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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마 Sep 07. 2020

코나투스, 인권의 또 다른 이름

에티카, 자유와 긍정의 철학 by 이수영, 오월의봄

     

철학이 좋아서 취미 삼아 철학책을 읽다 보니, 책장에서 주로 보이는 철학자가 스피노자, 니체, 마르크스, 바우만, 레비나스, 리오타르 등입니다. 이 중에 스피노자는 가장 오래된 사람이고 동시에 나머지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스피노자는 제가 학교 다닐 때 들었던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사실 이 한 문장에 그의 철학적 실천이 그대로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런 스피노자를 읽을 때 두 번째로 많이 접하는 단어는 ‘코나투스’입니다. 우리말 사전에도 올라있는 코나투스는 어떤 실체가 자신의 속성을 유지하거나 확장하려는 내적인 경향성 혹은 노력을 뜻합니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내 존재를 지속하고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고, 인간으로서의 본질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코나투스를 가지고 있고, 코나투스 차원에서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동등한 존재가 됩니다.      



가진 자나 못 가진 자, 능력자나 무능력자, 건물주나 세입자나 모두 능력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코나투스 상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모두 각자가 좋아하고 원하는 방법대로 자신들의 코나투스를 실현하고자 하는 현실적인 본질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누구나 다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고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코나투스를 가지고 있고, 그런 면에서 모든 인간은 동등한 자연권(rights of nature)의 소유자입니다. “바로 이 코나투스적인 자연권의 차원에서 자유인과 노예 사이에는 하등의 차별도 있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 저자처럼 모든 인간이 자연적으로 부여받은 코나투스는 인간의 본질입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자연권을 현재 우리 사회에 구체적으로 적용한다면 아마도 헌법 10조부터 22조까지 나와 있는 기본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평등, 생명권, 신체의 자유, 거주 이전의 자유, 직업의 자유, 주거의 자유,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 통신의 자유,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 언론 출판의 자유, 집회 시위의 자유, 학문 예술의 자유. 국가인권위원회도 이 기본권을 조사 영역으로 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스피노자는 이런 코나투스에 충실한 삶, 다시 말해 자기 실존을 보존하고 유지하기 위해 우리에게 가장 좋은 상태는 내 이익이 곧 타인의 이익이 되는 상태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본성에 일치하는 삶이고, 진정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고, 이성에 따른 삶이며, 윤리적인 삶입니다. 이러한 삶을 세계인권선언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해 한 인간으로서 의무를 지고(29조), 다른 사람의 권리와 자유를 파괴하기 위해 자기 권리를 사용할 권리는 없다(30조). 타인의 코나투스를 위한 노력과 자기 코나투스를 위한 노력이 다르지 않은 것이 인권입니다.     



이러한 스피노자의 관점을 좋아하는 데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과거 절대적인 진리와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고민과 성찰을 추구하던 철학 하에서는 개인이 가진 고유한 권리, 천부인권적인 접근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절대적 진리의 추구가 아닌 내가 타인에게 나타나는 방식으로 나 자신에 대한 성찰, 즉 내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사람과 환경을 통해서 자신을 알아가는 사유를 했습니다. 개인의 본질을 이루기 위해 가장 적절한 조건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즉 공동체(사회)라고 하였고, 타인과의 관계는 나를 유지하기 위한 근본적인 조건이라고 했습니다.      



스피노자식으로 말하면 인권도 사회적 현상이고, 사회적 현상을 해석하여 내 삶에 적용하는 방식이 중요합니다. 타인의 억압이나 강제에서 벗어나는 것이 자유가 아니고, 타인과 함께 자신의 본성이 동일하게 이루어져서 서로가 서로에게 강제하거나 제약이 되지 않는 것이 자유입니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나를 발견하고, 타인의 코나투스와 나의 코나투스가 만나는 곳에서 인권이 시작됩니다. 인권은 무인도에 홀로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타인과 어울려 사는 공동체성이 바탕이 되는 개념입니다.      



마지막으로 스피노자에 대한 저자의 글을 인용하면서 글을 마치려고 합니다. “이렇게 개체의 본질과 개체의 실존을 서로 구분되는 것으로 사유할 수 있는 스피노자의 철학을 바탕으로 우리는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차별에 대해 거부할 수 있는 개념을 얻게 된다. 피부색을 들어, 신체의 장애 여부를 들어 인간을 차별할 때 우리는 그들이 인간의 본질에 외부적이고 중요하지 않은 부분들에 집중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피부색이나 성별의 차이, 혹은 신체장애의 정도가 인간의 본질을 결정할 수는 없다. 스피노자에게 중요한 것은 본질의 차이, 즉 자유인으로 사는가 아니면 노예로 사는가에 있다. 새까만 피부에도 고귀한 자유인일 수 있고, 하얀 피부여도 노예일 수 있다. 혹은 팔다리가 없어도 자유인일 수 있고, 사지가 멀쩡해도 비천한 노예근성의 인간일 수 있는 것이다. 본질과 실존을 구분하는 스피노자의 개체론은 이처럼 인간 해방의 철학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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