬운 시간만을 우리와 함께 했어. 사람들은 그가 새로운 작품과 독창적인 세계를 보여주지 못한다는 압박감 때문이었을 거라고 말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엄마는 참 안타깝구나. 그는 자신의 전력(全力)을 다해 도전해 보지 않고 세상을 떠났거든. 항상 자신으로부터 도망쳤던 폴락은 아내를 두고 미모의 여인들과 염문을 뿌렸고, 알코올 중독이 심해졌고, 갈수록 정서불안 행태를 보였어. 어느 날, 그는 애인을 옆자리에 태우고 시속 300km로 달렸단다. 그리고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 그가 그리 신속하게 도달하고 싶었던 곳은 어디였을까? 시작도 끝도 없는, 중심도 변두리도 없는 그림 속을 이 가을, 엄마가 서성대고 있구나.


잭슨 폴락 <Number 5, 1948>


  느루야, <모나리자 스마일>이라는 영화에서 폴락의 그림이 나온단다. 1950년 대, 평범한 서민의 딸인 캐서린 왓슨(줄리아 로버츠 역)은 명문가 자제들만 다닌다는 동부의 웰슬리 여자대학에 미술사 교수로 부임해. 그녀는 미술사 수업을 통해 자유롭고 주체적인 여자 리더를 키우려고 하지. 하지만 결혼해 현모양처가 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학교와 학생들은 자신의 생각엔 관심 없어. 오로지 교재를 암기하고 성적에 매달리며 왓슨을 서부 출신이라며 무시했구나. 고집 센 그녀는 다양한 현대미술을 소개하며 학생들 내면에 있는 스스로의 생각과 의견, 지성을 드러내려 애쓰지.


  견학을 위해 미술관에 도착한 날, 우연히 잭슨 폴락의 작품이 전시를 위해 막 도착했지. 나무 포장을 벗기자 드러나는 거대한 심연. 아이들은 낯선 그림에 황당한 말들을 쏟아놓는데 왓슨이 이렇게 말해.

  "부탁인데, 그만 좀 떠들고 그냥 봐. 숙제도 논문도 쓰라고 안 해. 다만 오로지 감상해 줘."

  

  "그냥 봐." 이 말이 엄마의 가슴에 훅 들어왔구나. 작품과 내가 일대 일로 마주 앉아 집중하는 것. 무의식을 깨워 서로의 진실한 숨결과 호흡을 느끼는 것. 그 안에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해 가는 것이야말로 추상이 주는 통렬함이라고 생각해. 여기서 폴락의 작품은 아이들이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도록 자극하는 매개로 쓰이지. 그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아.  


  느루야, 폴락의 <Number 5>를 마주하고 오롯이 감상해 보겠니? 언어가 둔했던 폴락이 하고 싶었던 말이, 나타내고자 했던 이미지가 네게도 말을 건네도록 말이야. 너도 이제 잡았던 손을 놓고 혼자의 힘으로 굳세게 걸어가려면 침묵 속에서 그림을 보듯 고독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엄마는 며칠 있으면 문을 두드릴 겨울에게 낙엽이 들려준 봄과 여름과 가을의 이야기를 전해 주려 해. 폴락의 그림을 보면서 말이야. 가을이 깊은 11월의 첫날, 아직 홀로서지 못한 청춘에게 선물처럼 한 편의 시를 보낸다.


  나는 배웠다

             

나는 몰랐다. 인생이란 나무에는

슬픔도 한 송이 꽃이라는 것을


자유를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은

펄럭이는 날개가 아니라

펄떡이는 심장이라는 것을


진정한 비상이란 대지가 아니라

나를 벗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인생에는 창공을 날아오르는 모험보다

절벽을 뛰어내려야 하는 모험이 더 많다는 것을


절망이란 불청객과 같지만

희망이란 초대를 받아야만

찾아오는 손님과 같다는 것을


12월에는 봄을 기다리지 말고

힘껏 겨울을 이겨내려 애써야 한다는 것을


친구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내가 도와주어야만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누군가를 사랑해도 되는지 알고 싶다면

그와 함께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면 된다는 것을


어떤 사랑은 이별로 끝나지만

어떤 사랑은 이별 후에야 비로소 시작된다는 것을


시간은 멈출 수 없지만

시계는 잠시 꺼 둘 수 있다는 것을


성공이란 종이비행기와 같아

접는 시간보다 날아다니는 시간이 더 짧다는 것을


행복과 불행 사이의 거리는

한 뼘에 불과하다는 것을


삶은 동사가 아니라

감탄사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인생이란 결국 배움이라는 것을

인생이란 결국 자신의 삶을 뜨겁게


사랑하는 방법을 깨우치는 일이라는 것을

인생을 통해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양광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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