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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마 Sep 02. 2020

인간에 의한 인간의 소외

경제학-철학 수고 by 칼 마르크스, 이론과실천

앞에서 이야기하였던 양자오는 다윈, 마르크스, 프로이트 입문서를 출간했습니다. 이 세 명이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목적지향적(결정론적) 세계관에 새로운 방향성, 제가 좋아하는 표현대로 하자면 관계지향적 세계관을 제시하였습니다. 다윈은 ‘종의 기원’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통해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을 통해 나와 나 자신의 관계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였습니다. 제가 글을 쓰면서 자주 마르크스를 언급하는 이유는 바로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보는 관점이 인권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위해 만들어 놓은 사회와 구조에서 정작 인간이 소외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는 이 책에서 ‘소외된 노동’을 이야기하면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소외’를 주장합니다. “인간의 소외, 일반으로 인간이 자기 자신과 〔맺는〕 일체의 관계는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야 비로소 실현되고 표현된다. 그러므로 소외된 노동의 관계 속에서 각각의 인간은 자기 자신이 노동자로서 존재하는 척도의 관계에 따라 다른 사람을 본다.” 인간이 자신의 노동, 그리고 자신의 노동 생산물, 최종적으로는 자신과 타인의 관계에서 분리(소외)되어 결국 인간적 본질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마르크스와 조금 다른 의도일지는 모르나 인권을 고민하는 제 기준에서 다시 풀어쓰자면, ‘사회 문화적 차이는 있겠으나 각자의 인권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실현되고 표현된다. 다른 사람의 인권을 침해하고 제한하는 것도 결국 인간이고, 그 정도에 따라 우리는 각자의 인권과 본질을 잃어버릴 수 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내가 생산하고 만들어 낸 것이 곧 ‘나’를 나타내었습니다. 대장간 집 막내아들, 방앗간 집 큰 딸로 자기를 소개하던 시절에 나의 정체성은 내가 하는 일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그러다 보니 내가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의미를 부여하였습니다. 내가 만든 호미와 떡은 나를 나타내었습니다. 마르크스적으로 말하자면 내 몸에서 내가 하는 일이 나타나고, 하는 일이 나의 신분을 나타냈습니다. 내가 하는 노동이 곧 내 삶이었고, 정체성이었으므로 일과 삶이 일치하였습니다. 그러나 현대는 그렇지 않습니다. 내 노동으로 만들어낸 것은 ‘나’와 분리됩니다. 내가 만들어 낸 것은 단순히 내가 일하는 공장에서 찍어내는 수많은 생산물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내 노동은 생존을 위한 수단이 될 뿐입니다. 내가 배워서 하는 일은 내 삶과 정체성에 전혀 관계가 없고, 단순한 생활수단이 되어 일과 삶을 분리합니다.      

이런 현상은 우리 사회에 윤리 부재와 인간 소외로 나타납니다. 내가 하는 일과 내 삶은 전혀 관련이 없다 보니 학생 앞에서는 스타 강사이지만 집에서 불법 영상물을 생산하고 관리하였습니다. 내 직업과 정체성은 별개이다 보니 환자를 치료하면서 성추행하고 사람을 죽여도 의사 면허는 유지됩니다. 내가 어떤 범죄자를 변호하든 소송에서만 이기면 그만입니다. 나와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 분리된 결과입니다.      

내가 하는 일과 삶이 분리되면 내가 하는 노동은 단순히 육체와 정신을 소모하는 부정적 활동이 되어 노동하지 않을 때 행복과 편안함을 느낍니다. 노동은 자발적 활동이 아닌 강요된 강제노동이 되고, 노동의 결과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성과가 됩니다. 노동을 열심히 할수록 나와 상관없는 일에 인생의 3분의 1을 허비하는 꼴입니다. 내게 속하지 않은 활동에 강요당하는 삶은 나라는 존재로부터 분리된 인간 소외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소외되는 현상의 정점에 ‘사유재산(자본)’이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제가 더 주목하고 싶은 것은 그가 ‘관계’라는 세계관으로 소외를 파악한 사실입니다. 노동 생산물과 노동자의 관계, 생산활동과 노동자의 관계, 인간 본질과 노동자의 관계,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타인과 노동자의 관계. 그리고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소외. 내가 자신으로부터 분리되고, 타인에 의해 소외되며, 인간 본질로부터 소외되는 시대에 자유로운 인간과 그러한 인간들의 ‘관계’에서 출발하였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출발점이 인권의 출발점과 동일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마르크스가 살던 시대에는 목적론적(결정론적) 세계관이 득세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모든 것에 목적이 있고, 그 목적에 맞지 않는 것은 의미가 없었습니다. 주어진 목적에 맞게 살아야 하고, 목적에서 벗어난 것은 존재가치가 없었습니다. 목적 이외의 것은 모두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 방법, 매뉴얼일 뿐입니다. 목적론적 세계관은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목적에 종속된 수단으로써만 인정하였습니다. 목적에 의한 구속과 소외가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마르크스는 ‘관계’라는 관점에서 사회를 보았습니다.      

소외되고 외부화된 것을 본질과 내부로 돌리고, 인간 본성에 어울리는 옷(시스템)을 지어 입고, 아무리 소외되어도 인간 본질에서는 소외되지 않는 사회. 인권이 바라보는 지점에서 마르크스의 이론이 출발합니다.      

이 책의 맨 뒷면 안쪽에는 출판사가 이 책을 다시 발간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1987년 우리가 발간했던 이 《경제학-철학 수고》를 20년이나 지난 지금 다시 발간하는 까닭은, 이 책이 저술되었던 1844년이나, 한국 사회에서 처음 발간된 1987년이나, 지금이나, 인간 사회의 저 심연에 자리 잡고 소멸하지 않는 악마적인 힘, 그 힘이 존재하는 한 칼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수고》는 그 힘과 대결해 낼 수 있는 사유의 무기로써 그 역할을 온전히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는 ‘지금이나’ 다음에 ‘내가 이 책을 처음 읽은 2017년이나’를 추가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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