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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노라 Nov 16. 2020

함께 맞는 비

  "혐오의 비가 쏟아지는데, 이 비를 멈추게 할 길이 지금은 보이지 않아요. 기득권의 한 사람으로서 미안합니다. 제가 공부를 하면서 또 신영복 선생님의 책을 읽으면서 작게라도 배운 게 있다면, 쏟아지는 비를 멈추게 할 수 없을 때는 함께 비를 맞아야 한다는 거였어요. 피하지 않고 함께 있을게요. 감사합니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 중에서-


  <아픔이 길이 되려면>이라는 책을 읽어 보셨나요? 부제는 '정의로운 건강을 찾아 질병의 사회적 책임을 묻다'입니다. 김승섭 저/동아시아 출판입니다. 전 이 저자에게 깊이 감동했습니다. 강력하게 필독을 권합니다. 



  이 곳 역시 다양한 사람과 천 갈래의 생각이 공존하는 곳일 테지요. 저의 생각과 선생님들의 생각이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많으리라고 여깁니다. 다만 스스로의 삶에 균형을 이루기 위해 타인의 생각에 귀 기울이는 것은 필요하고 타당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모든 의견은 존중받아야 하고 열린 마음으로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오늘은 데이비드 호크니를 빌어 '성 소수자'에 대한 담론을 올립니다. 작년 서울 시립미술관에서 데이비드 호크니의 전시가 있었지요. 그가 동성애자거든요. 작품도 접해 보시고 책의 내용도 관심 가져 주시면 반갑겠습니다.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 1937~ )는 어릴 때부터 청력이 나빴고 40세 즈음엔 거의 듣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글자나 숫자, 냄새에서 색채를 느끼는 공감각(Synesthesia)이 뛰어났습니다. 사물에 대한 섬세한 관찰력을 가졌고 빛의 다양한 굴절에도 민감했습니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영국 왕립 예술 대학을 우수하게 마친 후 '동성애자'라는 자신의 정체성과 영국 사회의 경직된 탄력성 사이에서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동성애는 영국에서 불법이었거든요. 미국의 자유로운 분위기와 따사로운 햇살에 매료된 그는 1964년 ‘미국으로 이주’라는 중요한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그녀 나이 90에 아들 '이삭'을 낳습니다. 'Isaac'이란 '웃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삭으로 인해 노령의 부부는 웃음을 되찾았습니다.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는 스페인 군대가 캘리포니아 지역을 정복해 Ciudad de los Angeles(천사들의 도시)라 이름 지었다가 Los Angeles로 굳어졌습니다. LA에는 천사들이 삽니다.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 1937~ )는 어둡고 보수적이고 을씨년스러웠던 영국 요크셔 지방에서 아브라함 부부에게 웃음을 찾아준 이삭처럼, 자신에게 웃음을 찾아줄 천사를 찾아 미국 LA로 옵니다. 


데이비드 호크니 <더 큰 첨벙>


  이제 그림을 보시겠어요? 너무도 유명한 작품 <A Bigger Spiash, 더 큰 첨벙>입니다. 햇살이 스며든 수영장입니다. 화면의 중간이 나뉘어 있네요. 위로는 반듯하고 네모난 건물이 있습니다. 건물의 창에는 맞은편 건물의 그림자가 비칩니다. 유리창 가운데 빈 의자가 하나 놓여 있군요. 벽돌색 건물 옆으로 목이 긴 두 그루의 나무는 서고 잔디는 누웠습니다. 수직과 수평이 만나 미니멀하고 편안해 보입니다. 


  화면 아래쪽은 훨씬 생동감 있습니다. 누군가 뛰어든 것일까요? 수영장의 파란빛 위에 하얗고 자지러지는 물 조각이 사방으로 튀어 오릅니다. 튀어 오르는 순간을 다리미로 꾹 누른 듯 캔버스는 납작하고 조용하며 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불쑥 나온 다이빙대만이 모르는 척 시치미를 잡아뗍니다.


  호크니의 수영장에는 비치볼이나 파라솔이 없습니다. 수영복을 입은 사람도 없습니다. 한데 물 표면의 무늬와 파장은 시선의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풍덩’ 물무늬를 따라가, 움직이고 설레고 행동하는 무언가를 찾게 만듭니다. 마치 캔버스 안에 내 안의 무언가가 빠진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목을 내밀어 물속을 들여다보게 하지요. “무언가 커다란 게 수영장에 빠졌나 봐요.”


데이비드 호크니 <수영장 시리즈 중>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그의 그림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정지된 순간, 튀어 오르는 물방울만이 엑스맨의 퀵실버처럼 "소리 없는 아우성'을 보여 줍니다. 무성영화를 저배속으로 틀어 놓은 듯도 하고  '운동 중의 정적' 같은 느낌 때문이기도 하고...  


  그는 시대가 추상에 환호할 때, 주류에서 벗어나 침착하게 구상에 몰두했습니다. 색다른 행보였지요. 그는 의식과 무의식, 딱딱한 것과 부드러운 것, 고정된 것과 흐르는 것의 내적 질감을 ‘물’을 통해서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그의 작품 곳곳에 깊은 심연에 어른대는 동성애자라는 자아의 그림자가 물의 이미지를 통해 숨어 있습니다. 그의 대표작이자, 생존 작가 중 제프 쿤스와 엎치락뒤치락 미술 작품 최고가를 갱신하고 있는 <예술가의 초상>입니다.


데이비드 호크니 <예술가의 초상>


  분홍빛 재킷을 걸친 남자가 그의 연인이었던 피터 슐레진저라고도 하고 금발로 염색한 호크니 자신이라고도 합니다. 또 수영장 속에 있는 남자가 호크니라고도 하고 그의 무의식이라고도(1인 2역) 합니다. 명산이 천 갈래의 계곡과 비밀스러운 봉우리로 보는 곳마다 위엄이 다르듯, 명작은 심층적이고 확장된 해석의 가능성을 통해 미적 도발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 미술 비평가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작품이지요.


  데이비드 호크니의 작품세계는 그의 성 지향성을 중심에 두지 않으면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호크니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삶이 곧 예술"이니까요. 사람을 이해하지 않고는 작품도 없습니다. 천사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신의 음성을 전하듯, 사회의 소수자인 호크니는 규정되지 않는 유연함으로 우리들의 두텁고 견고한 사고의 벽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데이비드 호크니 <수영장 시리즈 중>


  이 작품의 모델도 '피터 슐레진저'입니다. 그는 여러 작품에서 일반적인 연인들처럼 자연스럽게 만나고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특히 미국 캘리포니아로 이주 후 <수영장 시리즈>에서는  자신의 존재와 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안정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동성애에 대해 수용적인 곳,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지 않는 곳에서 그는 물을 오브제로 한 지속적인 것과 순간적인 것에 대해 더 깊이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또 여러 작품에서 시간의 흐름과 다중 시점을 한 화면에 담으려는 실험도 쉬지 않았지요. 폴라로이드 사진을 전 방위로 합성하기도 하고 드로잉, 판화, 사진, 회화 등을 섞은 콜라주 작업에도 매달렸습니다. 


  그는 다양한 작품을 통해 적극적으로 성소수자를 옹호하고 권리를 보호하려 애씁니다. 에칭 기법을 이용한 판화작업을 통해 사랑의 다양한 형태를 보여 줍니다. 차이콥프스키가 끝내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히지 못했던 것과는 사뭇 다르지요? 시대가 많이 변한 것도 큰 도움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소개해 드렸던 책의 한 구절을 볼까요?


  "동성애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중요한 것은 동성애자들이 스스로 자신이 성적 지향을 선택한다는 감각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대다수의 경우 개인이 스스로 동성애자임을 인지하게 되는 10대에 이미 성적 지향은 선택의 영역이 아니게 됩니다. 대부분의 이성애자가 스스로의 성적 지향을 적극적으로 선택해서 이성애자가 되지 않은 것처럼 동성애자 역시 스스로 선택하여 동성애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데이비드 호크니 (왼) <로스앤젤레스의 실내 장면> / (오) <샤워장의 두 남자>


  이 책은 우리들이 흔히 동성애자의 질병으로 알고 있는 AIDS에 관해서도 '팩트체크'를 해 주고 있습니다.

  "의학적으로 첫 AIDS 환자는 1981년 미국의 동성애자였지만 1970년대 후반에 케냐를 비롯한 중앙아프리카 국가에서 성매매 여성을 중심으로 HIV 감염이 널리 퍼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후에 알려졌습니다. 원인인 바이러스 규명과 함께. 이는 AIDS가 동성 간, 이성 간 성관계 모두 바이러스에 감염된다는 의학적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 <아픔이 길이 되려면> 중에서 -


  한국 사회는 과학적 사실 위에서 논쟁을 시작해야 하고, 다수가 소수를 억압해서는 안되며, 제도가 존재를 부정할 때 몸이 아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 소수자들은 이성애자들에 비해 더 아픕니다. 이성애자에 비해 성소수자의 자살시도 유병률이 2.5배,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유병률이 1.5배 높은 것으로 보고 되었습니다."


 "인간을 수단화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하라."라는 거창한 철학적 명제나 철학자를 끌고 오지 않아도 우린 이 말의 울림을 지나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능력이나 소유, 신분으로서가 아니라 존재 자체로서 이미 의미 있다고 말합니다. 그건 누구에게나~ 그렇습니다. 데이비드 호크니의 작품과 김승섭 님의 글을 빌려 '성 소수자'에 대한 얘기를 살짝 올려 보았습니다. 혹시 불편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만...  전 이 사회에 대해 저자가 갖는 입장에 공감합니다. 한 번쯤, 생각해 주시겠어요?


  "아름다운 사회는 나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예민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 그래서 열심히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자신의 자존을 지킬 수 없을 때 그 좌절에 함께 분노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사회라고 생각해요."  -  <아픔이 길이 되려면> 중에서 -


  마지막으로 성 소수자에 대한 영화 <바비를 위한 기도> 중 한 장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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